[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 "서...선생님." 감정이 꽈악 잡힌 목소리. "용건은 간단하게." 무미건조한 대답. "좋, 좋아합니다!" 심장 두근거림까지 느껴지는 고백. "그래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대꾸. 딩-동-댕-동. "종쳤다. 수업 안 들어가냐?" 놈은 유난히 긴 다리를 가볍게 꼬면서, 회전의자를 빙 돌려 쓰던 서류를 마저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고백한 놈은 새빨개진 얼굴로 "어... 그렇지만... 저..."만 반복하다가,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하고 후다닥 양호실을 뛰어 나간다. 새까만 머리칼의 매혹적인 눈빛의 남자-. 그가 우리 아이코 고등학교의 양호 선생인 카즈야 히데야키다. ........선생. ........사실은 그런 호칭이 아까울 정도로, 왕싸가지에다 싸이코 기질이 있는 변태일 뿐이지만. ".....다들 미쳤어. 이런 왕싸가지 변태가 뭐가 좋다고." "환자면 환자답게 입 닥치고 잠이나 퍼자." ".....늙은이, 귀만 밝기는." 촤악-. 커텐이 걷혀지면서 눈부신 햇볕이 침대 머리맡까지 기어들어왔다. 아, 그 햇볕을 신경쓸때가 아니다. 중요한 건, 내 앞에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놈의 얼굴 한구석이 찌그러져 있다는 거다. "주, 죽일테면 죽여봐라!" 난 베개로 머리를 막으며 그렇게 소리쳤다. (.....나도 참 소심한 놈이었군.) "후후, 내가 우리 사랑스러운 슈야를 왜 죽이니." 놈은 씨익 웃으며 차갑고 매끄러운 손으로 내 턱을 잡고 강제로 들어올렸다. 키, 키스 하려는 건가? 나는 재빨리 입을 꾹 다물었고, 놈은 "호오~"하는 탄성을 내뱉으며 내 목덜미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읏, 차가워! 뭐하는 거야, 이 왕싸가지야!" "왕싸가지라니, 그게 선생님한테 무슨 말버릇이니~ 우리 슈야, 혼 좀 나야겠네." 놈은 한 팔로 내 목을 와락 껴안으며 낮게 웃었다. "후후, 집에 가서 보자~? 차마, 2교시 수업이 남은 너를, 반불구자로 만들 수는 없으니." ".........웃기지마!! 누, 누가 너 같은 놈한테...." 타앙-. 놈이 어깨를 벽에 밀어붙이는 탓에, 꽁꾸리트 벽에 머리를 박았다. 온 머리가 지이잉하고 울린다. "....뭣하면 지금 해줄까....?" "미, 미쳤어?!" "뭐, 우리 슈야가 원한다면야..." "하지마!! 죽여버릴꺼야!!" "녀석, 말버릇 하곤. ........피를 끓게 만든다니까." 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와이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져서, 복도 쪽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 우우웁!!" 아아아악!! 혀가 들어왔어!! 매끌매끌해!! 기분 나빠!! 으, 으윽... 빨아 당기지마, 싫다구!! "후..." 예, 예상과 달리 빨리 떼어냈다?! 내가 비명을 질러서, 다른 선생님이 오실지도 몰라서 몸을 사리는 건가?! "딸기 사탕 먹지마. 난 딸기 사탕 싫어." "뭐?" 놈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내 입술을 번들번들하게 만들고 있는, 누구것인지 모를(!) 침을 혀로 핥아내고 다시 쳐들어왔다!! 순간적인 일이어서, 난 악소리 한번 못 질렀다!! "음?" 아, 복도 쪽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날 구해 주려는 선생님의 발걸음일꺼야!! 아아, 신이시어. 감사합니다!! "훗...." 그, 그런데 이 미친 놈은 발걸음 소리가 양호실 앞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니고 있다. 이, 이거 정말 미친 거 아냐?! 학교에서 짤리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타앙-. 문이 열림과 동시에 놈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 아슬아슬한 시차에,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다. "무, 무슨 일입니까? 학생 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놈은 창가 쪽으로 살짝 몸을 돌리며-나, 나는 봤다!! 그 놈이 씩 웃으며 입술을 핥는 것을!!-천연덕 스럽게 말했다. "슈야 군이 어깨가 아프다고 해서, 벽에 대고 눌러 어깨 교정 좀 해주려고 했는데... 다 큰 녀석이, 엄살을 피우는 군요." ..........카즈. ..........당신 정말 존경스러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안색 하나 안 변하고 천연덕 스럽게 거짓말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 "하나마치 군, 카즈야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는 짓은 하지 않도록." 선생은 엄하게 말한 후, 약간 붉어진 얼굴로 카즈를 향하여 말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카즈야 선생님이라고 이름을 불러버렸군요." 놈은 선생을 향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히데야키 선생님보다 듣기 좋은 걸요." "그, 그렇습니까? 그럼 앞으로 카즈야 선생님이라고..." ..........어이, 이봐. 이젠 선생도 꼬시냐? "그, 그럼 수고 하십시오." "예, 살펴 가세요." 놈은 싱긋싱긋 웃으며 선생을 마중한 후,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하던 거나 마저 해볼까?" 철컥-. ................... ................... ................... 잠궜다!!! "이, 이봐, 왕싸가지!! 다, 당신 미쳤어?! 학교 계속 다녀야 하지않아, 응?" "선.생.님." "뭐?"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슈야군~" ................소름 끼친다!! "뭐, 가끔은 집 밖에서 하는 것도 새로운 기분을 들게 해주겠지. 한적한 오후,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오는 양호실에서의 진한 데이트라...." "하지마, 제발, 응?" .......그, 그런 표정으로 보지마!! 이런 상황에 애원조로 안 변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호오, 그 표정 좋은데. 무릎꿇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 표정으로 [잘못했어요, 주인님]이라고 빌면, 뭐 생각해 보지." ...............변태야. 당신은 정말 변태라고!! "아하하하, 참 평화로운 오후지 않아, 슈야군?" .................게다가 미쳤기까지 해!! "자아, 어서 빌어보렴. 강제로 해버리기 전에~" ...............내가 어떻게 했냐고 묻지 마. .........지금 빌고 있는 중이니까. ;ㅁ; "죄송해요, 주인님. 용서해 주세요. >_<;" "아아.... 슈야군의 우는 얼굴, 정말 사랑스러워. ............때려줄까?" "하지마, 제발!!;;"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 "어라, 슈야!" 교실 문을 열자, 뒤에서 공을 가지고 놀던 다카오카 무리가 다가왔다. 그 중, 내가 가장 정상인다운 정상인 친구라고 생각하는 켄지가 내 머리를 부스스하게 쓸면서 말했다. "그래, 몸은 좀....." ....어쩐지 켄지의 표정이 이상하다. 서, 설마 냄새가 나나? 그 자식,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향수도 더럽게 많이 뿌리고 다니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으면 냄가 베일 수 밖에 없잖아!! "왜, 왜 그래? 뭐 잘못된 거라고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켄지의 눈이 나의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환장하게도, 어디를 쳐다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귀, 귄가? 설마 이자국이 남기라도.... 아, 아니.... 보, 볼인가? "아, 몸은 좀 괜찮아?" 마, 말이 넘어간다. 왠지모를 안도의 한숨. "괜찮긴... 무릎 다 까졌다, 씨이." "빈혈 때문에 누워있겠다던 놈이, 왜 무릎이 까져서 와?" "으으, 그럴 일이 있어." 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카오카는 공으로 내 머리를 툭툭 치면서 장난을 걸다가, 무릎을 까졌다는 말을 듣고 정색을 한다. "이리 앉아봐, 연고제 발라줄께." "됐어. 이딴 건 그냥 두면 나아." "야, 그러다 파상풍 걸려서 다리 절단하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넌 생각을 해도, 어떻게 그렇게 재수없는 생각만 골라서 할 수가 있냐?" 나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다카오카가 시키는 대로 책상에 걸터 앉았다. 켄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무릎에 맺힌 피를 닦아주었고, 다카오카는 조심조심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나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그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식들, 형님이 다치니까 마음이 아프냐? 하기야, 내가 너희들이 기저귀 차고 빨빨거릴때부터 키워줬으니..." 순간, 놈들의 표정이 굳었다. ".......젠장, 그냥 파상풍걸려서 병신되게 할껄." ".......나, 손수건 태우고 올께. ^^" ..............썩을 놈들. (켄지, 너마저 나를 버리냐;;) "울지마, 미무라. 그 선생님, 노말이라서 남자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고백한거잖아." 1분단에서 들려오는 말이 내 귀를 잡아당긴다. 지금, 누가 노말이라고 한거냐? "흑... 그렇지만, 그렇게 무신경하게...." "하루에 열 명도 넘게 고백한다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무신경해질 수 밖에 없지." ........이 자식아, 난 네 놈이 부러워 죽겠다!! 이 왕싸가지 변태야!! 제발 나한테도 무신경해 달란 말이다!! 미무라, 미무라!! 너도 나처럼 그 왕싸가지 변태의 진실을 알게 되면!! "헉!" 놈이다!! "왜 그렇게 깜짝 놀래니, 하나마치 군?" 나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서, 놈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왕싸가지 변태) 선.생.님! 양반은 못 되시는 군요!" 놈은 빙긋빙긋 웃으며 다른 아이들이 들리지 않을 만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또 내 욕하고 있었지?" "당연하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고, 놈은 웃으면서 말했다. "훗... 죽여버린다." 나는 나름대로 독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 "그 말, 크게 말씀해 보시죠?" "크게?" "흐응, 변태인 주제에, 담이 작아서 못하려나?" "......좋아, 후회 안하지?" "안해요!" 놈은 싱긋 웃으며 정말로 크게 말했다. "슈야, 사랑한다!" 라고. ................ ................ ................ ................ ................ ................ 하하, 날 사랑한데. ................ ................ ................ ................ ................ ................ ................ 뭐?! "야, 들었어? 히데야키 선생님이 슈야보고 사랑한데!" "진짜?" "잘못 들은거 아냐?" 소... 손이 파르르 떨린다. "미.. 미쳤어?!" "너무하는 구나, 슈야. 난 단지.... 널 친아버지처럼, 친형처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 건데.... 넌 내가 특별히 아끼는 애제자잖니." 하하...... 그래서 그렇게 친아버지처럼, 친형처럼 밤마다!! 응?!! 그, 그.... 그랬냐!! "에이, 난 또 뭐라고..." "히데야키 선생님이 남자애한테 그런 말을 할리가 없지." 얘, 얘들아!! 제발 속지마!! 이 자식, 진짜로 왕싸가지 변태란 말이야!! "슈야군." "뭐야, 또!!" 놈은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목을 가리켰다. "목? 목이 왜?" 놈은 손가락 끝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자신의 목에 갖다댔다. 뭐야,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바보같기는." 놈은 입모양으로 무어라 말했다. 이? 이으? 이으아으? .............. "주, 죽여버릴꺼야아아!!" 나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교실을 도망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망할 자식.... 망할 자식..... 고 10분 잔 사이에, 키스 마크를 박아 놓은 거냐!! "아하하하..." 저, 저 씹어먹을 놈의 웃음소리!! 저주할꺼야!! 쿠당탕-. "어라, 슈야?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거야?" "켄......." 자, 잠깐.... 그럼 아까 켄지가 뚫어져라 쳐다본 것도..... "흑, 죽여버릴꺼야아아아아!!" 아아, 신이여.... 만약 존재한다면, 제발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 사는 악마놈 좀 데리고 가줘!! 저 놈은 정말.... 악마중의 악마란 말이야!! ;ㅁ;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3 나는 화장실 변기 위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딩-동-댕-동 하고 하교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카즈, 이 짓궂은 놈.... 그런 장난은 집에서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란 말이야....' 나는 다카오카가 붙여준 반창고를 목에 붙이고 터덜터덜 교실로 향했다. 종례는 이미 끝났는지,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한 사람.... 이 아니라 한 놈이 있구나. "카즈, 너어....!!" 나는 쿵쾅 거리는 소리를 내며 카즈의 앞으로 걸어갔다. 카즈는 무슨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내가 코 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멍하니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이 왕싸가지 변태야!" "아... 왔어?" "지금 [아, 왔어?]라는 말이 나와? 겨우 고 10분 잤구만, 그 새를 못 참고...." 나는 목에 붙인 반창고를 떼내 놈의 눈 앞에 흔들며 말했다. 놈은 그제야 본래의 얼굴로 돌아와 뻔뻔하게 웃으며 말한다. "슈야가 잘못한거야. 견딜 수 없을 만큼 예쁘게 잤으니까."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해, 지금!!" "........키스하자." "뭐?" 카즈의 입술이 닿았다. 하지만 내가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혀를 집어넣지는 못했다. 카즈는 몇 번 강제로 시도하다가, 입술을 떼어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후... 뽀송뽀송한 어린애한테 거부당하다니.." "흐응, 그래, 내가 뽀송뽀송한 어린애라서 밤마다 건드리지 못해 안달이냐? 집에서 하는 걸로 그치면 또 몰라. 학교에서까지 불러내서 그러면 어쩌.... 앗, 하지마. 싫어." 나는 내 와이셔츠 단추를 건드리는 그의 손을 제지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본인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요염하게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거부하는 이유가 뭐야. 집에서는 그러지 않잖아." "여긴 학교잖아. 학교에서 이러는 건 싫단 말이야." "왜?" "카즈가 선생님이니까." 내 말에, 카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가 학생이기 때문이 아니라?" "난 학교에 별 집착 같은 거 없어. 이 학교도, 카즈가 다니라고 했기 때문에 다니는 걸. 하지만 카즈는 여기가 직장이잖아." "......그래도 싫어. 거부하는 건." 으으, 이 고집불통! 순 나이만 헛먹은 어린애야! "슈야...?" 후우, 참자, 참아.... 조금이라도 더 어른스러운 내가 참자.... "싫어서 거부하는 게 아니란 거 잘 알잖아... 내가 집에서 카즈 거부한 적 있었어...?" 카즈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사랑한다구...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조금만 참아. 응...?" 나는 카즈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귓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카즈는 내 등을 감싸안으며, 뺨을 더듬어 입술을 찾았다. 내가 입을 열어 혀를 받아들이자, 카즈가 내 어깨를 벽에 밀어붙히며 거칠게 입술을 훑기 시작했다. "후...... 이번엔 바나나 맛이냐." 카즈는 내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고, 나는 그의 정장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넣으며 "흐응, 딸기가 아닌게 다행이지 않아?"라고 대꾸했다. 방과후라 그런지 그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조금 더 적극적이 되었지만, 누가 올지 몰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아, 짜증나. 학교 싫어...." 나는 내 목과 어깨를 탐닉하고 있던 그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집으로 가자. 여기 불안해." 카즈는 그를 밀어내는 내 팔목을 자신의 등뒤로 끌어내며, 나에게서 입술 떼지 않은채 말했다. "난 그 때까지 못 참아." "어리광 피우지마, 바보...! 죽일꺼야...!" "침대에서? 오늘 밤은 참 황홀하겠군." "그런 죽인다는 말이 아니잖아!" "쉿." 카즈는 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잠시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쪽으로." 카즈는 내 어깨에 그의 자켓을 덮어주며, 멀티미디어 뒤에 난 작은 공간으로 날 잡아끌었다. "왜 그래?" "쉿...." 잠시 후, 교실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ㅡ. 다카오카와 켄지였다. 켄지는 어딘지 모범생 같은 이미지여서, 노는 놈으로 찍힌 나와는 어찌 보면 잘 어울리지 않을 법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와 나는 다카오카와 함께, 반 녀석들 사이에서 한 패거리로 인식될 만큼 친하다. 그가 나의 어떤 면을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의 어른스러움과 자상함을 좋아한다. 다카오카야.... 성격으로는 나하고 판박이이니, 싫어할 것도, 좋아할 것도 없이 잘 어울리고. 켄지와 다카오카는, 나와 켄지와는 다른 의미로 분위기가 다르다. 다카오카가 필드를 뛰어다니는 열혈 소년이라고 한다면, 켄지는 그늘 아래에서 독서를 즐길 도련님이라고나 할까나. 다양한 의미로 학교에서 노는 놈이라고 찍힌 나나, 학급 실장이면서 모범생으로 알려진 켄지나, 축구부인 탓에 떨어지는 성적으로 이래저래 불려다니는 다카오카나, 우리 셋은 정말 안 어울릴법 하면서 잘 어울렸다. 반 녀석들이 [언발란스 3형제]라고 부르는 데에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다카오카, 미안해. 내가 도시락을 싸와서...."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난 괜찮아."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좋아하기로 해놓고." 헉, 둘이 사귀나?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슈야가 웃으면서 쳐다볼때마다.... 이 떨림을 어떻게 감춰야 할지 모르겠어." "후, 사실은 나도 그래..." ......나쁜 놈들. 나만 소외 시키다니. ;ㅁ; "그 자식, 요새 색기가 더 짙어 보이지 않냐?" "으, 으응...." "의심스러워...." "혹시... 애인이 생긴걸까?" "설마! 애인이 생겼으면, 학교에서 하루종일 같이 있는 우리가 모르려고!" 이, 이봐들. 설마 그거, 내 얘기냐?! 내, 내가 언제 네 놈들한테 색기를..... 아.... 등꼴이 오싹하다;; 터억, 하고 카즈의 손이 내 맨어깨에 닿자 소름이 쪽 끼쳤다;; '헤...헤..;;' 카즈의 입모양. '웃지마.' .........내일 학교 오기엔 그른 듯 싶다;; "이대로 다른 사람한테 슈야를 빼앗기면 어떡하지...." "절대 안돼, 그건. 차라리.... 네가 슈야하고 잘되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놈한텐 절대 못 넘겨!" 내, 내가 물건이냐! 넘기고 말고하게! 이 자식들, 진짜 웃기고 있네! 윽.... 등 뒤에서 "후우ㅡ."하는 카즈의 분노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그런데 슈야, 이 녀석, 어디로 증발해 버린거야?" "혹시 양호실에 간 게 아닐까?" "양호실?" "히데야키 선생님....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우리 슈야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카즈의 입모양. '....우.리.슈.야.' .......하하.. 하...하하;; (몸사리자;; 웃는 얼굴에 구타하랴;;) "그 자식이 우리 슈야를....?" "모르겠어... 그 선생님,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아.... 묘하게 차가운 눈빛도 그렇고, 타인에게 무감정한 태도도 그렇고." "그 자식, 새디 기질도 있어 보이지 않냐?" 카즈의 입모양. '.....새.디.' .......저 표정은....... 표현이 불가능 하다.;; "그럼, 나 먼저 갈께. 운동부 연습이 있거든." "아, 같이 가자." "넌 여기에서 슈야 더 기다려 봐." "싫어.... 나도 너랑 공평하게 경쟁하고 싶단 말이야." .......이봐들, 경쟁이고 자시고.... 살고 싶으면 더 이상 아무말 말고 집에들 가;; 응?;; "뒷 문 잠궜어?" "응, 나가자." 드르르륵ㅡ. 그리고 침묵. 뭔가 변명을 해야 한다. ".......슈야." "나, 나, 정말로 쟤네들 친구로 밖에 생각 안해. 맹세해! 그리고, 저 놈들이 저런 흑심 품고 있는지 몰랐어! 정말이야!" 카즈는 물미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한숨이 무겁게 느껴졌다. "놈들, 눈들만 높아서...." "카즈....?" "새장에 가둬둘 수도 없고, 미치겠군...." 나는 카즈의 양 뺨을 잡고, 그의 시선을 나에게 맞췄다. 그의 깊은 검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해....?" 카즈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옷을 챙겨들고 나갈 준비를 하는 카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를 등 뒤에서 꼭 껴안았다. "사랑해.... 이 세상에서 카즈만 사랑해.... 싸가지도 왕없고, 변태인데다, 이상하기도 하지만.... 카즈 말고 다른 사람 몇 억명 데려와도 싫어." 카즈는 그를 안고 있는 내 팔을 가볍게 뿌리치면서 말했다. "뒤에서 안지마라. 눕히고 싶어진다;;" .................. .................. .................. .................. .................. .................. .................. 카즈, 최고야. ㅡ_ㅡb;; (나, 할말을 잃었어;;) "집에 가자. " 카즈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그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4 "카즈." "말해." 카즈는 앞만 쳐다보며 말한다. 나는 카즈의 양 뺨을 잡고 나를 쳐다보게 한 후 말했다. "앞 차 뒤꽁무니가 나보다 좋냐? 사람이 부르면 힐끔이라도 쳐다봐야 할꺼 아냐." "......넌 네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걸 아냐?" "왜? 싸가지 없어서?" "후.... 그래봤자 나만 하겠냐." "그건 그래~" 카즈가 픽 웃는다. 그러다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말한다. "너, 왜 그렇게 사랑스럽냐. 짜증나게." "얼씨구, 개소리한다. 맞고 싶지?" "글쎄,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때리는 쪽이 좋아." ".................." 카즈는 내 표정이 굳는 걸 보고, 큭큭 거리면서 좋아한다. 저 썩을 놈;; "나 때리면 죽여버릴꺼야." "알았어." "진짜로 죽여버릴꺼야." "그래, 알았다니까." 나는 카즈를 놓아주며 "파란 불로 바뀌었어."라고 말했고, 카즈는 내 손을 끌어 운전대 위에 놓은 후, 내 팔목을 잡고 운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장난하다 사고나." "걱정마, 너 두고 안 죽어." "흐응... 그 말은, 난 죽어도 넌 살겠다 이거냐?" "헛소리 한다." 카즈는 운전하느라 앞을 쳐다보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 죽으면 나도 죽어." ".......나, 많이 사랑하는구나~" "응. 아주 많이." 카즈는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심장이 덜컹 내려 앉을 정도로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다 힐끔 날 쳐다보고는 씨익 웃는다. "으음, 손바닥이 약한건가?" "........맨날 그런 쪽만으로 생각하냐, 바보야!" "다른 곳은 아무리 집요하게 키스해도 무감하잖아. 그런데 갑자기 얼굴이 빨...."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왁왁 거렸다. 집 앞에 다 왔는지, 차가 서는 느낌이 들었다. "슈야...." 귓가에 놈의 숨결이 느껴졌다. "....사랑해....." "..................." .....행복해서..... 슬프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 같다..... 두 감정은 양면에 붙어 있어서, 한 쪽의 감정이 너무 깊어지면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빙글빙글 돈다고..... 그래서 행복함이 깊으면 슬퍼진다고...... 그리고 그 행복함이 깨질까봐 두려워 진다고...... 알것 같다.... 이 느낌은 두려움이구나.... "슈야? 우, 우는 거냐?" "시끄러워." 나는 무릎을 두 팔로 안고, 그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못난 얼굴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바보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후, 이 뽀송뽀송한 어린애가...." 카즈는 내 팔을 풀고 턱을 들어올려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나를 무끄러미 바라보는 카즈가, 슬프도록 아름다워 보여서.... 그의 목을 와락 끌어 안았다. "나 놓지마.... 놓으면 죽어버릴꺼야...." "알았어...." "진짜로 죽어버릴꺼야...." "그래, 알았다니까...." 카즈는 내 뺨과 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어린 짐승처럼 그의 품 속에 파고 들었다. "어린애는... 정말 다루기가 힘들다니까." 내가 뭐라고 한소리 하려는 순간, 몸이 둥실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려가는 것 같다. 나는 카즈의 목을 더욱 꽉 두르며 말했다. "쳇, 어린애 좋아하는 변태 주제에..." 카즈가 기분 좋은 낮은 목소리로 웃는다. 문이 열리면 화악 풍겨오는 카즈의 냄새ㅡ. 그리고 등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느낌. "잠깐만 누워 있어. 금방 저녁 할테니까." "오늘은 내가 당번인데....." "대신 내일 오므라이스 해줘. 알았지?" ".......응." 카즈의 입술이 뺨에 닿는다. 오늘은 평상시 때보다도 조심스럽다. 내가..... 울어 버려서 그런건가. "너..... 사실은 천사인거냐?" "그게 또, 무슨 개소리야." 나는 몸을 돌려 누우며 말했다. 이유 모를 눈물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 카즈가 내 등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날아가면 죽어.... 알았지?" "내가 새냐.... 날아가게...." "어쨌든...." "가서 밥이나 해, 바보야. 안 날아줄테니까...." 카즈는 길고 차가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주고는 방을 나갔다. 곁에 없어도 향기가 난다. 카즈의 향기ㅡ. 좋아. ...................... ...................... ...................... ...................... ...................... ...................... ...................... ...................... ...................... 그런데, 어디 휴지 없나? 콧물 나와 미치겠네;; "카즈으, 나 콧물 나와아~ 휴지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휴지를 들고 뛰어들어오는 카즈..... ..........무, 무지 웃겨!!;; "푸.. 푸하하하하핫.. 카즈 바보 같아.. 화장실 급한 사람 처럼 보였어.. 쿠큭.." 카즈는 살짝 눈을 찌푸린 뒤에, 휴지를 조금 뜯어 내 얼굴에 집어던지며 말했다. "이 뽀송뽀송한 어린애가, 늙은이를 가지고 장난치냐?" "카즈.... 늙었어?" "너보다야 늙었지, 이 녀석아;;" "싫어. 나보다 먼저 늙어버리면 싫어." 나는 침대에 걸터 앉아 있는 카즈의 등을 껴안으면서 뺨을 갖다댔다. 따뜻하다ㅡ. "나랑 같이 늙어. 알았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보다 먼저 늙어서 죽어버리면 안돼... 알았지?" "이 어린애가... 갑자기 왠 땡강이냐." "빨리 대답해. 나보다 먼저 늙어버릴꺼야, 같이 늙을꺼야?" 카즈가 팔을 풀어 내려고 해서, 그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카즈는 내 팔을 잡은 채,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내가 경고 했지. 뒤에서 안지 말라고." "흐응, 다른 사람이 뒤에서 안아도 눕혀버릴꺼야?" "......나를 미치게 하는 건, 너라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라고." 나를 돌아보는 카즈의 눈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눈에서 야수의 느낌이 난다. "그럼 눕혀봐." "뭐?" "지금 눕혀보라고."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씻고 저녁부터 먹고." 나는 내 눈을 피하는 그의 목을 와락 끌어 안았다. 집 밖에서 나를 옭아매던 [절제]라는 주박이 완전히 풀렸다. "안아줘." 내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카즈의 눈이 다시 흔들린다. "카즈, 날 봐.... 다른 데를 보지 말고, 나를 보라구...." "................" 나를 안아... 그렇지 않으면, 난 날아가 버릴꺼야. 어서... 그렇지 않으면, 난 바람이 되어서 사라져 버릴꺼야. "작작... 좀 해.... 사람 좀 그만 미치게 하란 말이다!" 카즈의 팔이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보드라운 침대가 등에 아프게 닿는다. "..................." 카즈의 야수의 눈이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야수는 안돼... 야수로 그치면 사냥 당해버린다고. "사랑해....." 나는 카즈의 남은 이성을 끊어버린다. "안아줘...." 그러면 야수는 악마가 된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5 딩동딩동ㅡ. "............." "............." 악마가.... 악마가 된다고, 이 망할 자식아!! 나는 카즈를 홱 밀쳐내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나갔다. 만약 "전기세 고지서 때문에요~"하는 놈이라던지, "피자시키셨죠?"하는 놈이라면 목을 비틀어 버릴꺼야!! "누구야!!" "히데, 나야. 문 열어." "히데? 그 딴 놈 안..." 카즈가 내 등 뒤로 다가와 살짝 입을 막으며 말했다. "유키에?" "히데....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문 좀 열어줘, 응?" "난 할 얘기 없다. 가라." "제발 문 좀 열어.... 얼굴 좀 보고 얘기하자, 응....?" 나는 카즈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새초롬하게 웃었다. "흐응, 옛날 애인이야?" "옛날에 한달 정도 사귀었던 애야. 지금은 별 감정 없어." "그런데 왜 찾아온건데?" ".....얘기 하자면 복잡해." 나는 카즈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긴 머리칼의, 말 그대로 평범한 인상의 여자애ㅡ물론 나보다는 연상이겠지만ㅡ가 서 있다. "안녕?" "......히데?" 여자애는 내 어깨 옆으로 시선을 빼내 카즈를 찾는다. 영문을 묻는 듯한 얼굴이다. 카즈는 내 어깨를 끌어안은 채 뒤로 빼내며,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문 열지 말랬잖아." "헤에? 그런 말은 없었는걸?" 카즈는 내 어깨를 쥔 채, 여자애를 돌아보며 말했다. "유키에. 돌아가라. 너하고 할 얘기 따윈 없다." "나랑 얘기할꺼야." 내 말에 카즈의 눈이 가늘어진다. 나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애인이, 과거의 애인을 추궁해 보겠다는데 말이야.... 혹시 임신이라도 시켰다가 떼내게 한 얘기라던지..... 그런 얘기는 들어둬야 하잖아?" 카즈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대체 날 뭘로 보고...." "카즈는 색마잖아~♡" ".................." "꺄아꺄아, 색마~♡"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즈를 뒤로 하고, 현관에 서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여자애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름이 유키에야?" "응? 아, 응..." "들어와. 난 하나마치 슈야." 이럴 땐 웃어줘야 하는거지?" "카즈의 현재 애인이야." ".......아, 응. 그렇구나." 이 여자애, 왜 사람을 멍청~하게 쳐다보는건데. 유키에는 자기가 카즈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잊었는지, 가만히 서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옛 애인으로써의 경계인가? "저어, 만져...봐도 되니?" "응?" "아... 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너무.... 예뻐서." 뭐, 더듬겠다는 것도 아닌데.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떡 거렸고, 여자애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젊은 사람이 수전증인가;;)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다가, 카즈에 의해 제지 당했다. "만지지마." 카즈는 유키에의 손을 탁 내친 후, 부엌에 가 손을 씻기 시작했다. 비누까지 묻혀서 꼼꼼하게도 닦는다. "....히데, 아직도 결벽증이 남아 있구나." "결벽증? 아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 처음 만났을 때, [난 심한 결벽증이 있어서....]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아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 .................... .................... .................... .................... 은근히 기분 나쁘네. 나도 기억하고 있어야지! "자자, 내 방으로 가자~ 색마 애인 끼리 흉 좀 보자구~" "응? 색..... 뭐?" 나는 유키에를 내 방으로 밀어넣고, 따라 들어오려는 카즈를 막으며 방문을 닫고 그 앞을 지켜섰다. "엿들으면 죽어." ".................." 불안해 보인다. 정말 암울한 과거라도 있는건가...? "......않게 해." "응?" "널 만지지 않게 하라고." 불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카즈. ................. ................. ................. ................. ................. 개그다!;;; "지금.... 옛날 애인하고 현재 애인이 눈 맞을까봐 걱정하는 거야, 이 바보가?;;" "아무튼 만지지 않게 해.... 둘만 방에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니까." "......훗, 어린애는 이래서 안된다니까." 나는 벙진 표정을 짓는 카즈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춰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두리번 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던 유키에는 얼른 정좌를 하며 두 손을 곱게 모은다. "저어, 하나마치 군." "그냥 슈야라고 불러." "아.... 그, 그래도 되?" 얼굴이 빨개진다. 헤에, 귀여워라. "저어, 슈야군. 나하고 할 얘기라는 게... 뭐야?" "뭐, 현재 애인이 과거 애인한테 캐묻는 잡다한 것들이지 뭐. 화내지 않을테니까 솔직하게 말해줘. 유키에 누나~♡" 유키에는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떡인다. 나는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아서, 그녀의 턱과 머리를 잡고 고정을 시켰다. "그러다 목이 빠지겠어, 누나." "아.... 그... 그... 그런가요?!" "헤에? 왜 갑자기 존댓말을?" "다, 당황해서 그래. 미, 미안해." "뭐, 미안할 것 까지야..." 나는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서, 본격적으로 추궁을 할 자세를 갖췄다. 히데야키 카즈야! 오늘 당신의 과거를 샅샅히 파헤쳐 주지. 후후후훗... "첫째! 카즈한테 여자는 몇 명 정도 있었는가!" "에?" "나한테는 과거에 관한 얘기는 절대 안 해주거든. 카즈한테, 여자 몇 명 정도 있었어?" 유키에는 동그란 눈을 굴리면서 손가락을 꼽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한.... 80명 정도?" ............오늘 죽었어. "아, 오해는 하지마, 슈야군. 히데, 고등학교 때 무척 인기가 있어서..." "그래서 조금 놀았다고?"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히데는 고백을 받은 대부분의 여자애들하고 사귀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여자애들은 일주일 이상은 버티지 못해서..." .............색마라서 말이지? "히데, 결벽증이 심해서.... 손만 스쳐도 비누로 닦을 정도 였으니까." ..........뜬금 없이 그게 무슨 소리? "한번은... 여자애가 고백을 하면서 와락 끌어안았는데... 떠밀어버려서 여자애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었어...." "허, 그거 심각하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차가웠으니까." 차갑다고? 싸가지가 없긴 해도 차가운 정도는 아닌데... "대부분 여자애들이, 인기나... 외모 보고 고백했었으니까... 히데, 웃을 때도 거의 없고... 말도 거의 없으니까..." 으으으음, 뭔가 혼란스럽네. 내 방문 밖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거리며 "슈야~"하고 매달리는 똥강아지 카즈는, 다른 카즈인건가?;; "히데가 다른 사람하고 산다는게 믿겨 지지 않아서... 아니, 결벽증이 다 나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럼 아까 손을 씻은 것도.... "아, 슈야군이 오해할까봐 말하는건데.... 나, 히데한테 지금은 별 감정 없어. 오히려...." "오히려?" "내가.... 그래선 안되는 건데..... 히데 아버지, 다카츠 씨를....." "헤에, 그러면 누나가 내 시어머니가 되는거야?" 빨개진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유키에는, "슈야군.... 너무 귀여워!! >_<"하면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거, 카즈가 보면 상당히 위험한데...;; 나는 유키에의 어깨를 도닥도닥 거리면서 말했다. "누나도 귀여워." "아냐, 그래도 슈야군은.... 정말 천사같아!! 하늘에서 방금 똑 떨어진 천사같아!!" "응, 응. 알았어. 그러니까 나 좀 놔 줘, 응?" "........응? 앗! 미... 미안해! 내, 내가 무슨 짓을...." 흐으으음, 시어머니란 말에 감동 받아서 오버한 거겠지. "나, 너무 어린애 같지. 나이만 많이 먹어가지고..." 유키에는 다시 정좌를 하고 앉아서 고개를 푸욱 떨군다. 헤에, 여자애라는 것도 꽤 괜찮잖아? 귀엽고. 말랑말랑하고. "아참, 누나. 저녁 먹었어?" "응? 아.. 아직." "그럼 우리랑 같이 먹자." "아, 아냐.... 난 그냥.... 히데한테 사과하고 돌아가려고...." "사과?" 유키에는 쓸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 때문에, 히데 부모님이.... 이혼하셨거든. 그래서...."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미안해..."라고 말하는 유키에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고 방문을 열었다. "아... 얘기 끝났어?" 한참이나 거실을 배회한 것처럼 보이는 카즈가, 내 손을 꼭 움켜잡으면서 한 말이었다. "유키에가 만지거나.... 그런 거 없었어?" "카즈." "응?" "왜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얘기 안했어?" "................." 나는 조금 과장해서 화난 척을 하며 말했다. "나, 상당히 기분 나쁘다! 그리고, 사귄 애만 해도 80명이 넘었다며! 그러면서, 과거를 싹 숨기려고 그랬냐?" "미안해..." "흐응, 됐어! 여자애 간다고 하니까 인사나 해줘!" "응..." .....너무 리얼했나. 시무룩해있는 걸 보니까 조금 안됐네. "유키에." "아, 히데..." "잘가라." ......진짜 인사만 하네;; 나는 울상 짓는 유키에가 안되보여서 그녀를 가볍게 거들어 주었다. "누나, 아까 카즈한테 무슨 할 얘기 있다고 그랬잖아." "아.... 히, 히데...군. 나.. 정말... 미, 미안해....." "됐으니까 가." 카즈는 잡상인 내쫓듯이 유키에를 내쫓고 나서, 다시 비누를 묻혀 손을 꼼꼼히 씻었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카즈는 걔 싫어?"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아." "부모님 때문에..... 불편해 하는거야?" "별로. 부모님 따위하고는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으니까." "후움....." "부엌 온 김에 저녁이나 먹자." 나는 식탁에 수저를 놓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쌀쌀 맞게 내쫓아.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그러지." "........는게 싫어서." "응?" "널 보게 하는 게 싫어서." ......이 정도 질투면, 지존급이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카즈가 내 앞에 앉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슈야. 거울 보고 자각 좀 해라." "뭘?" "네가 얼마나 사람 꼬시기에 좋은 얼굴인지." ".................." 나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카즈야~ 사랑해~" "이용 하지마!!;;" "....쳇쳇." 나는 국그릇을 들고 따뜻한 된장국으로 입안을 살짝 적신 후 말했다. "그래도 기분 좋다~ 카즈는 과거 얘기 같은 거 안해줬잖아. 뭔가, 큰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아서 기뻐. 나쁜 거든, 좋은 거든, 카즈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싶으니까... " 카즈는 날 빤히 쳐다보다가, 젓가락으로 내 턱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눕혀줄까." "밥이나 먹어, 이 바보가!" ".....아까는 자기가 꼬셨으면서." "어쨌든 학교랑 부엌에서는 안돼!" "....쳇쳇." "흉내내지마아!;;" 의자 다리를 툭툭 걷어차며 투덜거리던 시늉을 하던 카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씩 웃는다. 흐응, 그 정도로는 어림 없네. "꼬셔봐라. 내가 넘어가나." "....쳇쳇." "흉내내지 말라니까아!;;" 아아, 이래저래 피곤하고 복잡한 하루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6 후아아아아아암ㅡ. "안녕히 주무셨습니다!" 나는 이불을 걷고 힘차게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자명종 테디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 4시 40분?” 설마해서 벽시계를 봤는데, 역시나 4시 40분이다. 이렇게나 일찍 일어나다니.... 혹시..... 나, 내가 아닌거 아냐?! 너, 대체 누구야! 정체를 대라! ....................... ....................... ....................... ....................... ....................... ....................... ....................... ....................... 후... 바보물이 들었나;; "웅차차차차찻!" 길게 기지개를 펴고, 허리를 좌우로 돌렸다. 우두둑 하는 소리를 내며 허리에 통증이..... 와야하는....데?! “.........아, 아프지 않아?!” 아아, 그러고보니.... 어제 나는 설거지 하는 카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식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버렸다. 번쩍하고 카즈가 들어 안아주는 느낌이 났고.... 그리고 [잘자라...]하는 카즈의 말.... ....................... ....................... ....................... ....................... ....................... ....................... ....................... .....그래서 이렇게 몸이 개운한거야?;;; "음? 일찍 일어났네?" 나는 방문앞에 서 있는 카즈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카즈는 빙긋 웃었다. "잘됐다." 카즈는 내 침대에 걸터 앉으며, 내 잠옷 단추를 끌러내기 시작했다. 다른 한 손은 이미 가슴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하하, 간지러워........가 아니잖아!!" "응?" "뭐야, 아침부터!!" 카즈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학교 가려면 아직 멀었어." "누가 그걸 물었어!;;" 나는 카즈의 손을 밀어내며, 인상을 팍팍 써서 말했다. "어제 안하고 자서, 오늘 아침에 깔끔하고 퍼펙트하게 일어났단 말이야! 하지마!" "..........후........." 카즈는 흘러내리는 앞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살짝 짜증이 배여나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학교에서 할까?" ....................... ....................... ....................... ....................... ....................... ....................... ....................... ....................... ....................... ....................... ".............살살해..." 싱긋 웃는다. ......썩을 놈;; 카즈는 내 어깨를 눌러 도로 침대에 눕혔다. 침대가 등에 닿자, 왠지 식은땀이 난다;; "다치지 않게, 몸에 힘 빼..." 뜨거운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다. 살짝 들어와 혀 끝을 간지럽히다가, 살짝 빠져나오고, 다시 더 깊이 파고들어와 혀를 휘감는다. 매끄러운 목선이 움직이면서, 뒤섞인 타액이 그의 목을 넘어간다. 나는 그의 입술을 살며시 밀어내고, 그의 긴 목선에 입을 맞췄다. "키스 마크 만들지마. 아침에 교장 만나야 하니까." "흐응.... 그래?" 나는 그의 목을 핥아내려가다, 뼈가 느껴지는 부위를 세게 빨았다. 카즈가 정색을 하며 "하지 말라니까."라고 말하는 통에 중간에 그만둬 버려지만.... 조금 표시가 난다. (ㅡ_ㅡv) "후........." 카즈는 계속 흘러내리는 앞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풀어지지 않는 넥타이를 강제로 잡아빼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살짝 잡아빼고 엉킨 넥타이를 풀었다. 카즈의 차가운 손이 목에 닿았다. 내가 몸을 움찔하자, 카즈가 귓볼을 핥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방금 손을 씻어서.. 많이 차가워..?" "으응... 괜찮아." 나는 그의 와이셔츠 단추를 끌러내고, 그의 작은 돌기를 핥아냈다.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카즈의 손이 마지막 남은 옷가지마저 침대 밑으로 떨어뜨려버리자,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져서 몸이 움츠러 들었다. 카즈는 내 움츠러드는 몸을 다리로 고정시키며, 내 위로 올라 앉았다. 카즈의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내려가다 어느 한 곳에서 멈춘다. 머릿속이 뜨겁다. ".......괜찮아...." 내가 그의 팔을 끌어안자, 그가 내 팔을 풀어 자신의 허리를 안게 했다. 하지만 난 다시 그의 팔을 제지하고 말았다. ".....막지마..." 카즈의 커다란 손이 내 양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빼내기도 전에, 머리위로 끌어올려, 세게 억눌러 버린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어깨가 떨린다. 카즈는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다시 "괜찮아..."라고 나직하게 속삭인다. 그리고 갑자기 밀고 들어오는, 나와는 다른 무언가. 몸이 달아오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새어나왔다. "아.... 아아..... 아흑....." "우욱..... 힘을... 힘을 주지마....." 침대가 삐꺽삐꺽하는 소리를 내면서 흔들린다. 나도,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무언가도, 그것에 맞춰 흔들리는 것 같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카즈를 와락 끌어안았다. 천천히 움직이던 카즈의 몸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으응..... 아아..... 카즈으.... 흐윽... 카즈으....." "하아.... 하아...." 단내를 풍기는 카즈의 혀가 입술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도, 나도 호흡이 부족한터라 금방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뜨거운 열이 온 몸으로 퍼지는 느낌과 함께 나는 카즈를 세게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내 입술을 핥으며 빠르게 움직이던 카즈는 내 안으로 힘차게 밀고 들어오며 파르르 떨었고, 내 남은 의식은 거기에서 끊어져 버렸다. "...카즈......." 천천히 이불을 걷으며 일어나 앉았다.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학교......." 탁자에 메모가 붙어 있다. 카즈 글씨다. [ 학교에다가는 병과 처리하게 할테니까 푹 쉬고 있어. 일찍 들어올께. ] 병과 처리... 또 결석인건가... 아! 오늘 세이슌하고 축구 시합 있다고, 다카오카가 꼭 오라고 했는데! 마.... 망했다! 딩동ㅡ. "하우윽, 힘들어 죽겠는데, 또 누구야...!!" 나는 주섬주섬 잠옷을 꿰어입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것까진 좋았는데.... 허,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나는 벽을 꽉 움켜쥐고 기다시피 거실로 나왔다. "우으으으, 또 누구야...!! 전기세면 내일 걷으러 오고, 피자 배달이면 안 시켰으니까 꺼져!!" "슈야?" 아, 켄지 목소리다! "켄지?" "여어, 나도 왔어!" "다카오카...?" 나는 힘겹게 몸을 끌고가,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과일바구니 같이 보이는 것을 들고 있는 켄지와, 물로 씻은 듯 반들반들한 축구공을 들고 있는 다카오카가 서있었다. "어이, 괜찮은거야?" 다카오카는 공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내 어깨를 부축했다. 켄지는 내 대신 문단속을 하고 과일 바구니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담댕이가, 네가 아파서 못 온다고 하길래, 걱정이 되서 와봤어. 그런데.... 괜찮아? 무지 안 좋아보이는데." "무지 안 좋아." 다카오카는 나를 쇼파에 앉혀주며, 조심스레 옆에 앉았다. 켄지는 집을 둘러보다가, 내 앞에 정좌를 하고 앉으며 말했다. "집이 상당히 깨끗하네. 혼자서 사는 집 같지가 않아." "아....하하하, 그, 그래? 내가 워낙 깔끔해서..." .....불신의 얼굴들이다;; "그런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담댕이한테 물어봤지~ 친구가 아프다는데, 이 의리의 싸나이들이 안 찾아와 볼 수가 있나!" ........차라리 오지 말지, 화상아;; 카즈 올 시간, 다 됐는데;; "아, 다카오카! 축구 시합은 어떻게 됐어?" "당연히, 이 다카오카 님이 있는, 센츠우치의 승리지!" ".......후..... 또 며칠간, 저 바보 원숭이의 잘난 척을 들어줘야 하는건가." "누가 바보 원숭이야!" 드르르르ㅡ. 핸드폰 진동 소리다. "잠깐만." 나는 부축해 주려는 켄지의 손을 가볍게 사양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카즈 번호다. "카즈?" -어. 일어났어?- "응, 아까전에. 어디야?" -지금 집에 들어가는 길이야. 뭐 사갈까?- "아, 지금 오면 안돼!" -안된다고?- 나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다카오카하고 켄지가 와 있어." -.......그 녀석들이 왜?- "걱정되서, 담임한테 주소 물어서 왔데. 되도록 빨리 보낼테니까, 그 동안만 잠깐 다른 곳에 있어." - 후.... 이래저래 귀찮은 놈들이군.- "카즈ㅡ." -알았어. 30분 후에 다시 전화 할게.- "응, 미안." ".......누구야?" 헉, 까.. 깜짝 놀랬다. 켄지 이 녀석, 혹시 여우족아냐?;; 왜 발걸음 소리가 안 나는거야;; "아는 형. 그런데...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우리 이름이 불린 것 같길래." "아... 놀러온다고 해서, 친구들 와 있다고 안된다고 했어." "으응, 그래?"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켄지가 내 어깨를 부축했다. 방을 나서자, 두리번 거리고 있던 다카오카가 대뜸 말했다. "베란다에 걸린 정장, 네꺼야? 무지 크던데?" "어? 아.... 친척 형꺼야.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고 그러거든;;" 내가 쇼파에 기대앉자, 켄지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과일 깎아올까?" "아, 응! 안 그래도 점심도 못 먹어서 배고팠는데, 잘됐다~" 내가 헤죽 웃으면서 말하자, 켄지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큰일 났다. "왜, 왜 그래? 어디 아프냐? 아하하하;;" ........너, 너무 어색했나;; 다카오카가 안됐다는 얼굴로 켄지를 쳐다본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과일 가져올께." 켄지가 부엌으로 사라지자, 다카오카가 바닥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슈야. 2주뒤에.... 우리 카이센하고 부결승하거든? 그 때..... 와줄래?" "응?" "아, 뭐.... 내가, 데려올 여자친구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야, 우리가 원래 의리 3인방이잖냐. 그러니까..." "알았어, 갈께. 오늘 못 간 빚도 있으니까." 다카오카의 얼굴이 밝아진다.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슈야, 너 오늘..... 푸웁!" "왜, 왜 그래? 헉!" 이, 이 자식은 또 왜 코피를 흘리고 난리야! 내가 뭘 어쨌다고! "무슨 일.... 다, 다카오카?" 켄지는 과일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 재빨리 달려와 다카오카의 옆에 앉아 손수건으로 그의 코를 눌러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슈..... 푸웁!" 이 자식들이 단체로 약을 먹었나! 왜, 왜 이러는 거야! "괘, 괜찮아?! 휴지 갖다 줄께!" "아, 아냐. 괜찮아. 나, 휴지 있어." 켄지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누르며 말했다. 등을 돌린 채, 코피를 닦고 있는, 이 젊디젊은 녀석들을 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다 나온다. 대체 내가 뭘 어쨌길래.... .................. .................. .................. .................. .................. .................. "야, 단추가 풀려 있었으면 말을 해줬어야지! 하마터면 감기 걸릴 뻔 했잖아! 감기 걸리면... 응... 폐암 걸려 죽는단 말이다!" 난데 없이 왠 폐암;; 당황해서 그런지, 말이 꼬인다;; "아, 아하하하!! 미, 미안!! 모, 모르고 있었어!! 그, 그리고 사내 자식이, 그거 쫌 벌려져 있었다고, 엄살이냐, 엄살은!! 아하하하!! 사, 사나이라면 나처럼!! 더위와 추위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거야!!" 다카오카.... 너도 좀 오버다;; "그런데 너네 왜 갑자기 줄줄이 코피냐? 어제 밤새 므흐흐한 사이트 갔었냐?" 난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고, 둘은 서로를 쳐다보고 나를 쳐다보고, 멋쩍게 배시시 웃었다. 마치, 내가 모르는 자기들만의 비밀이 있다는 듯;; 후우, 정말이지... 뽀송뽀송한 어린애들은 피곤하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7 다카오카, 이 바보는 tv를 보다가 잠이 들어버렸고. 켄지, 이 녀석은 과일을 깎아준답 시고 사과 하나를 30분째 들고 있다. 사과가... 무지 짤 것 같다;; "켄지." "................." "켄지이." "아, 응?" 나는 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켄지는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내 손 위에 자의 손을 올려놓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이 바보;; "말고, 칼 줘봐. 내가 깎을께." "아... 아니야.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나는 부엌에 가서 사과를 물로 한번 씻고, 쇼파에 앉아서 껍질을 깎았다. 내 손을 바라보는 켄지의 눈이, 선망을 가득 담고 있어서 왠지 부담스럽다;; "헤에... 잘하네, 슈야. 이런 거, 못할 줄 알았는데." "이래뵈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라고." "으응, 하지만.... 왠지 곱게 자란 티가 나서."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참 혼란스럽다;;" "왜?" 나는 칼로 사과 조각을 내밀며 말했다. "너야 말로 도련님이잖아. 곱상곱상하고, 조용조용하고." "그렇게 보여, 내가...?" "응. 그에 비하면, 나야 날나리지." "아, 아니야. 슈야도.... 귀티나고.... 곱고 그래...." 어색한 침묵. 창 밖에서 후두두둑ㅡ. 하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나는 비틀비틀 창가로 걸어갔다. 비가.... 비가 내려서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싫어.... 비는...." 이가... 악물린다. "날 버리는 비 따위는.... 싫어." ".......슈야?" 나는 천천히 주저 앉았다. 켄지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아무일이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켄지.... 우산 있어? 빌려줄까?" "응? 아, 나야 고맙지, 그러면..." 다시 침묵. 이번엔 또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저어.... 슈야." "응?" "히데야키 선생님하고.... 친해?" "갑자기 왜 그 놈 얘기를?" "응? 아, 그러니까.... 자주 가는 것 같아서.... 양호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그건 내가 빈혈이 있어서 그래. 그다지 친한 편은 아니야." "아, 정말? 저어, 그럼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 뭐라고 하지. 그냥 있다고 해버릴까. "역시... 있는거야...?" "그게....." "후아아아아암! 잘잤다!" .........다카오카, 나이스 타이밍. "뭐여, 이 분위기는? 또 내 뒷다마라도 깐겨?" "다카오카, 또 사투리 쓴다~" "히익...." 아하하...하...하.... 젠장, 어지러워 미치겠네!! 저 놈의 비 때문에!! 저 놈의 비 때문에 미쳐버리겠어!! "슈야, 괜찮아?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땅이 가까워지는 듯 싶다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강한 충격이 왔다. 뇌가 흔들리는 것처럼, 엄청난 충격이 오면서, 눈이 빠질 듯이 아파왔다. "슈야?!" "...........지쳐서 그래." 나는 쇼파 위로 기어올라가면서 말했다. 등 뒤로 다카오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우리 그냥 갈까? 쉬는 데 방해되는 것 같은데...." "아냐, 괜찮아. 있으려면 더 있다가도 되." 다카오카는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안되겠다. 우리 갈테니까 방에 들어가서 자라." "그래, 어차피 우린 비 더 오기 전에 가봐야 하니까." 뿌연 눈 앞으로 무언가가 쑥 내밀어졌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더듬어보고 나서야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카오카의 어깨에 기대 방으로 옮겨진 나는, 마중도 나가지 못하고 그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텅 빈 집안에 침묵이 내려 앉았다. 드르르르ㅡ.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까이 댔다. "카즈....?" -응. 몸은 좀 괜찮아...?- 카즈 목소리ㅡ. 왠지 안도감이 들어서.... 눈물이 난다. -너, 비만 오면 몸살 앓잖아... 오늘은 괜찮은거야?- "아니, 안 괜찮아... 얼른 와..." -응,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가서 따뜻한 국에 밥해줄테니까, 저녁 먹고 푹 자.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때때로 묻어나는 말투가.... 상냥하다. 상냥하다... 상냥하다... 나를 버린 엄마처럼 상냥하다... 나를 외면한 아빠처럼 상냥하다... -.......ㅅ야?- 상냥하다... 상냥하다... 나를 버린 비처럼 상냥하다... 나를 찢어낸 비처럼 상냥하다... -...............- 카즈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8 후두두둑ㅡ. 빗소리가 난다. -.......는 너무 약해서..... - -...래도 .....왔잖소.... - -스무....을 넘기지 .....고.... - -....의 말은.....지 마시오... 우리 아이....할....것이오....- 나는 이불을 걷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흔들리는 머릿 속에서 무언가가 웅웅 울린다. -........가 불쌍해서.... - -여보.... ....도 포기....맙시다. - -차라리..... - 무언가 차가운 것이 손등 위로 떨어진다. 아니, 뜨겁다. -.........아........ 을꺼야...?- 들리지 않아... -...형아... 언제 죽을꺼야...?- 툭, 피가 터져나온다. -엄.....가..... 형은......넘기지 못한..... 그러면.......이 쓰던 방....써도 되...?- 죽지 않아..... -...가여운.....야...- 난 죽지 않을꺼야... -...차라리....- 그러니까.... -태...어나지 말고 죽어버리지...- 날 포기하지마... .... 제발 날 포기하지마... ".....ㅅ야."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눈 앞이 뿌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저녁 먹어야지..." 무언가 보드라운 것이 눈을 스치고 지나간 후, 눈 앞이 맑아졌다. 카즈가.....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이리와." 카즈가 내 침대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나는 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괜찮으니까 이리와."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카즈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강한 팔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 앞으로 내밀어 지는 건.... 하얀 죽이 담긴 그릇. "안 억으면 억지로 먹일꺼다." 카즈는 숟가락으로 죽을 조금 퍼서 후후 불어 내 입 앞에 가져다 놓는다. 난 기계적으로 입을 벌려 숟가락을 물었고, 카즈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숟가락을 빼냈다. "삼켜." ".........." "삼키라니까..." "....흑.....우흑...." 카즈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품에 내 얼굴을 파묻었다. 좋은 향기가 난다... "카즈....카즈으...." "응. 나, 여기 있어." 나는 어미를 찾는 어린 짐승처럼 그의 이름을 불러댔고, 그는 계속 내 말에 대답을 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벼운 심장소리에, 격렬하게 뛰던 내 심장도 점점 진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카즈..... 나.... 죽어....? 나 죽는거야....?" "네가 왜 죽어..." "스무살을 넘기지 못할꺼라고 했단 말이야.... 엄마도, 아빠도.... 그래서 날 버린 거란 말이야.... 내가 죽어버릴 게 무서우니까.... 그래서 나만 두고 가버린 거란 말이야...." 카즈는 서럽게 우는 나를 한층 더 세게 끌어안아주며 말했다. "너희 부모님은 사업 때문에 가신거야.... 네가 더 좋은 여건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돈을 벌기 위해 외국에 가신거라구." "그치만.... 슈스란은 데려갔는 걸.... 왜 나만.... 왜 나만 여기에 버려두고....." "바보야, 그 애는 어리잖아. 그리고.... 네 부모님이 널 버렸다고 해도, 난 네 부모님한테 감사하는데." 카즈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천사를 줍는 일이, 평생 아무때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흑.... 카즈는 악마잖아...." "후, 그러니까 천사를 더 좋아하지." 카즈는 내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만약에 천사가 너 데리러 오면, 슈야는 여기 없는데, 하고 쫓아내줄께. 아니, 말할 필요도 없이.... 난 무서운 악마니까, 날 보자마자 도망갈 껄?" "흑... 만약에 악마가 오면?" "내 친구니까 잘 꼬드겨서 보내면 되지." ".......신이...오면?" "널 데려가면, 악마교를 퍼트려서 사람들이 신을 안 믿게 할꺼라고 협박하면 되지.." ".....엉터리야.... 카즈 엉터리....." 후두두둑ㅡ. 빗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편안하다. "카즈, 일어나아!" 나는 카즈의 이불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카즈는 잠이 떨 깬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이불을 홱 잡아당기며 눈쌀을 찌푸렸다. "저리가. 잘꺼야." 나는 카즈의 목을 꼭 끌어안고 매달렸다. 카즈는 켁켁 거리다가 내 팔을 탁 밀쳐냈다. "잘꺼라니까!" 헤죽~. "놀러가자~" "시끄러."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써버리는 이 나쁜 녀석! 쳇쳇... "다카오카한테나 가자고 해야겠...." "제길, 시끄럽다니까!" 까... 깜짝 놀랬잖아, 이 썩을 놈아!!;; 카즈는 벌떡 일어나 앉은 채, 짜증이 배여나오는 얼굴로 앞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리고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런데 대체 어딜 가자고." ........................... ........................... ........................... ........................... ........................... ........................... ........................... .......풉! 우, 웃으면 안돼;; 그러면 분명 화낼꺼야;; "응, 벚꽂축제! 세이슌 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한데." "후....... 어린애." 카즈는 발끈하려는 내 머리를 꾹 누르고는 욕실로 향했다. 내가 쪼르르 쫓아가 욕실 문을 빼꼼 열고 얼굴을 내밀자, 그가 칫솔을 빙빙 흔들며 말했다. "아침이나 해. 오늘 식사당번 너잖아." "그으래~" 부엌으로 가는 내 등 뒤로, 카즈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후, 저 악마같은 놈..." ........................... ........................... ........................... ........................... ........................... ........................... ........................... ........................... 푸우우웁;; 더 이상 웃음을 참다가 볼이 터져버리겠다;; 비가 그친 하늘, 너무 예쁘다. 기분 좋아. "카즈, 하늘이 무지 예뻐~" "으으으응?" 그렇지만..... 왠지 화가 나네. 카즈도 이 하늘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겠지? 쳇쳇... "카즈!" "조용하게 불려도 들려." 카즈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오며,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물컵에 물을 따랐다. 나는 물이 넘어가는, 카즈의 긴 목선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카즈. 하늘이 예뻐, 내가 예뻐?" "푸하아압! 무,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는거냐, 이 어린애가!" 카즈는 인상을 쓰며, 행주로 바닥에 흘린 물을 닦으며 말했다. "흐응.... 하늘이 더 예쁘구나?" "왜 또 시비냐." 카즈의 쿨럭 거리는 기침 소리 후에,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더 예뻐. 됐냐?" "응~" "후, 이 뽀송뽀송한 어린애가..." 나는 카즈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좋지? 응? 슈야가 너무너무 좋지~?" "......말라고." "응?" "뒤에서 안지 말.라.고." "후훗, 카즈는 색마~" "......죽여버린다!" 아아... 정말 평화로운 일요일이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9 "난. 사람 많은 곳. 싫어." 카즈는 딱딱 끊어 말하며 담배를 빼물었다. 담배 피는 모습, 정말 오랜만에 본다. 카즈는 집에서 담배를 피지 않는다. 담배는 좋아하지만, 담배 냄새가 집안에 찌드는 건 싫어하니까.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나는 카즈의 팔을 잡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리켰다. 카즈는 픽 웃으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준다. "저 쪽 벤치에 앉아 있을테니까 사가지고 와." "카즈는?" "생각 없어." 나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뛰어가면서 카즈를 돌아보았다. 평범한 머리색깔,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주위 사람들과 이질적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번씩 그를 흘깃 쳐다보는 것으로, 나는 그것이 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는 마치ㅡ. 사막의 젊은 왕 같다. 타오르는 화염같으면서도 한없이 차갑고. 사나운 맹수 같으면서도 뭔지 모를 기품이 있다. .........사실은 왕싸가지에 변태일 뿐이지만. "100엔입니다." "응? 아.... 여기." 나는 아이스크림 점원에게 돈을 건네주고 아이스크림을 받아쥐었다. 돌아보는 카즈의 곁에 교복을 입은 두 여자애가 서 있었다. 여자애들의 교복 주머니에는 금색 소나무가 새겨져 있다. '세이슌 애들인가. 일요일까지 나와 공부한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나는 카즈에게 다가가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즈." "응." 카즈는 별 감흥 없이 대답하고 옆자리를 내어준다. 두 여자애들은 카즈와 아는 사이인지, 카즈에게서 조금 떨어져 서 있다ㅡ카즈는 그 누구라도, 그에게 가까이 서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ㅡ "누구에요, 선생님?" 카즈는 담뱃재를 허공에 털며 말했다. "사촌." 사촌 따위로 소개 받는 건, 싫다. 하지만 "애인이라고 소개해!"라고 떼를 쓸 만큼,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헤에.... 예쁘게 생겼네." "남자애야." "익, 정말요? 여자앤 줄 알았는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할짝 거리면서, 여자애들을 흘깃 쳐다보았다. 여자애들은 카즈의 결벽증 때문에 팔에 매달리거나 하지는 않지만, 꼴사나울 정도로 알랑거린다. .........기분 나쁘다. "선생님, 지금은 학교에서 근무하세요?" "센츠우치." "어머, 거기 남학교 아니에요?" "맞아." "헤에.... 선생님, 세이슌에서는 인기 많으셨는데." "여기에서도 인기 좋아." 내 말에 여자애들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그녀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아이스크림만 핥았다. "고등학생?" 내가 아무 대답도 않자, 카즈가 대신 "응"이라고 대답했다. 여자애들은 특유의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중학생인 줄 알았어." "응, 정말 조그맣다~" 조그맣다고...?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던 것을 그만두고, 그 애들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올려다 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그애들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흐응.... 댁들도 만만치 않게 쪼그만데 뭘." 여자애들의 얼굴이 붉그락해진다. 나는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떼내고, 다시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내 도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 중 한명이 약간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우린 여자애 치고 큰거야! 넌 남자애 치고 작은 거고!" .........열받네. "난 몸이 안 좋아서. 하지만 너네는, 그 살들이 키가 되려면, 한참 더 커야 겠는걸." "너어...!!" "슈야." 카즈의 부름에,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카즈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부적 파는데 있나 가볼까?" "응." "가자." 카즈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여자애들은 우리가.... 아니, 카즈가 일어서자 몸이 다는 듯 다급하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네 학교에 놀러가도 되요?" 카즈는 그애들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웃었다?! "오지마." ........그럼 그렇지. "흐음, 그런데 이런 날에도 부적을 팔까. 어제 비가 와서, 바닥이 온통 밟힌 벚꽃잎 투성인데." 카즈는 "선생니임!"하는 여자애들의 부름을 뒤로 한채, 내 어깨에 팔을 얹으며 말했다. 내가 뾰로퉁해 있던 걸 풀어주려고 이러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대답 대신 그의 팔을 꼭 끌어 안았다. "나, 저 애들 싫어." "아까 여자애들?" "응." "난 신경 안 쓰는데." 그렇게 말하는 카즈의 눈은, 정말 소름끼치도록 차갑다. 하지만 다시 이 쪽을 돌아보는 그는 더없이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키스할까?" 고개를 들어 카즈를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이 매혹적으로 움직이며 "하자"하고 가볍게 조른다. ..........하지만 난 정상인이다! "미쳤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그렇게 대꾸한 카즈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내 팔을 들어 아이스크림을 입 앞에 가져가 살짝 핥는다. 왠지.... 얼굴이 뜨거워진다. "후, 또 딸기맛이냐." 썩을 놈.... 다 핥아 놓고 뱀발이냐;; "저 쪽에 파는군." "응?" "부적 말이야." 에? 괜히 한 소리 아니었어? 나는 카즈에게 이끌려, 커다란 벚꽃 나무 아래에서 부적을 팔고 있는 할머니의 앞에 섰다. 할머니는 우리를 올려다보고 빙긋 웃었다. "젊은이들, 부적 사려고?" 쓰읍... 신사에서 파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왠지 짜가 냄새가 나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짜가 같아! 안 사!" 할수는 없지. "난 건강 부적 살래. 카즈는?" "생각 없어." "행운 부적이라도 사." "그런 거라면 여기 있잖아." ....하고 내 머리를 가볍게 누른다. 나는 할머니가 내미는 부적 주머니를 주머니 안에 넣고 다시 카즈의 팔을 안았다. 카즈는 거스름 돈을 받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빈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카즈는 손수건으로 벤치를 한번 닦은 후, 나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이런 행동은 결벽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어제의 비 때문이다. "바람에서 흙냄새가 나." 카즈는 담배를 꺼내물며 대답했다. "비가 와서 그래. 올 때는 구질구질하기는 하지만, 막상 내리고 나면 더러운 것들을 쓸고 가버리지." 담뱃불을 붙이는 옆모습이 묘하게 섹시하다. "카즈." "응." "그 결벽증. 화나지 않아?" 카즈는 더 말해 보라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 괜찮겠다, 말빨 되겠다, 직업 있겠다. 여자, 많이 꼬실 수 있었을꺼 아냐." 카즈는 픽 웃으며 담배재를 허공에 털었다.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만약 내가 없으면?" "그럼 나도 없지." 한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카즈는 늘 내가 천사같다고 말하지만.... 이럴 땐, 그가 영락 없는 천사다. .............천사답지 않게 묘하게 섹시한 천사;; "왜 그렇게 쳐다봐." "응?"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고 있었잖아." "그냥.... 요염하구나, 싶어서. 툭ㅡ. 카즈의 손가락에 걸려 있던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냐, 이 뽀송뽀송한 어린애가." ........정말인데. "저녁까지 있을까?" "응?" "불꽃놀이 좋아하잖아. 슬슬 폭죽 장사들이 몰려오는 걸 보면, 오늘 꽤나 요란할 것 같은데 말이야." 불꽃놀이ㅡ. 좋아한다. 카즈는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옛 애인도, 그의 부모님의 이혼 사실도 까맣게 모르는 나는? "카즈." "응." "응?"이라고 되묻지 않고 조용히 돌아본다. 내 부름에 대답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과거. 말해줘." "과거?" "응. 과거 얘기. 갖고 싶어." 카즈는 묘한 관심을 띄고 되묻는다. "듣고 싶은 게 아니라, 갖고 싶다고?" "응. 갖고 싶어." ....소유욕이 번져간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0 "그다지 재미있는 건 없어." 카즈는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나는 카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얘기해 줘." "내 성격 알잖아. 그다지 친한 놈도 없었고, 마음이 흔들릴 만큼 깊게 사귄 사람도 없었어." 문득,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가져가던 카즈의 손이 멈췄다. "이거, 세 개 째지?" "응." 카즈는 담배에 불을 붙이는 대신,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고 빈 담배를 손 끝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카즈는 두 개 이상의 줄담배를 피지 않는다. "카즈, 형 있지?" 순간, 카즈의 표정이 굳었다. "그 사람. 얘기 해줘." 빠닥ㅡ. 담배가 부러졌다.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데." 카즈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린 후, 구두로 가볍게 짓이겼다. 카즈는 형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한다. "미친 망나니야, 그 자식은." 나는 카즈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식은 어조처럼, 그의 눈엔 아무런 감정도 스며있지 않다. 종종 카즈에게 전화해, 카즈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드는 존재.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사람. "잘생겼어?" 카즈는 픽 웃었다. 분노를 얼린 것 같은 미소다. "추악해." "..................." 카즈는 내가 어깨를 움츠리자,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 주었다. 카즈의 향기가 났다. "그만 갈까?" "으응, 조금만 더 있다가." 퍼엉퍼엉ㅡ.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은 하늘에 이른 불꽃이 번졌다. "예쁘다." "응." "만져보고 싶어." 나는 손을 뻗어 손끝으로 하늘에 핀 불꽃을 더듬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즈가, 내 손끝을 가만히 잡았다. "폭죽, 사올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카즈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폭죽을 팔고 있는 노점상에게 향했다. 나는 카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푸른 빛과 붉은 빛이 뒤엉킨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물감에 붉은 물감을 몇 방울 떨어뜨린 것 같다. "예쁘다...." "그렇지?"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금방 내린 눈으로 만든 것 같은 사람이 눈 앞에 서 있었다. "하늘에 피가 번지는 거야. 죽은 사람들의 피가." 그 사람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문득, 그 미소가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니?" "슈야." "난 카오루." 카오루는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것 같은 손가락으로 옷깃을 여몄다. 난 나도 모르게 카즈의 겉옷을 벗어 카오루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고마워." 카오루는 카즈의 옷을 두 손으로 쥐며 빙긋 웃었다. "좋은 향기가 나네." "내 옷은 아니야." "응. 무엇보다도, 크기가 안 맞아보이니까." 카오루의 말에 난 헤실 웃었다. 카오루도 나를 따라 빙긋 웃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데.... 위태위태할 정도로 여리고 작아 보였다. "몇 살이야?" "17살. 너는?" "나는 좀 많아." 카오루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형?" 나는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카즈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야, 카즈야." 카오루는 벤치에서 일어나 카즈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가느다란 두 팔을 뻗어 카즈의 목을 끌어 안았다. 카즈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곳에...." "보고 싶었어." 카오루는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난. 여긴. 왜. 왔냐고. 물었어." 카즈는 카오루의 팔을 가볍게 뿌리치며 말을 딱딱 끊었다. 카오루는 싸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동안 많이 아팠어." "난 그걸 물은 게....." "네가 없어서 많이 아팠다고." 카오루는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카즈는 굳은 얼굴로 카오루를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보고 싶었어...." 카오루는 언제 싸늘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카즈의 팔을 잡았다. "전화도 하지 않고... 걸면 무심하게 끊어버리고... 숨이 막혀서 뒈지는 줄 알았어." "................." "알잖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카오루가 카즈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찰싹ㅡ. 카오루의 하얀 뺨에 카즈의 붉은 손자국이 그어졌다.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마." ".........후, 이 뽀송뽀송한 어린애가." 카즈의.... 말투다. "저 아이, 네가 키우는 아이니?" 카오루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카즈의 표정이 굳는다. "건드리지마." "슈야라고 했던가?" 카오루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손가락으로 내 뺨을 훑어내렸다. "카즈하고..... 잤니?" "무슨 개소리야!" "카즈는 결벽증이 심한데.... 그 애의 옷을 덮고 있었지?" 카즈는 내 몸을 끌어당겨, 두 팔로 세게 끌어 안으며 말했다. "건드리지마." 카오루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내 앞에서 편들지마. 죽여버릴꺼야." "누가 누굴 죽인다고?" 카즈의..... 이렇게 화난 표정은 처음 본다. "죽어버려. 형 따위." 카즈의 차가운 말에 카오루의 몸이 흠칫했다. 카즈는 카오루의 어깨에서 자신의 옷을 끌어내린 후, 내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하지만 저 사람..." "무시해." 등 뒤로 ".....카즈야...... 카즈야....."하는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카즈는 끝까지 그의 부름을 외면했다. 카즈의 형ㅡ. 눈처럼 아름다운 사람... 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1 "카즈, 아까 그 사람 말인데..." "말하지마." 카즈는 차창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찌푸린 얼굴도 예쁘다....라고 생각해 버리면 곤란하겠지? 심각한 상황이니까. "......말할 때마다 나타났어." "응?" "그 자식 말이야. 자기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하면 나타났다고." "흐, 무슨 귀신 같네." 내 말에 카즈가 쿡 하고 웃는다. 긴장이 풀린 웃음이다. "미안." "뭐가?" "폭죽. 사놓고 못 터트렸잖아." 나는 포장에 싸인 폭죽들을 만지작 거렸다. 카즈는 흘깃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뭣하면, 오피스텔 앞에서 할까?" "시끄러워서 안돼." "얼른 터뜨리고 도망가면 되지." "카즈가 도망가는 모습은.... 왠지 상상이 가지 않는데;;" "왜? 나도 도망 잘 쳐." 나는 카즈 쪽으로 돌아 앉으며 말했다. "카즈는 도망 가면 안돼. 사막의 왕의 체신이 있지." "사막의 왕? 그건 또 뭐냐." "그런 게 있어." 카즈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좋아서, 손을 거두려는 그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카즈." "응. "그 사람.... 걱정 안돼?" "내 알바 아니야." 순식간에 싸늘한 얼굴이 된 카즈는 내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 손을 빼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얼굴이 안 좋아 보였다고. 무슨 환자처럼." 카즈는 집 앞에 차를 세우며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자식에 대해서는 잊어. 다시 한번만 그 자식에 대해 이야기 하면, 정말 화낸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데? 카즈의 형이잖아..." .......그래보이지는 않지만. "말했잖아. 미친 망나니라고." "알아듣게 말해봐." 카즈는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개 풀렀다. 그의 목에는.... 작게 물어뜯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자국 위에는 선명한 피가 맺혀 있었다. "뭐야, 그거...." "예전 때 부터 그랬어. 자기는 내 몸에 굶주려 있다고." 카즈는 흘러내리는 앞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짜증이 배여나오는 말투로 말했다.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었는데... 고등학교 때 선배들한테 단체로 깔린 후로 부터 그 꼴이야." "가엽...지 않아?" "가여워?" 카즈는 인상을 쓰며 신경질 적으로 대꾸했다. "그럼 나보고 그 자식하고 자주기라도 하라는 거냐?" "그런 건 아니지만......" "상종하지 않는 편이 좋아. 말로는 안되니까." 하지만..... 난 알 것 같기도 한 걸. 카즈는 간간히 사람을 미치게 할 만큼 아름다운 표정을 지으니까.... 만약 내가 그 사람이었다면..... 나 역시 카즈를 망가뜨리려고 했을지 몰라. "내리자." "응? 아, 응." 카즈는 내가 내리는 것을 확인한 후 차문을 잠궜다. 그리고 어깨를 감싸는 커다란 손. 나는 카즈의 손을 감싸쥐며 말했다. "카즈." "응." "그 결벽증 나으면...." .....그러니까 그 결벽증의 예외 대상이 나뿐이였던 것에서 풀려버린다면...... 나를..... 나를 버릴꺼야....? "집이 덜 깨끗해 지겠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설마 [나를 버릴꺼야?] 따위를 물으려는 거냐?" 뜨끔. "그런 질문을 한다면.... 난 화가 나서 널....." "..............." "귀여워 해주지." "그게 뭐야;; 앞뒤 호응이 안 되잖아." 카즈는 볼을 긁으며 말했다. "난 화가 나서 널.... 껴안아주지?" ".......그게 아냐." "난 화가 나서 널.... 덮쳐주지....?" ".......카즈, 국어 몇 점 받았어?" 카즈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말했다. "무시하지마. 장난 한거니까." "그럼 제대로 해봐." "난 화가 나서 널...." 카즈의 두 팔이 나를 와락 끌어 안았다. 좋은 향기.... "널.... 사랑하겠지." "........그대로잖아." "가정형으로 바뀌었잖아. [~겠지]형으로." 나는 카즈의 품으로 파고 들며 고개를 저었다. "난 화가 나서 널 미워할꺼야, 아니면 난 화가 나서 널 싫어할꺼야, 하는 식으로 바뀌어야지." ".....사랑해......" "그게 아니라니까...."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카즈는 나를 끌어안은 채,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그 울림이 너무 좋아서.... 그의 팔을 잡은 채 한참토록 놓지 않았다. "카즈, 계란 있어?" "어. 두 개 있는데." "계란국 끓일 건데, 두 개로 충분 하겠지?" "두개면 되. 너무 많이 넣으면 비린내 나." 나는 냄비에 다시마를 반 스푼 넣고 휘휘 저었다. 헤에, 벌써부터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카즈, 거기 소금...." 카즈는 당근을 썰다말고, 이상하게 잘라진 몇 개를 아작아작 집어먹고 있었다. 목에는 노란 앞치마를 매고...... 손에는 분홍색 냄비 장갑을 끼고..... "......사......." "응?" "사랑스러워!!" "뭐, 뭐가?!" 내 외침에 덩달아 놀란 카즈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소리쳤다. ..............푼수같아. 아이카 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당신들이 생각하는 이지적이고 섹시한 양호 선생이, 바로 제 앞에서 사랑스러운 푼수짓을 하고 있답니다.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이대로 덮쳐야 할까요. "넘쳐!" "덮쳐?" "넘친다고!" "응? 히익!" .........내 망상 때문에, 우리는 탄 맛이 나는 계란 국을 먹어여만 했다;; "미, 미안해, 카즈." "괜찮아. 나름대로 맛있는데." .........라고 말하며 웃는 카즈를 보면서,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차라리 욕을 하지;; 딩동ㅡ. "내가 열께. 누구야~?"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현관 앞에 섰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없다. "누구야?" "....슈...야....?" "카오루....?" "네가 어째서 이 집에.... 문 열어, 카즈야! 문 열어!" 나는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쾅ㅡ 쾅ㅡ 하고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누구야?" "....오루..... 카오...루...." 카즈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즈는 날 뒤쪽으로 끌어내며, 현관 앞에 서서 차갑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 "카즈야....? 카즈야, 거기 있는거야....? 문 열어.... 문 열어, 카즈야..." "대체 여긴 또 어떻게 알아낸거야!" "흑.... 난.... 난 네가 보고 싶어서......" "시끄러워. 돌아가." 카즈는 내 손목을 움켜쥐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쾅ㅡ 쾅ㅡ 하는 소리가 계속 내 머릿속을 울렸다. "열어줘.... 카즈야.... 제발 열어줘.... 나, 나 아프단 말이야.... 아파...." 카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카오루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내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다. "카즈.... 카즈야.... 나.... 나 아프단.... 말이야.... 아파..... 아프다고...." "문 열자, 카즈." "하지마." "저러다 죽어..." "상관 없어." 난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하지만 현관으로 나가려는 나를 카즈가 잡았다. "하지마." "카즈는.... 저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아...?" "지금 문열면.... 난 저 자식에게 먹혀. 알겠어?" 카즈의 흔들림 없는 눈이 나를 직시했다. "저 자식은, 아버지까지 자기를 범하게 만든 놈이야. 너도 저 자식에게 넘어가고 있는 것 뿐이라고." "하지만......" "아까 못 봤어? 내 결벽증도, 저 자식에게는 벽이 되지 않아!" "카즈.... 카즈야.... 제발....." 나는 입술을 짓이겼다. 하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문 앞에서 가늘게 떨고 있을 카오루의 모습만이 아른거렸다. "미안해, 카즈."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카즈야....!!" 카오루가 나를 스쳐지나가 카즈의 목을 와락 끌어 안았다. "나... 나 아파.... 아프단 말이야...." 카즈는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며 카오루의 작은 어깨를 다독거렸다. "방으로 가자. 물수건 해줄께." "응... 나 두고 가지마, 카즈야..." 품으로 파고드는 카오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즈는, 한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나를 불렀다. "슈야." "으응?" "식탁 좀 치워줘." "아.... 으응....." 나는... 나를 돌아보고 씨익 웃는 카오루를 보고, 그제야 카즈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져 버렸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2 고요하고도 평화로운 밤. 나는 손도 안댄 깨끗한 밥을 밥통에 덜어놓고, 숟가락도 안된 국을 치우고 있다. 왜냐면.... 갑자기 나타난 하얀 미인이, 무지막지하게 달려와서 카즈를 끌어안고, 방 안으로 쌩ㅡ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하하하~ ...................... ...................... ...................... ...................... ...................... 혹시 미친 거 아냐!! "젠장.... 미쳤어.... 돌았어...." 라이벌이야... 카즈를 둔 라이벌이라고... 하얗고... 예쁘고... 연약해 보이기는 하지만... 카즈를 빼앗아 가려고 나타난 놈이라고... "바보 같아...." 나는 손등에 떨어지는 눈물을, 다른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카즈를 탓할 수 없다. 내 탓이니까... 째깍째깍ㅡ. 시계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몇 번이고 굳게 닫힌 카즈의 방문을 바라보지만.... 벌써 4시간 째.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도록 카즈는 나오지 않는다. 카즈를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금 문열면.... 난 저 자식에게 먹혀. 알겠어?- .....거슬린다. 끼이익ㅡ. "카즈?" "후, 카즈가 아니라 미안하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건, 카즈가 아니라 카오루.... 소름이 끼친다. "카즈는......?" "자고 있어." 카오루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기분 나쁜 미소. "불안하니?" "..............." "걱정마. 손 안댔어." 카오루는 쇼파에 작은 몸을 파묻었다. 큭큭 하고 웃는 소리가 오피스텔 안을 떠돈다. "궁금하니? 어떻게 재웠는지." ".........궁금하지 않아." "알량한 자존심 세우지마. 어린애 주제에." 카오루는 눈을 가늘게 찢으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렇지만 이내 무관심한 얼굴로 돌아온다. "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어서, 수면제 몇 알 얻어내는 건 일도 아니야. 즉, 카즈가 자는 새에 하려고 했다면 언제든지 할 기회가 있었단 말이지." 비릿한 미소ㅡ. "카즈가 날 덮치게 만들꺼야. 아빠 때처럼." ".........더러워." 카오루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핥으며 말했다. "그 망할 계집년이 나타나서 아빠를 채갔기는 하지만, 그전까지 아빠는 내꺼였어. 까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는 하지만, 깔린다고 해서 지는 건 아니지." "................" "아, 우리 아빠 본적 있니?" 카오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황당하게도.... 사랑스럽다. "못 봤구나?" 카오루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는, 금새 픽 웃었다. "카즈 닮았어." "................" "하지만 카즈 쪽이 좋아. 성격도. 몸도." 카오루는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카즈는 때때로 사람을 미치게 하거든. 온 몸을 물어뜯어 놓고 싶을 정도로." ".........더러워." "그 말 두번째야. 세번째는 참지 않아." 한참동안 서릿발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카오루는, 금새 방긋 웃으며 말했다. "카즈, 어때?" ".........뭐가?" "잘해주냐고." 내가 "응"이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카오루가 말을 덧붙였다. "하루에 몇 번까지 해봤어? 세 번? 네 번?" ".........더러워." "하지 말라고 했잖아!" 카오루의 손이 내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딴 손 하나 못 잡을 정도로 힘이 없는 건 아니다. "이거..... 이거 놔..... 안놔?!" "안 놔." "안 놓으면.... 혀 깨물어버릴꺼야!" 카오루의 눈이 분노인지, 증오인지 모를 감정으로 흔들린다. 왠지 기분이 더러워진 나는 그 손을 놓아버렸고, 카오루는 빨개진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날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면, 카즈야가 가만히 안 있을껄? 카즈야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 "................" "카즈야가 널 미워하게 만들꺼야... 널 증오하게 만들꺼야...!!" "시끄러워." 맞아, 시끄.... "카즈?" 카즈는 방문에 기대선 채,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머리를 흔들었다. 휘적거리는 손이 날 부르는 것 같아 다가갔더니, 날 끌어안고 주저 앉아 버렸다. "너, 대체 뭘 먹인거냐." 카즈는 카오루를 노려보며 으르릉 거리듯이 말했다. "수면제." 카오루는 잘못의 기색은 커녕, 되려 어린애처럼 천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카즈의 입에서 빠득하고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자식." 카즈는 내 어깨를 짚고 일어선 후,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서자, 와락 나를 끌어 안았다. "슈야...." "응." "왜 아직 안 잤어. 내일 학교 가야지." "응...." 카즈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잘 듣네. 예쁘다, 우리 마누라." ".........마누라가 뭐야, 바보." "그럼 내가 마누라 할까?" 카즈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픽 웃어주고는, 내 손을 이끌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나서. 철컥ㅡ. "뭐...야...? 문 열어.... 문열어, 카즈야...!!" "방 내줬잖아! 닥치고 가서 잠이나 퍼자!" 카즈는 내 침대에 걸터 앉으며 짜증이 배여나오는 얼굴로 소리쳤다. "문 열어... 문 열어...!!" "싫어. 슈야랑 엄한 짓 하다가 잘꺼다. " "아.... 안돼.... 싫어, 하지마!!" 카즈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뭘 하지마]냐? 너 오기 전엔 하루도 안 빼놓고 했는데." "더럽히지마... 더럽히지 말란 말이야!! 넌 내꺼야... 내꺼라고!!" 카즈는 인상을 팍 쓰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렸다. "내가 외과 전문의가 아니라, 주둥이를 꿰매주지 않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문 열어!! 문 열라고!! 카즈야아!!" 카즈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멀거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슈야, 이리와." ".......시끄러워서 잘 수 있겠어?" 카즈는 나를 품에 안으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내가 자장가 불러 줄께." "흐응, 언제는 음치라며?" "내가 유일하게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자장가야." 카즈는 낮게 웃고는, 차갑고 매끄러운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좋은 향기... 내가 품 속으로 파고들자, 카즈가 내 등을 도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를 시작했다. "잠들지 않으면, 아가야.... 설녀가 너를 검은 눈 속으로 데려가 버린단다. 차갑고 무서운 나라로, 너를 데려가 버린단다, 아가야. 내 품에 안기렴, 아가야.... 노래를 불러 설녀를 쫓아내 줄테니. 무서운 꿈도, 두려운 꿈도, 엄마 품에서 잊어버리렴, 아가야. 어스름한 그림자가 긴 산에 걸리면, 춤을 추듯이 다가와 안기거라, 아가야. 새까만 그림자가 네 어깨를 놓지 않으면, 노래를 불러 그림자를 떼어 놀테니...." 그날 밤 내 꿈에는, 새까만 머리칼과 하얀 얼굴을 가진 설녀가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섭게 굴거나 잔인하게 굴지 않고,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해줬는데. 꿈에서 깨어났을 땐, 생각이 나지 않았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3 "...사랑해.... 사랑한다고...." 우우웅.... 고백은 아름다운 석양이 지는 오후 5시경에 창가에 앉아 45도의 각도로 아름다운 곡선을 보여 주며 해주세요.... 지금은 졸려워서 들어줄수가.... "미치도록... 사랑한단 말이야...!!" 카오루의 목소리ㅡ.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 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데, 옆에 있어야할 카즈가 보이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사랑했어.... 네가 날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카오루라고 불러줬을때부터.... 널 사랑하고 있었단 말이야......" 나는 굳게 닫힌 문에 바짝 다가섰다. 문 저편으로.... 담배 냄새가 났다. "난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어째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거야.... 내 눈엔 아직도 상냥하던 네 모습이 남아있는데.... 어째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대하는거야..... 날 봐.... 날 봐, 카즈야...!! 날 보라구!!" 찰싹ㅡ. "더러워....? 내가 아빠하고 몸을 섞어서.... 그래서 더럽다고 생각한거야....?" "그만해." "알잖아!! 내가 왜.... 내가 왜 아빠하고 그랬는지 알잖아!!" "그만하라고." 울음소리가 들려... 그 눈물도.... 연기? 아니면.... 진심? "널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거야.... 만지면 부서져버릴 것처럼 아름다워서.... 널.... 널 내 더러운 손으로 만지고 싶지 않아서...." 머릿속이 웅웅 울린다. "다른 사람에게 안기게 하려고.... 그러려고.... 아껴둔 게 아니란 말이야...." "마음대로 이야기 만들지마." 카즈의 목소리 차갑다. "난 단 한번도 형을, 형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어."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그럼 어째서 날 지켜줬던 거야? 그럼 어째서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던거야?!" 카즈는 이를 악문소리로.... 아니,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었으니까." "....형이....었으니까......? 단지.... 단지 그 이유야....?" "그래." "날.... 사랑하지....않아...?" "사랑해. 하지만, 카오루는 형이야. 슈야하고 다르다고." 카오루의 목소리가 울음을 머금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애를.... 사랑해...?" "그래." "거...짓말.... 그 아인 나보다 아름답지 않아...." "난 형을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 없어. 형은 형일 뿐이니까." "거짓말.....!!" 귀가 울린다. "내 눈엔.... 내 눈엔 네가.... 미치도록 아름다운데.... 숨통을 조일만큼 아름다운데.... 왜... 왜...." 카즈는 이를 악문 소리로 낮게 말했다. "내가 왜 집을 나왔는지 모르는거냐?" "몰라.... 카즈야가 날 버렸어.... 내가 아빠하고...."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흐윽.... 화내지마.... 화...내지마...." 불편한 침묵이 한참 흐른 후, 카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 날 쳐다보는 걸.... 견딜 수가 없었어. 피가 섞인 가족이.... 그게 말이 되냐고." "왜....?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그게 말이 안돼....? 사랑해..... 사랑해, 카즈야...." "형이잖아. 내 형이잖아....!!" "형 따위 안해.... 안하면 되잖아!!" "억지 부리지마!! 형을, 하고 안하는 게 어디있어!!" 공기가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아.... 답답해. "집착하는 것 뿐이잖아! 형이 병 때문에, 가족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어린애 같이 굴지마! 형만.... 이 세상에서 형만 혈우병을 앓고 있는 줄 알아!!" 어지러워.... "슈야도.... 그 병으로 힘들어 하고 있어.... 하지만 그 녀석은 형처럼 어린애처럼 도피해버리거나, 다른 사람의 등 뒤에 숨어서, 그 사람에게 집착하지는 않아!!" "싫어.... 네 입에서 그 애 이름이 나오는 건, 싫어....!!" 숨가쁜 공기가 흐른다. "나.... 나 얼른 죽을께.... 그러니까, 나 죽을때까지만이라도.... 내 옆에 있어줘.... 나, 혼자란 말이야.... 너 없으면.... 안된단 말이야...." "................." "그 애한테 몇 년만 기다리라고 하면 안돼....? 나 죽을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면 안돼....?" "..........안돼." "그 애가... 그 애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 몇년이... 그 애의 몇년이, 뭐가 그리도 중요하다고!!" 지금 방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건.... 눈물이 아니지? 그렇지, 슈야....? 눈물.... 아닌거지....? 강해져야지.... 카즈 말대로 오래 살아야지.... 그러려면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마음만 가져야 한단 말이야.... "나를 잡고 있는 건, 슈야가 아니야. 내가 슈야를 잡고 있는거야. 그 녀석을 달래는게 아니라, 나를 달래는 거야. 조금이라도 곁에 두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녀석을 달래는 거라고. 내가 일방적으로.... 녀석의 힘들어 하는 팔을 붙잡고 있는거라고." 그렇...지 않아.... 카즈가 "함께 오래도록 살자.."라고 말해줬을때.... 난.... 무지 행복했단 말이야.... 불쌍하다고 하는 대신.... 괜찮다고... 그런 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줬을때도.... 난.... 너무 행복해서..... "미안해.... 내가 미안해, 카즈야..... 그러니까.... 울지마.... 응.....? 제발 울지마..." "......미안해..... 미안해, 형......." 침대에 잠깐 누워있는다는 게, 깜빡 깊은 잠에 빠져들어버려서.... 나중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내 팔 안에는, 모든 슬픔을 끌어안은, 그렇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강한, 나의 왕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카즈의 머리칼을 쓸었다. 날 안고 위로하면서.... 카즈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나에게는 늘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지만.... 어쩌면 카즈는 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떠나가는 사람보다.... 떠나보내는 사람의 두려움이 더 큰 법이니까. "나 오래 살꺼야. 아무리 힘들어도.... 오래오래 살꺼야." 나는 카즈의 목을 끌어안고 나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카즈의 팔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깜짝 놀라, 카즈를 가볍게 밀어내면서 말했다. "언제 일어났어?" "한참 됐어." "그런데 왜 안 깨웠어...." "어차피 학교도 땡쳤고.... 그냥 자게 내버려 두고 싶어서." 카즈는 내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카오루는?" "돌아갔어. 한동안 오지 않을 생각인가봐." "....너무 구박 해서 그런가?" "아무리 형이라도, 2:1은 무리니까." 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는지, 카즈가 나를 감싸안으며 달래듯 말했다. "형이 나빴던 거야. 신혼 집에 눌러 있으려고 했으니까." "....여기가 뭐가 신혼집이냐. 카즈는 오래된 신랑이고, 난 오래된 신분데." 카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매일 밤은 신혼이잖아." "윽... 뭐, 뭐야. 그런 거...." "흐음, 아직도 부끄러워하네? 슈야는 언제나 새신부, 라는 걸까?" "이상한 말 좀 하지마, 바보야!;;"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카즈는, 갑자기 입술을 끌어올리며 위험한 얼굴로 말했다. "방해꾼도 갔겠다.... 슬슬 신혼을 불태워 볼까?" "안돼! 저녁이 먼저야!" ".....내 유혹보다, 밥의 유혹이 더 강하다 이거지?" "아니, 꼭 그런 식으로 말하려는게...." 카즈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가위, 바위, 보로 하자." "에?" "가위, 바위, 보로 하자고." "그, 그딴 걸 왜 그런 걸로 정해!!" "내가 잘하니까." ".......카즈, 정말 성격 이상해. 알아.......?" 카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 원래 성격 파탄자잖아. 새삼스럽게." "...................." "자자, 안내면 지는놈! 가위, 바위, 보!" "자.. 잠깐만... 난 아직..." "안 냈으니까, 슈야가 진거지?" "아... 아니, 난 아직 준비도....이, 이상한 데 핥.... 하지마아!!!" 오늘 저녁..... 내 손으로 떠먹을 수.... 있는거지....?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4 ".....ㅅ야. 그만 일어나." 좋은 향기ㅡ. 나는 비실비실 일어나 앉은 후, 카즈의 목을 끌어안고 도로 누워버렸다. 카즈의 차가운 손가락이 기분 좋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제, 너무 무리한 거 아냐....?" "으응으응...."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 카즈의 품에 파고 들었다. 어제의 카즈는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서....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게 온 몸으로 느껴져서.... 나는 그만, 처음도 아닌 일에 눈물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카즈는 내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나를 꼭 끌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주었고, 힘들어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나를 손수 씻겨주고, 저녁까지 떠먹여 주었다. 이런 것 하나 버티지 못하는 내가 너무 어린애같이 느껴져서, 카즈의 얼굴을 바로보지 못할 정도로 미안했는데, 카즈는 자신을 그렇게 번거롭게 만드는 나를, 여전히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움직이기 힘들면, 내가 씻겨줄까....?" "아냐. 괜찮아." 나는 카즈의 목을 살짝 놓고 일어나 앉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하고 행복한 아침이다. "여어, 하나마치. 오늘은 왔네?" 나는 반 녀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내 자리에 와 앉았다. 가방을 풀고 책을 챙길 무렵, 고로케 빵을 입에 문 다카오카가 교실 뒷문으로 들어왔다. "어, 우아! 오으으 와에?" "........드러운 놈." 나는 다카오카의 입에 고로케를 푹 쑤셔넣었고, 다카오카는 시뻘개진 얼굴로 컥컥 거렸다. 뒷자리에 앉은 몇몇 녀석들이 큭큭 거리고 웃으며, 괴로워 하는 다카오카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야아, 슈야군~ 오늘은 왔네?" 켄지는 출석부를 교탁 위에 올려 놓으며, 내 앞으로 와 머리를 부시시하게 쓰다듬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만 끄떡거렸다. "사노, 슈야 왔으니까 어제 못 정한 거 정하자." 빙글빙글 웃으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던 사노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며 교탁 앞에 섰다. 전형적인 모범생 얼굴을 하고 있는 사노는, 보기보다 시원스럽고 털털해서, 반에 적이 없는 녀석이다. 때문에 녀석이 이끄는 학생부는 꽤 평판이 좋다. "자자, 다들 주목. 5월제 축제 있는 거 알지? 이번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첫째날에 운동회를 하고, 둘째날에 부활동 및 학급별 활동이 있을 것 같아." 사노는 칠판에 또박또박한 글씨로 운동회 종목을 써내려간 후 말했다. "먼저 계주부터 정하자. 계주 누가 나갈래?" "소마 추천!" "켄지? 아, 켄지는 작년에도 계주 했었지?" 켄지는 볼을 긁적거리며 빙긋 웃었다. 사노는 계주 옆에 켄지의 이름을 쓰고, 다시 반 녀석들을 쭉 둘러보았다. "또 없어? 세 명은 나가야 하는데." "야, 왜 이 다카오카 님의 이름은 빼냐? 센츠우치의 주장이신, 필드 위의 검은 질풍님을?" 다카오카가 책상에 다리를 얹으며 말하자, 세츠가 다카오카의 다리를 잡아서 뒤로 넘겼다. 다카오카는 "어어ㅡ"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거리다가, 세츠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쾅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져 버렸다. "크하하하, 저게 어딜 봐서 센츠우치의 주장이냐?" "킥킥, 망나니 놈이야, 망나니 놈!" 다카오카는 뒷머리를 만지작 거리며 "축구공으로 까버릴 놈들...!!"이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고, 사노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면서 칠판에 다카오카의 이름을 적었다. "남은 한명은 누구하지?" "히로우 추천!" "나? 나는 잘 못하는데." 사노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여기저기에서 야유가 터져나왔고, 사노는 두 손을 가볍게 들어보이고는,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그럼 다음으로 스모." "야야, 다케시! 다케시!" "츠카도 시켜, 츠카!" 사노는 교탁을 가볍게 두드려, 녀석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스모는 두 사람이니까, 다케시하고 츠카 적을께. 괜찮지?" "야, 축구도 한다며?" 누군가의 말에, 다카오카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짜식들, 내 덕분에 축구는 다 이긴 줄 알아라!" "이그, 다카오카 자식 때문에 우리가 다 지겠네." "뭐야? 이 자식들이!" 켄지는 쿡쿡 거리며 웃다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슈야는 뭐 안 나가?" "난 무릎 수술한지 얼마 안되서 못 뛰어. 몇 달 전에 피 뽑았거든." 내 말에, 켄지는 "아...." 하고 길게 말을 끈 후, 어색하게 웃었다. 혈우병이라는 게, 단순히 피가 나면 멈추지 않는 것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서, 이래저래 번거로울 때가 많다. 특히 무릎같은 곳에 피가 고이면 수술을 해서 빼야 하는데, 그 후유증이 여간 아니다. "아참, 하나마치. 작년에 200미터 하지 않았어?" 펜을 돌리면서 사노가 한 말이었다. "응. 그런데 수술 받은지 얼마 안되서 뛰면 안돼." "아..... 그래도 줄다리기는 할 수 있지?" "응." 내가 대답하기 무섭게, 다카오카가 덧붙였다. "슈야, 저 녀석. 통뼈라 팔힘 장난 아니야." "저 자식이 목 조르면, 우두둑 소리가 난다니까. 생긴 건 비리비리....." "......죽고 싶지?" "아하하핫, 형님! 제 경망한 주둥이를 용서해주십쇼~" "좋다. 바느질 10땀을 하는 걸로 용서해 주마." "...............;;" 내 말을 곰곰히 듣고 있던 켄지는, 센도를 향해 생긋 웃어주며 말했다. "이카리. 바느질은 슈야보다 내가 더 잘하는데, 내가 해줄까?" "소마.... 부탁이니까 진지한 얼굴로 농담하지 마라. 무섭다;;" 쿡쿡 거리고 웃으며 녀석들을 지켜보던 사노는, 다시 교탁을 가볍게 두들겨 주위를 환기시킨 후 말했다. "그럼, 두번째 날 학급 활동 말인데. 무슨 의견 있는 사람?" "야, 여장 까페 하자." "여장까페? 그거 너무 식상하지 않냐?" "그래도 남고에서 그거 말고 뭐 할께 있냐?" "여장 까페, 4반도 한다던 것 같은데?" "아냐. 걔네는 락 까페랬어." 사노는 칠판을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다들 조용히 하고. 여장 까페하자는 의견 나왔는데, 또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야, 그럼 상영회 하자." "그건 영화부에서 한다는 것 같던데?" "야, 그런데 여장까페 하면 누가 여장하냐. 솔직히, 우리 반에서 여장해서, 손님 끌만한 애는 없지 않냐?" "왜, 하나마치가 있잖아." ..........피 끓게 하네, 이놈들. "크으, 슈야 성격 몰라서 그딴 소리 하냐? 슈야는 치마를 입으라고 하면, 차라리 쫄바지를 입을 놈이다;;" "야, 그래도.... 솔직히 하나마치 아니면 누구를 시켜." "다카오카 시켜, 다카오카!" "크크... 그럼 아마 저 놈 추한 꼴 구경하려고, 손님들이 많이 올꺼야~?" "죽여버린다, 너네!!" 사노는 킥킥 거리고 웃다가, 웃음을 그치며 나를 향해 말했다. "슈야, 여장 까페 괜찮아?"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이 썩을 놈아!!" "아아, 형님~ 솔직히 형님 말고는 할 사람이 없잖습니까~" ".......다카오카, 눈 빛내지마. 뽑아버린다!!" "헉!!;;" 반의 모든 녀석들의 시선이 나한텐 쏠려있다. 차마 "안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나 혼자 죽을 순 없다!! "켄지 하면 나도 한다!" "........거, 거기서 왜 갑자기 내가 나오는데!!;;;" "켄지, 너.... 의리를 버릴 참이냐?" "의리는 의리고, 이건 이거고....." 사노는 말끝을 흐리는 켄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켄지, 한번만 희생해라." "야;;" "너 안하면 하나마치도 안한다잖아." ".......좋아. 너하면 할께." .........켄지까지 물귀신 작전을;; "나? 나는 볼 꺼 없는데." "그럼 난 볼 꺼 있는줄 아냐;;" 사노는 빙긋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할게. 대신에 너도 하는거다?" "후우우;;" 사노는 칠판에 자신의 이름과 내 이름과 켄지의 이름을 적은 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말했다. "얘들아. 우리 특이하게..... 다카오카도 시켜볼까?" "푸하하하하핫!!" "야, 해! 해! 제발 해줘!" "사노, 너 죽여버린다!!" 사노는 빙긋 웃었다. "그럼,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사노가 칠판에 다카오카의 이름을 적자, 반 녀석들은 거의 뒤집어질 것 같은 얼굴로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고 웃느라 난리를 피웠다. 그리고 그 소란은, 다카오카의 시뻘개진 얼굴이 본래로 돌아올 쯤에서야 가라 앉았다. "그런데 사노. 여장 까페, 7반도 할껄?" "7반?" 사키의 말에, 순식간에 반이 술렁거렸다. 7반이라면.... 그 히로 녀석이 있는 반인데. "음.... 그럼 우리 쪽이 힘들겠네. 같은 여장 까페라 비교도 많이 당할 뿐더러...." 그 뒷말은 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히로라는 녀석, 조그맣고 예쁘장해서, 꽤 인기가 많으니까. "그럼 다카오카 여장보다, 더 사람을 끌만한 게 필요하겠네." 그 때 갑자기, 내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가들아, 우리 학교에서.... 제일 드날리는 사람이 누구겠니?" 반 녀석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5 "하나마치, 너 설마....." 사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히데야키 선생님을 끌어들이자는 건 아니겠지?" "맞는데." 내 말에, 미무라가 콰당ㅡ 하는 소리를 내며 의자 채로 뒤로 넘어졌다. 아참, 미무라.... 전에 카즈한테 고백했다가 채였었지? "하나마치, 시도는 좋은데 말이야...." 사노는 미무라를 일으켜 세워주며 볼을 긁적거렸다. 나는 사노의 말을 가로챘다. "학과 선생님 아니라도, 외부인만 아니면 참여 가능하잖아. 1반 애들은 물풍선 터뜨리기에 학교 아저씨도 참가시킨다던데." "아니,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사노는 짧은 헛기침을 한 후에 말했다. "히데야키 선생님하고 센츠우치 축구부가, 우리 아이카 고교의 이름보다 유명하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만 말이야.... 문제는, 그 히데야키 선생님이, 우리를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지." 센도는 턱을 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굴렀다. "하지만 하나마치 말대로, 히데야키 선생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입장료만으로도 크게 한탕 할껄." "그건 그래. 게다가 그 날은 외부인들한테도 공개되잖아. 히데야키 선생, 전에 세이슌에 있었다니까, 그 곳 여자애들도 만만치 않게 올껄." "얘들아,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사노는 교탁에 올라가 앉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조커를 우리가 쥐고 있는게 아니라는 거지." "흐음... 사노 말도 맞아. 히데야키 선생님 성격이라면, 우리가 단체로 머리를 밀고 가서 부탁한다고 해도 절대 [노]일껄." 나는 옆에서 추근덕 거리는 센도를 걷어차며 말했다. "하지만, 꼭 여장일 필요는 없잖아. 카.... 아니, 히데야키 선생이라면, 양호실에 있는 그대로 의사 가운을 입고 있어도...." "섹시하지~" "..............." 나는 물끄러미 센도를 바라보았다. 센도 이 자식, 눈이 맛이 갔다. 미친 놈한텐.... 매가 약인 법이지. 퍼어어억ㅡ. "커어어억, 왜, 왜 때리고 그래!" "내 마음이다, 이 썩을 놈아." "우씨, 슈야는 맨날 나만 괴롭혀!!" "시끄러."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켄지가 옆에서 쿡쿡 대고 웃는다. 여장 싫다고 울상 짓던 놈이.... 참 금방도 잊는다;; "자자, 다들 지방 방송 끄고. 히데야키 선생님을 끌어들이자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지?" 나는 다카오카와 켄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켄지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빙긋 웃고 있었지만, 다카오카는 "싫다!!"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얼굴이다. "그런데 하나마치, 히데야키 선생님을 포섭할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거야?" 사노는 교탁에서 가볍게 뛰어 내려오며 말했다. 반 녀석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나한테 쏠렸다. "응. 있어." 나는 나를 쳐다보는 녀석들을 향해 씩 웃어주며 말했다. "이런 이유로, 좀 도와줬으면 해." 카즈는 커피잔에 입술을 갖다댄 채, 말없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를 올려다 보는 두 눈이, "죽어도 싫다."라고 말하는 듯 하다. "여장하는 거 아니라니까. 그냥 우리 반 입구에 앉아만 있으면 돼." 카즈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살짝 눈을 내리 감았다. 평범한 행동, 평범한 포즈, 평범한 표정인데..... 묘하게 피를 끓게 한다;;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에 동참해야 하는데?" "내가 하니까." 카즈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다른 거 하면 안되는 거냐?" "응." 카즈는 짧은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부스스하게 쓸어넘겼다. 나는 카즈의 팔을 잡고 흔들며 계속 칭얼댔다. "해주라~ 응? 활동 수익금으로 반별 수학여행 장소 정해진다고 했단 말이야~" "그걸 내가 알바냐." "그 날은 외부인들도 온단 말이야. 만약에 이상한 아저씨들이 날 괴롭히면 어떡해. 치마까지 입는데...." 순간, 카즈의 얼굴이 굳었다. "너, 치마...입냐?" "응? ......에헤헤헤;;" 카즈는 나를 직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딴 거, 당장 때려치워." "어떻게 그러냐. 이미 정해졌는데...." ".......너......." "그, 그러니까 카즈가 와주면 되잖아. 내 옆에 꼭 붙어서 지켜주면 되잖아. 응?" 카즈는 짜증이 배여나오는 얼굴로 머리칼을 쓸며 고개를 홱 돌렸다. 화... 화났나? "......몇시부터 몇시까지 하는데." "에? 앗! 해주는거야?' "대답이나 해." "아침 11시부터 저녁 6시까지! 카즈는 그냥 입구에 앉아서 놀고 있음 돼!" 카즈는 한숨을 섞어 말했다. "......정말 앉아만 있을꺼다." "응, 응~ 카즈, 멋쟁이~" "시끄러." 나는 홱 돌아 앉은 카즈를 꼭 끌어 안아주었고, 카즈는 투덜거리면서도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주었다. ........훗, 이걸로 까페 대박은 확정이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6 "저, 정말이야....?" "응."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던 사노는, 두 팔을 크게 벌리더니 나를 꾸아아악 소리 나게 끌어안았다. "형님, 존경합니다!!" "켁.... 숨막혀, 저리가." "아, 미안미안." 사노는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며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대체 어떻게 포섭한거야? 혹시 돈이라도 뿌린거야?" "그, 글쎄...." ........사랑의 힘이라고나 할까;; "너, 너 이 자식들!! 뭐 하는 거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다카오카가 한 손에 크림빵(.....작작 좀 먹어!!;;)을 쥐고, 불타는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우리? 아, 그러고 보니 상당히 밀착된 상태네. "좀 놀려볼까...." 사노는 조그맣게 중얼거리고는, 씩 웃으며 한 손으로 내 목을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고 있지~"라고 다카오카를 도발했다. 다카오카는 콧김을 푹푹 뿜으며 우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켄지의 제지를 받고 걸음을 멈췄다. ".....다카오카한테 맞아 죽을지 모르니, 난 몸이나 사려야 겠다~" 사노는 빙긋 웃으며 팔을 풀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켄지와 대화를 나누던 다카오카는, 그와 대화를 마쳤는지, 다시 나를 향해 걸어왔다. "저, 저 놈이랑 찰싹 붙어서 무슨 얘기 했냐?" "별 얘기 안 했어." "그, 그래?" 딩ㅡ동ㅡ댕ㅡ동. "얘들아, 종 쳤으니까 자리에 앉자!" 사노는 아직도 복도를 뛰어다니는 녀석들을 향해 말하고는, 살짝 복도를 내다보고 교탁 앞에 섰다. "제군들." 사노가 힘이 꽉 들어간 목소리로 말하자, 갑자기 좌중이 조용해졌다. 사노는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진짜 군인이라도 된 듯이 힘있게 말했다. "양호실의 요염 악마를 끌어낸 하나마치 군에게 박수를 보냅시다!" .......요, 요염 악마;; 녀석들은 사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야, 하나마치! 히데야키 선생님, 진짜로 우리랑 같이 하는거야?" "응, 여장까지는 아니지만." "우오오오오, 하나마치! 최고야!" "당신, 사랑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저었다. "제군들. 그대들이 날 사랑할 지라도, 난 그대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네." "오오, 잘난 척 좀 하는데?" "냅둬, 냅둬~ 오늘은 하나마치의 날이다!" "히로우! 우리 돈 걷어서 하나마치한테 빵이라도 물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쿠쿠, 그럴까?" 그 때, 뒷자리에 앉은 츠카가 "야! 선생님 오신다!"라고 소리쳤고, 우리는 수업 준비를 하고 책을 꺼냈다. 축제까지는 앞으로 1주일ㅡ.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이상. 다음 시간까지 프린터물 풀어오는 거 잊지 마라." "얘들아, 자는 애들 좀 깨우자." 사노는 애들이 부시시 일어나는 것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렷. 선생님께.... 다카오카, 침 닦아." 사노가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선생님은 혼자 허리를 숙여 인사해 버렸고, 애들은 킥킥 대고 웃었다. 사노는 빙긋 웃으며 "죄송합니다, 선생님."이라고 말한 뒤, 원래의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차렷. 열중 쉬어. 차렷." 사노는 반 녀석들을 돌아본 후, 힘있게 말했다. "선생님을 경계!" 사노의 말에, 우리들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선생님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째려보며 경계를 했다. 선생님은 속았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소리내어 웃으며 교실을 나섰고, 몇몇 애들은 사노에게 엉켜 짓궂은 장난들을 했다. "켄지, 나 양호실 다녀올께." "어디 아파?" "조금 어지러워서." 켄지는 금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같이 가줄까?" "아냐, 괜찮아. 국어 선생님 들어오면, 양호실 갔다고 좀 전해줘." "응." 내가 교실 문을 나서자, 사노들과 뒤엉켜 놀고 있던 다카오카가 재빠르게 달려와 내 목을 낚아챘다. 나는 다카오카의 배에 가볍게 주먹을 넣어준 뒤, 쩔쩔매는 다카오카를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슈야, 어디가?" 다카오카가 계단 난간에 매달린 채 말했다. 나는 뒤로 손을 흔들어 주며 말했다. "양호실에. 어지러워서 잠깐 누워있을꺼야." 한참 조용하던 다카오카는, 탕탕탕 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나도 같이 가자!" "싫어, 이 원숭아." "내가 왜 원숭이냐!" 다카오카는 징얼거리면서도 잘도 쫓아온다. 밀어도, 밀어도 쫄랑쫄랑 쫓아오는 게... 꼭 동네 똥개같다;; 양호실 문을 열자, 특유의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그런데 카즈의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어라? 유키, 오랜만이다?" 회전 의자에 앉아 있던 작은 체구의 남자아이는, 우리를 돌아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귀엽게 웃었다. 카즈만큼은 아니지만, 같은 학년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녀석인 히로 유키시로라는 녀석이다. "오랜만이야, 다카오카. 세이슌하고 잘 경기 봤어. 정말 멋지더라." 그 말에, 다카오카, 이 단순한 놈은 히죽히죽 웃으며 우쭐거렸다. 히로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나마치였지? 미안해, 잠깐 이름이 생각이 안나서." "응." 녀석하고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었지만, 인사를 할 정도로 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난 미적미적 거리면서 주위를 서성거렸다. 다카오카는 히로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그의 퉁퉁 부운 발목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야, 이거 왜 이러냐?" "축구하다가 접질렸어. 앗.... 아파요, 선생님. 살살요~" "시끄러워." 다카오카 때문인지, 카즈는 상당히 신경질 적으로 붕대를 감고 있다. 히로는 아프다고 징징 거리면서도, 찡그린 얼굴로 웃는다. "흘, 조심 좀 하지. 아참, 너네 여장까페 한다며?" "미즈노 녀석이 억지로 추진했지 뭐. 아, 너네도 한다면서?" "엉, 여기 이놈이 우리 반의 히로인이지~" 나는 나를 가리키는 다카오카의 손가락을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았고, 다카오카는 내 부드러운(?) 시선에 못 이겨 손가락을 내렸다. "헤에.... 하나마치, 여장하면 정말 예쁘겠다." "너보단 아냐." "아냐아냐, 나보다는 하나마치 쪽이 더 미인인걸. 날씬날씬하고. 하얗고." "으이그.... 그래, 나만 원숭이라 이거지?" 다카오카가 툴툴 거리며 말하자, 히로가 말했다. "이냐, 다카오카는 다카오카 나름대로 멋지잖아. 빠르고, 강하고. 괜히 필드위의 검은 질풍 이겠어?" "흐흐, 그렇지? 그렇지?" "쳇쳇, 그래봤자 원숭이다!" "으으, 슈야 너...!" "......이봐들." 카즈는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얼굴로 우리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는 담소 나누는 장소가 아니다. 멀쩡한 놈들은 나가." "선생니임~ 전 환자에요~" 히로는 금새라도 카즈에게 포옥 안길듯이(!) 몸을 기울이며 말했고, 카즈는 몸을 뒤로 빼며 눈을 찌푸렸다. "뽀송뽀송한 꼬맹이 주제에 어딜 꼬시냐." "저, 뽀송뽀송한 꼬맹이 아니에요. 이제 솜털 없다구요." "시끄러워. 말대꾸 하지마." 카즈는 히로가 앉은 의자를 툭 걷어차고는, 다카오카를 째려보며 말했다. "거기 원숭이. 사지 멀쩡해 보이는데, 나가보지 그러냐?" "전, 우리 슈야 눕는 거 보고 갈껀데요." 다카오카가 절대 지지 않겠다는 얼굴로 말하자, 카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뭔가.... 굉장한 분위기;; 딩ㅡ동ㅡ댕ㅡ동. "다카오카, 종 쳤으니까 올라가. 나, 여기 누워있다가 갈꺼야." ".....알았어. 푹 쉬다 와라." 다카오카가 내 머리를 부시시하게 쓸자, 카즈가 나를 찌릿 째려본다. 허허;; "선생님~ 아프다니까요오~" 히로의 말에, 카즈는 그제서야 내게서 시선을 떼냈다. 그리고 묵묵히 붕대를 감는 카즈. 히로는 물끄러미 카즈를 바라보다, 카즈의 눈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냐, 이 손은?" "속눈썹이 너무 예뻐서요. 만져봐도 되요?" "안돼." "에이, 한번만 만져볼께요~" "네꺼나 만져. 이 어린 변태놈아." 히로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앙탈(!)을 부리듯이 말했다. "치이, 제가 왜 변태에요~" "그럼 세상에 어느 멀쩡한 놈이, 선생을 보고...." 카즈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입을 다물었다. 뭐야.... 내가 들으면 안되는 거라도 있는거야? "하나마치, 침대 비어 있으니까 온열기 켜고 자라." "네." 나는 안정실에 들어가 커텐을 걷고 침대에 누우면서 바짝 귀를 기울였다. 왠지 저 녀석, 거슬린단 말이야... "선생님, 부탁이 있는데요..." "싫어." "너무해요. 적어도 끝까지 들어는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후, 알았으니까 칭얼거리지 좀 마라." 그리고나서 잠시 침묵ㅡ. "저...." "짧게 말해. 길게 말하는 거 싫어하니까." 왠지, 쌀쌀맞게 느껴지는 카즈의 말투. "저.... 유키라고 불러 주세요." "싫어." "히잉, 왜요오~" "붕대, 다 감았으니까 교실 올라가." "흑, 너무 냉정하세요..." "꼬시려거든, 세이슌 여자애들이나 꼬셔. 양호실에 쳐박혀 있는 아저씨 선생 꼬시지 말고." "헤에, 전 세이슌 여자애들보다 선생님이 더 좋은데요~?" "난 싫어." 삐꺽, 하고 오래된 회전 의자가 돌아가는 소리가 난 뒤, 다시 카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꼬맹이 변태. 종쳤는데 수업 안 들어가냐?" "유키라고 불러주시기 전엔, 절대 안 올라갈꺼에요." "유키, 유키, 유키, 유키, 유키! 됐냐? 빨리 올라가!" "헤에에.... 또 놀러 올께요~" "웃기지마. 여기가 네 놈 놀이터인줄 아냐?" 타앙ㅡ.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 카즈의 발걸음 소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화악 걷어지는 커텐. "일어나 봐." ".....싫어." "일어나." 나는 카즈를 노려보다가, 카즈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채고 부시시 일어났다. 카즈는 내 옆에 걸터 앉으며, 손으로 내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뭐야, 하지마..." "소독." "소독?" "원숭이가 만졌으니까." 나는 물끄러미 카즈를 쳐다보았다. 히로의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문득 카즈의 손눈썹을 만져보고 싶어졌다. "나, 만져볼래." "뭘?" "카즈 속눈썹." "오늘따라 애들이 왜 이러냐..." 카즈는 짜증이 배인 말투로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감았다. 상당히 어려운 요구를, 너무 쉬운 허락을 받은 느낌에, 난 가만히 카즈를 쳐다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내가 만지지를 않자, 카즈가 천천히 눈을 떴다. "뭐야..." 카즈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문득, 그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키스하고 싶어." "여기에서?" "응." 카즈는 흘러내리는 앞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너, 학교에서 하는 거 싫어하잖아." "그래도." "후, 어린애 변덕이란...." 카즈는 그렇게 말하고, 내 뒷머리를 감싸며 입술을 포개왔다. 난 카즈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열었고, 내 반응에 조금 놀랐는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카즈가 부드럽게 혀를 밀고 들어왔다. ".....카즈." 나는 카즈를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히로.... 유키라고 부르지마." "빨리 올려보내려고 그런거야. 나도 그렇게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카즈는 나를 침대에 눕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카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카즈." "응." "내가 질투해서.... 미워?" 카즈는 나를 돌아보며 픽 웃었다. "귀여워 미치겠다." 나는 물끄러미 카즈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나, 사랑해.....?"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냐. 어린애." 머리칼을 쓰다듬는 기분 좋은 손길ㅡ. 오직 내 손길만 허용하는 아름다운 사람.... .........마음이 부풀어 간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7 "...ㅅ야, 일어나... 슈야..." 우우우웅, 시끄....러어..... "수업 종 쳤어. 그만 가야지...." 안해... 조금 더 잘래... "착하지, 우리 슈야... 그만 일어나자..." 나는 흐느적 거리고 일어나, 카즈의 목을 폭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우움.... 뽀뽀해주면 일어나지이...." 나는 카즈의 뺨을 잡고 손 끝으로 입술을 찾아나갔다. 왜인지 바짝 말라있는 입술.... 하지만 카즈 입술인데, 뭐... "자, 잠깐! 스, 스톱, 슈야군!" ............슈야군?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상대가 카즈가 아니란 걸 확인하자마자, 그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낮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 앉는 사람은.... "케, 켄지?" "쿨럭.... 아..하하... 참 경쾌하게 일어나네, 슈야..." 얼굴에 피가 몰린다. "미, 미, 미, 미안!! 꾸, 꿈에.... 후, 후카다 쿄교가 나왔지 뭐야. 아하하하;;" 켄지는 한참이나 고된 기침을 하고 나서야, 평상시의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아아, 후카다 쿄교 좋아한다고 했었지." "으, 으응.... 마, 많이 아팠어?" "응. 축구선수 해야겠더라." 아하하, 내가 또 한 발차기 하지..... 가 아니라!!;; "미안...." "괜찮아, 괜찮아. 슈야는 예쁘니까 호신술을 잘해야지." "켄지, 남자한텐 예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멋지다고 해야지." ........그러는 나도 카즈한테 예쁘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얼른 올라가자." 나는 내 손을 꼭 잡는 켄지의 손이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빼냈다. 그런데 켄지의 표정이 잠시 굳은 걸 보면, 그도 내가 불편해 하는 것을 눈치챈 것 같다. "아, 그런데.... 히데야키는?" 이럴 땐 말을 돌리는 게 최고지;; "선생님, 병원 가셨어." "병원?" "7반에 히로 알지? 걔가 체육하다가 쓰러졌나봐." "쓰러졌으면 담임 선생님이나 학과 선생님이 데리고 가야지, 다른 아픈 학생들은 어떡하라고 양호 선생님이 데리고 가?" 내 말이 조금 뾰족하게 들렸는지, 켄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히로가, 양호 선생님이 안 데리고 가면, 절대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는데." 그 칭얼거리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 ".....썩을 놈...." "응?" "어? 아.... 아하하하, 그 녀석도 양호 선생님 좋아하나 보네. 얼굴만 예쁘지, 사실은 왕싸가지에 변탠데 말이야." "그러게. 난 양호 선생님보다 슈야가 좋던데." 거기서 왜 갑자기 내 이름이 나오냐, 이놈아... "그래? 난 너보다 후카가 쿄교가 좋던데." "............;;" "어, 다카오카다." 다카오카는 교실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후다닥 뛰어왔다. 그 모습까지도, 정말 동네 똥개같다;; "여, 잘잤냐?" "잘 잤긴 했는데.... 켄지가 내 좋은 꿈을 방해했어." "좋은 꿈?" 내 말에, 켄지의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로 빨개졌다. 쯧쯧.... 나는 이 어린 청춘들을 뒤로 하고 교실로 들어왔다. "앗, 오신다!" ....하는 소리와 함께 반 녀석들의 창가로 우르르 몰렸다. 난 무슨 일인가, 해서 녀석들의 사이를 비집고 창문의 한 귀퉁이를 차지했다. 녀석들의 시선이 쏠린 곳에는 카즈가 서 있었다. 병원에 가느라 가운을 벗은.... 그러니까 학교 갈때와 같은 정장 차림이다. "야아.... 가운 벗으니까 더 섹시하지 않냐?" "정장을 입고도 저런 분위기를 내다니.... 진짜 국보감이다, 국보감." "야, 옆 좀 봐봐. 다른 반들도 다 나와 있어." 고개를 돌려보니... 왼쪽 반, 오른쪽 반 할 것 없이, 창문에 머리통들이 비집고 나와 나와 있다. 허허;; "앗, 이 쪽 본다!" 센도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카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빙긋ㅡ. "봐, 봐, 봤냐?!" "야, 야.. 우리 보고 웃었지, 그렇지?" 카즈가 무슨 연예인이라도 되는 냥, 녀석들은 카즈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리를 지르고 좋아한다. 그 시선을 받은 게 나라는 사실이 미안해질 정도다;; "뭐야? 히로가 왜 히데야키 차에서 내려?" "둘이 같이 병원 갔다 왔잖아." "히로 자식, 벌써 작업 들어간거야?" 나는 차에서 내리는 히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썩을 놈, 얼마나 좋은지 입이 찢어지려고 한다. "하나마치 군!!"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카즈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사랑한다~" ................ ................ ................ ................ ................ ................ 아하하, 나도 사랑해~ ................ ................ ................ ................ ................ ................ ................ ..........가 아니잖아!!! "다, 당신 미, 미, 미쳤어?!!" "아하하하~" "당신 따위 죽어버려!!" 나는 창가를 뛰어나갈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뒤에서 우리 반 애들이 내 다리를 붙잡고, 허리를 붙잡고 난리다;; "죽여버릴꺼야, 이 악마!!" 으으, 쪽팔려.... 망할, 그런데 왜 이렇게 행복한거야!!;; "야, 히데야키가 왜 슈야보고 저러지?" "둘이 무슨 사이냐?" "하나마치, 양호실 자주 가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거 아냐....?" ....등꼴이 오싹하다. "우리 하나마치가 워낙 사랑스럽잖아~" 하면서 나를 끌어안는 건, 히로우.... 아니, 사노. "저 사악한 선생이, 우리 하나마치가 몸이 안 좋아서 자주 양호실에 가니까, 놀려먹는 거라고." 사노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이며 말하자, 반 녀석들이 수근수근 거리면서도 수긍하는 눈치다. "흘, 하긴.... 히데야키, 남의 불행보고 박장대소하며 박수칠 놈이니까." "미인이긴 하지만, 은근히 사악하단 말이야."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사노를 바라보았다. 사노는 "이크, 다카오카한테 혼나겠다"라고 말하며 팔을 풀고는, 나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아참, 유키ㅡ 몸은 괜찮아아아ㅡ" 사노는 창 밖으로 몸을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히로 녀석, 날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다. ......히로놈, 은근히 한 싸가지하네;; "얘들아, 선생님 오신다! 자리에 앉자!" 사노의 말에 우리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사노는 아직 서성거리는 녀석들을 자리에 앉힌 후, 내 책상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하나마치, 점심 먹고 시간 있니?" "어? 응." "그럼, 잠깐 나 좀 보자.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을께." "어... 으응." 무슨 일....이지? 서, 설마 저 자식도 날....? 아하하하;; 왠 도끼병이냐, 슈야. 그럴리가 없잖아~ .....라고 하면서도, 신경이 쓰여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지도 몰랐다;; 나는, 나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다카오카를 쫓아낸 후, 부리나케 달려 옥상으로 올라갔다. 왠지 모를 긴장으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큰 심호흡ㅡ. 이제 연다! 끼이익ㅡ. "빨리 왔네?" 옥상에는 이미 사노가 올라와 있었다. 철장 난간에 기대 워크맨을 듣고 있던 사노는, 이어폰을 빼며 빙긋 웃었다. "어.... 무슨 일이야?" 사노는 이어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난 나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타악ㅡ. 벽에 등이 닿자, 소름이 쓰으윽 끼쳤다. "하나마치, 아니.... 슈야." 사노는 양 손으로 벽을 짚고, 내가 빠져나갈 곳을 완전히 차단한 후 빙긋 웃었다. 뭐, 뭐야.... 다, 당신 모범생이잖아! 이, 이래도 되?! "사실 나는...." "하, 하지마, 싫어!" "으응?" 사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만지면 혀 깨물고 죽어버릴테다!"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아, 미안. 겁을 먹을 줄 몰랐어." 사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람 좋은 미소지만, 완전히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전에 카오루의 예쁜 미소에 된탕 당했으니까. 사노는 나에게서 약간 떨어지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슈야, 너.... 히데야키 선생님 좋아하지?"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내, 내가 왜.... 아니, 왜 그렇게 생각을..." "속이지 말라고. 다 알고 있으니까." 사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하고 동맹 맺자." 도, 동맹? 뜸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전쟁 놀이라도 하자는 거냐?;; "나, 유키 좋아하거든. 그런데 요즘 유키가 부쩍 히데야키 선생님한테 관심을 갖는 것 같아서 말이야." 사노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넌 유키를, 난 히데야키 선생님을 견제하기로. 어때?" "하, 하지만 내가 히데야키를 좋아하는 건....." "물론 비밀로 해줄께." 왠지 망설여 졌다. 만약 사노가 나를 떠보기 위해 이러는 거라면... "날 믿어. 내가 유키를 좋아한다는 말은, 너한테 처음 하는거야." "그, 그걸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히데야키 선생님을 좋아하려면, 학교에 바글바글 거리는 수많은 적들의 눈에 가리개를 씌워야 하잖아." 사노는 나를 직시하며 싱긋 웃었다. "내가 도와줄께. 오늘처럼." 확실히, 사노가 편이 되어 준다면 이래저래 좋은 점이 많겠지만.... "....조, 좋아. 믿을께." 나는 머뭇머뭇 거리며 사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사노는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서로 분발하자." 의외의 아군이 생겼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8 "헤에..... 그럼 어릴 때 부터 친구였던거야?" "응, 서로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잘도 붙어 다녔지. 그런데 요 녀석이, 자라면서 점점 예뻐지더라고." 사노는 멋쩍게 웃으며 콧잔등을 긁었다. "그 때부터 내가 의식적으로 유키를 멀리했던 것 같아. 남자애를 보고 좋아한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 왠지 이상하잖아." "후웅, 그런가...." 사노는 내 볼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넌 히데야키 선생님을 좋아하는 수 많은 남자애들 중의 하나지만, 난 그렇지 않잖아. 난 내가 유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방황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고." "나도 좋을 꺼 하나 없다, 뭐. 양호실 갈때마다 고백하는 장면을 목격해야 하고, [선생님~]하면서 알랑거리는 애들 수없이 봐야 하고." "흐음, 그건 그렇겠네." 눈부실 만큼 좋은 날씨!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옥상에 앉아서, 나와 사노는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했던 사랑의 가슴 앓이(?)를 토로하고 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사노는 사노 나름대로 남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라, 우리는 맞장구도 치고 반박도 해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중학교 때, 히로에게 고백한 여자애가 있었는데 말이야. 성격도 좋고, 얼굴도 괜찮고, 평판도 좋았어. 그런데 히로가 [나 걔하고 사귈까...]하고 고민을 하더라고. 마음 같아서야, [사귀지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잘해봐]하고 말았지, 뭐." "으이구, 바보짓 했네. 내가 주먹으로 사노의 가슴을 툭 치자, 사노가 과장해서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거기에서 내가 [사귀지마]하고 말했으면, 들통날 게 뻔했으니까." "그건 그렇겠지만.... 헤에, 모르겠다." 나는 사노의 다리를 쭉 펴고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친구]라고 불릴 수 있는 녀석하고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는 것, 정말 오랫만이다. 다카오카하고 켄지의 마음을 안뒤로, 늘 그 녀석들하고 부딪히는 게 조심스러웠는데.... "아아, 그립다." "뭐가.....?" "다카오카들 말이야." 나는 나를 내려다보는 사노의 얼굴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예전에는 그 녀석들하고, 이렇게 엉켜서 잘 놀았거든. 그런데, 그 녀석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안 순간부터.... 뭐랄까, 괜히 의식하게 된다고나 할까. 예전에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것들이 귀에 거슬리고, 싫기도 하고." 사노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너도 참 고민이 많은 녀석이구나." "그러는 당신도 만만치 않아. 나라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한다고, 이 자식아!]하고 일 저질러 버렸을텐데." 사노는 쿡쿡 거리고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난 너의 그런 점이 참 부러워." "그런 점?" "너, 멋진 녀석이잖아. 난 다카오카들이 왜 너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사노는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느끼는 듯 했다. "작고 여리여리해서, 포옥 안아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이 생겨가지고는, [난 누구보다도 강해!]라고 외치고, 자기보다도 큰 사람들의 앞에 서서 뒷모습을 보여주지. 어느 순간에는 걷잡을 수 없이 연약해 보여서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다가도, 그 다음 순간에는 벌떡 일어나서 [난 말짱해, 이 자식아!]라고 외치는 것 같아." "뭐가 그리 복잡해. 간단하게 말하면, [쪼꼬만 놈이 악에 받쳐서 산다] 잖아." 사노는 소리내어 웃었다. "특이해, 너는.. 작은 말에도 상처 받을 것 같이 생겼는데, 모든 상처를 흡수하고 더 강해지는 것 같아." 사노는 내 이마를 쓸며 빙긋 웃었다. "부러워. 너의 그런 점이." "나도 네가 부러워. 나라면 [선생님을 경계!] 같은 말은 절대 못했을테니까." 사노는 쿡쿡 거리고 웃었다. 이 공간을 흐르는 공기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딩ㅡ동ㅡ댕ㅡ동ㅡ "종쳤다. 그만 내려가야지." "응. 으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노는 웃는 얼굴로, 내 등에 묻은 흙가루를 털어 주었다. "아참, 슈야." "응?" "나, 계속 슈야라고 불러도 되는거지?" "그럼! 우리는 절대불멸동맹군이잖아!" 사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내 뒷통수를 툭 쳤고, 나는 그런 사노를 팔꿈치로 툭 치며 어린 아이들 같은 장난을 쳤다. 갑자기 친해져서 희희낙락하는 우리를 보고, 다카오카와 켄지는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감사합니다~" 나는 수업이 끝나마자 책상에 엎드렸다. 자고, 자고, 또 자도.... 학생은 늘 잠에 굶주린다니까. "슈야, 매점가자~" "....다카오카, 너 자꾸 그렇게 먹으면, 나중에 [필드 위의 검은 질풍]이 아니라, [필드 위의 검은 돼지]가 된다!" 내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다카오카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가 웅웅 울리며, 따뜻한 바람과 함께, 평화라는 글자로 느껴졌다. "슈야, 피곤하지 않으면 나하고 양호실 좀 같이 갈래?" 사노의 말에,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사노는 내 책상 앞에 쪼그려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키 반에 갔더니, 유키가 양호실에 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양호실에 가보고 싶은데, 핑계거리가 없어서 말이야." "......가자!"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하자 사노가 빙긋 웃었다. "타도, 히데야키." "타도, 히로."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키득 거리고 웃어버렸다. "야, 너네 어디가?" 다카오카, 저 자식은 꼭 끼어든다니까. "데이트 하러 간다!" 내가 대꾸하자, 사노가 내 어깨에 팔을 얹으며 다카오카를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뭔가, 상당히 즐거운 기분에 웃음이 자꾸 터져나오려고 한다. "선생님 종례 들어오시기 전에 얼른 가자." "옙!" 나는 대답을 하기 무섭게 2층으로 뛰어내려갔다. 사노 녀석, 달리기 했던 녀석 답게 가볍게 나를 따라잡는다. "슈야." "응?" "심호흡." "응!"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양호실 문을 열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직 [타도 히로!]만이 있을 뿐! "어, 어라?" 양호실에는 오직 카즈만이 있었다. 나를 따라 들어온 사노도 히로가 없자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주무시네?" "그러게." 학교에서 졸거나 하는 모습, 한번도 본 적 없는데, 히로에게 많이 시달렸는지(!) 카즈는 책상에 엎드린 채 피곤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내가 의자를 끌어와 카즈의 옆에 앉자, 사노가 빙긋 웃으며 손으로 안정실을 가리켰다. "유키, 안에 있나 찾아볼께." "응." 사노가 안정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조심스럽게 카즈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순간, 탁ㅡ 하는 소리와 카즈가 내 손목을 잡았다. 깜딱 놀래서 벌렁벌렁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카즈가 천천히 눈을 떴다. ".....슈야?" "응, 많이 피곤해?" "아아, 잠깐 졸았던 것 뿐이야." 카즈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나는 안정실에 있는 사노의 눈치를 보며, 카즈를 살짝 밀어내....지 못했다!!;; "우웁....." 아, 안된다고, 이봐! 이 모습을 사노가 보면.... "유키, 안에 없....." 사노가 보면.... 사노가 보면.... 안된단 말이다아아아아!! ".....서, 서, 선생!! 미, 미쳤어?!!" "응?" 잠이 덜 깬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카즈는 두리번거리다 사노를 발견했다. "아아..." 카즈는 그렇게 말하고 살짝 웃어보인 후(!)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사노가 기묘한 표정을 짓는다. "자려면.... 곱게 자란 말이야!!" 나는 카즈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양호실을 뛰쳐나와, 어디론가 마구 달렸다. 얼굴에... 얼굴에 피가 몰린다!!;; "헉헉.... 헉...." "고맙지?" "허억!!" 나는 내 등 뒤에서 가볍게 말하는 사노를 보고 깜짝 놀랬다. 이, 이 자식;; 혹시 여우족 아냐?;; "고, 고맙...다니?" "내 덕 봤잖아~ 난 유키 못 봤지만서도...." 사노는 팔꿈치로 나를 쿡 찌르며 씨익 웃었다. "소감 한마디 하지?" "어? 아, 그게...." ...........사실은 매일 해!!;; 네가 목격을 했기 때문에 당황한 거라고!!;; "다, 당황스러워서... 자, 잠결에 한거잖아..." 나는 [잠결]을 강조하며 말했다. 사노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걸로 한 발 진전이라고. 다음엔, 우연을 가장해서 나도 부탁해." "에? 너도 히데야키랑 하고 싶...?" "아닌 거 알면서, 이 녀석이~" 사노는 팔로 내 목을 살짝 조르며 말했고, 나는 과장해서 켁켁 거렸다. "선생님 종례 들어오셨겠다. 얼른 가자." "응..." "슈야. "응?" 사노는 먼 허공을 쳐다보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사실 많이 부럽다..." "미, 미안;;" "됐다. 언젠간 나한테도 기회가 오겠지~" 사노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멋진 녀석.... 히로한테는 너무 아깝다. '.....켄지한테 붙여줄까?' 어이어이, 위험한 생각이라고;;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19 "차렷. 선생님께 경례!" "감사합니다!!" 나는 가방을 메고 책상에 널려진 책들을 정리했다. 이 시간만큼 좋을 때도 없다. '헤에, 집에 가면 눈치 보지 않고 카즈를 만질 수 있다아~' 만질 수 있.... 만질.... ........... 난 변태가 아냐!! 카즈가 변태라고!! 그, 그런데 어째서 내가 이런 생각을?! "슈야,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갈께." "어? 아, 잘가!" 나는 혼자만의 절규에서 빠져나와, 켄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카오카는 부연습 때문에, 종례는 늘상 땡땡이다. "슈야군." "아, 사노. 잘가~" 손을 흔들고 교실을 나갈 줄 알았던 사노는, 내 앞으로 다가와, 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건투를 빌어줘." "응?" "아픈 걸 빌미로, 유키네 집에 가보려고." "헤에...." 사노는 내 손을 놓으며 멋쩍은 얼굴로 콧잔등을 긁었다. "예전엔 매일매일 놀러갔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로는 통 안 가봤거든. 반도 달라지고, 노는 친구들도 달라지니까, 복도에서 마주쳐도 어색하고...." "그래도 사노는 잘해낼 수 있을꺼야. 힘내!" 사노는 씩 웃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군 있으니까 정말 좋다." "응, 나도." "그럼 잘 쉬고, 내일 보자." "응!" 나는 사노와 인사를 끝내기 무섭게 학교를 빠져나왔다. 학교의 외곽에 차를 대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카즈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있다!' 나는 뛰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즈의 차까지는 약 스무 걸음ㅡ.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묘하게 심장을 찡하고 울리게 하면서도 행복하게 만들어서, 나는 항상 이 정도 거리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카즈!!" 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나, 귀 안 떨어졌어.." 카즈는 픽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누군가도 할 수 있는, 별 다를 것 없는, 머리를 쓰다듬는 행동이지만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다카오카가 그럴 때도, 사노가 그럴때도, 이만큼 행복하지는 않으니까. "오늘 저녁은 뭐 해먹을까?" "음.... 초밥 먹고 싶어." "초밥? 그럼 들어가면서 사갈까?" "응!"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두들기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올렸다. 아까부터 무릎이 시큰시큰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피가 고였는지, 무릎이 검붉어져 있었다. "카즈....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카즈는 속도를 늦추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무릎을 내려다보는 카즈의 눈꼬리가, 잠시지만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아아, 초밥은 물 건너갔네." 카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카즈가 내 무릎을 쳐다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카즈가 불안해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안해...." "괜찮아. 초밥이야 내일 먹으면 되지." 내일ㅡ.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말을 곱씹었다. 무릎에 피가 고이면 그걸 뽑아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 그 수술 자체가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혈우병 환자는 한번 피가 나면 응고주사를 맞기 전에는 피가 그치지 않아서, 작은 수술은 물론이고 감기 주사라 할지라도 주의해서 맞아야만 한다. 말 그대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ㅡ. 엄마도, 아빠도.... 이런 아슬아슬한 삶을 불안해 했다. 가족들이 나를 버린 건, 어쩌면 그 상황에서의 당연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늘 신경불안에 떨었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달래는데 지쳐있었고.... 내 밑에는 건강하고 활기차게 자라는 동생이 있었으니까. "내리자." 내가 차에서 내리자, 카즈가 나를 부축했다. 나는 카즈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괜찮아. 아직 걸을 수 있어." 내가 이렇게 말하면, 카즈는 억지로 부축을 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있다]고 말해준 건 카즈였으니까. "카즈." "응?" "묘하지 않아?" "뭐가?" "내가 지금 카즈의 옆에 있다는 거 말이야." 카즈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웃으면서 "아냐, 됐어."라고 말했다. 난, 이렇게 카즈를 보고 있으면,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한다. 2년 전의 나라면, 아주 당연스럽게 카즈의 곁에 서서, 그의 따뜻한 배려를 받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었을테니까. 2년 전, 나는 카즈의 오피스텔 맞은 편에 혼자 살았다. 집은 일하는 아줌마가 관리해 주고 있었는데, 잠시 밖에 나갔다 온 사이에 아줌마가 퇴근을 해버려서, 나는 추운 겨울날의 밤을 집 앞에서 지새야만 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전화를 걸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게 서럽게 느껴져, 나는 문 앞에 주저 앉아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고, 거의 1시간을 운 후에야, 앞 집 사람이ㅡ상당히 짜증이 배인 얼굴로ㅡ "들어오려면 들어오던지"라고 말했다. 나는 사람을 상당히 경계하는 편이었지만, 겨울 바람이 너무 찼는지... 아니면 그 사람의 짜증이 배인 얼굴이 그다지 싫지 않았는지, 넙쭉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2년이 넘는 동거가 되어버렸다. "슈야, 들어가자." "어? 응." 나는 카즈의 손을 잡고 진찰실로 들어갔다. 낯익은 얼굴의 의사 아저씨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하나마치 군, 학교는 잘 다니고 있나요?" "네." "건강해 보이는 군요. 좋습니다. 어디 무릎을 좀 볼까요? ......음, 피가 상당히 고여있는 것 같군요. 되도록 수술은 피해야겠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겠는데요." 카즈는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수술을 해야 하는 겁니까?" "예, 피를 뽑는 수술 자체야 큰 수술이 아니니 금방 준비가 되겠지만...." .....출혈 과다로 죽을 수도 있다. "이따가 정밀 검사를 해봐야 겠지만, 수술 날짜를 먼저 잡아보도록 하지요. 하나마치 군의 경우에는 빠른 시일내에 수술을 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의사 아저씨는 두꺼운 차트를 뒤적이며 말했다. "수술시간은 오늘, 내일, 금요일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마치 군의 수술은 워낙에 간단한 수술이라 다른 날에도 시간을 내어 할 수는 있어요." "......오늘 할래요." 카즈가 나를 쳐다본다. "이왕 할꺼면 빨리 하는 게 좋잖아. 나도 내일 멀쩡하게 학교 가고 싶고." "보호자 분도 동의하십니까?" 카즈는 다른 손으로 내 손등을 쓸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정밀검사 후에 수술 준비실로 가시지요." 나는 카즈의 손을 잡고 병원 복도로 나왔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우리를 눌러 뭉개는 무거운 침묵ㅡ. "나, 수술하는 거 싫은데." 나는 침묵을 깨며 말했다. 카즈는 그런 나를 내려다 보며 빙그레 웃었다. "수술 빨리 끝나면 초밥 사줄께. 초밥의 힘으로 참아." 내가 울거나 칭얼대도 카즈는 침착하게 나를 달랜다. 언제나 강하니까. "응, 꼭 사줘."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카즈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카즈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아아, 언제였더라... 카즈를 만난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던가.... 나는 외국에서 온 부모님의 편지를 받고 엉엉 울었다. 지금은 무신경해져버렸지만,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보낸 편지를 받는 일은, 한참 흔들리던 나에게 무척이나 잔인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날 철저하게 버릴만큼 잔인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나를 이곳에 혼자 남겨두고, 간간히 내게 살아있는지를 확인하는 편지만을 보내왔다. 내가 편지를 보내면 통장으로 돈을 보내고, 다시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 삶의 시간을 죽음으로 여기고 방관하는 것이다. 내가 왜 살아있는지, 아니 왜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ㅡ. 하지만 그마저도, 아는 사람 없는 이 차가운 땅에 나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 "난 이미 죽었어.... 아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다들 내가 죽기를 원하고 있고.... 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에 걸려 있어...." 난 이전에 한번 만난 적 없는, 생판 모르는 남인 카즈의 앞에서 이렇게 인생 한탄을 하며 엉엉 울었다. 남 앞에서는 잘 우는 편이 아닌데, 카즈를 만난지 겨우 이틀이었건만, 그 사이에 두번이나 우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카즈는 전혀 짜증내는 기색 없이 진지하게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넌 아직 살아있고, 여기에 있다고. 살아있을 이유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만들어줄테니, 우선은 살아 있는 걸 축복이라고 생각하라고.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묘하게 따뜻한 말을 할줄 아는 사람. 어쩌면 나는, 그 이틀째 되는 날부터 카즈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마치 슈야님,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말에 카즈가 내 손을 놓았다. 나는 카즈의 온기가 남아 있는 손을 꼭 쥐며, 카즈를 향해 "갔다 올께."라고 말했다. 카즈는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만약의 상황엔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여기 누우세요." 나는 팔에 파고드는 따끔한 감촉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편안한 느낌ㅡ. 그리고 머릿속이 뿌옇게 멀어지면서 의식이 가물가물해왔다. "................."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오면서, 내 손을 잡고 있는 무언가 따뜻한 것이 느껴졌다. "......카즈....." 내 입에서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어났어....?" "응, 걱정 많이 했지?" "걱정은 무슨... 작은 수술이었는데, 뭐. 앞으로 몇 번 더 있을지도 모르고." "응...." 나는 카즈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그 다음 순간, 눈 앞이 뿌얘지면서 카즈의 얼굴이 흔들렸다. 손바닥에 닿는 촉촉한 감촉ㅡ. "카즈...." "괜찮아...." 카즈는 그렇게 말하고 내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나에게 항상 뒷모습을 보여주는, 나의 강한 왕ㅡ. 악마로부터도, 천사로부터도, 신으로부터도 나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ㅡ. 하지만 내 뺨에 떨어지는 건, 내 눈물이 아닌 카즈의 눈물이었다. 떠나가는 사람보다, 떠나보내는 사람이 더 아파한다는 것을 알면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내 손을 놓지 않으려고,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는 걸 알면서... 왜 나는 "괜찮아...."라고 말하는 카즈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걸 몰랐을까. 바보같이.... "언제나 강하니까"라니.... 엄마, 아빠도 불안해하던 내 불확실한 죽음을.... 카즈가 불안해하지 않을리가 없는데... 하지만 카즈가 너무 강해보여서.... 언제나 여유있게 웃고 있어서.... 나 때문에 카즈가 불안해 하고 있을 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카즈... 안아줘." 카즈는 말없이 나를 끌어 안았다. 그러자, 카즈의 미세한 떨림이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잠깐만 이대로 있자...." 내 등 뒤에서라도.... 아주 잠깐이라도 카즈를 울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나의 왕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이것 밖에 없었으니까...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0 "카즈, 학교 애들이 지금의 카즈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지금의 나?" 카즈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쭉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학교에서 카즈는 쌀쌀맞은 미인으로 통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목에 걸고 있는 노란 앞치마를 보고 뭐 느끼는 거 없어?" 카즈는 그제서야 내 말을 알아듣고 빙긋 웃었다. "카즈...?" 카즈는 자신의 넥타이를 내 목에 매주고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탈탈 털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싱긋ㅡ. "여보,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 나, 나, 지금 코피 안나지...? 난 혈우병 환자란 말이야!! "충격 받았어?" 카즈는 흐느적 거리며 주저 앉아 버리는 나를 보고 말했다. "당신 말이야.....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모르는 거야?" "자기? 아아, 자기야~" "푸헉!! 카, 카, 카즈!! 왜, 왜 그래!! 어디 아파?!" 카즈는 픽 웃으며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웃으라고 한거야. 아까부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잖아." "아... 내가 그랬나?" "초밥 싫다고 해서 바리바리 장을 봐서 밥을 해주고 있는데 말이야...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지는 못할 망정, 그 옆에 앉아서 죽을 상을 하고 있으니..." "미안. 딴 생각 좀 하느라고." 카즈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후, 이젠 사람을 앞에 두고 딴 생각까지 하는 건가." "히익, 그...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아낙네라도 생긴 모양이지..." 카즈는 숟가락으로 싱크대를 탁탁 치며 말했다. 나는 카즈의 허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그런 거 있을 턱이 없잖아아..." 카즈는 고개를 들며 빙긋 웃었다. 허허, 피끓게 하네;; "슈야? 얼굴이 빨...." 이럴땐 말을 돌리는 게 최고다!!;; "카즈, 밥 아직 멀었어?" "한 20분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먼저 씻고 와." "가...." "가?" 이, 이런 말 하면.... 벼, 변태 취급 당할까...? 그, 그, 그래도.... "가, 같이 씻고 싶어!!" "그래." .................... .................... .................... .................... .................... .................... .................... .................... .................... .................... "사, 사람이 고민고민해서 말했으면, 건성으로 대답 하지 말아야지!!" "그럼.... [슈야 변태~ 나 부끄러워~]라고 해주길 바랬던거야?" "아, 아냐! 하지마! 죽어버릴꺼야!" "푸, 알 수 없는 녀석." 카즈는 피식 웃으며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얼굴을 푹 파묻고 있는 나를 쓰다듬었다. "말했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커지면, 몸으로 느끼는 거라고." "그, 그래도 부끄럽단 말이야..."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카즈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슈야는.... 새신부니까 말이야." "히익, 또 이상한 말 한다!" 카즈는 가스불을 끈 후, 앞치마를 벗어 의자에 걸며 말했다. "그럼, 밥 될 때까지 먼저 씻자." "지, 지금 씻자고?" "응." 그러고 나서 카즈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훌렁훌.... "자, 자, 자, 잠깐!!" "응? 왜?" "어, 어째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는거야!!" "매일 보면서, 뭘 새삼스럽게 내외를 하고 그래." 나는 움찔움찔 몸을 돌려 카즈를 등지고 섰다. 스르륵하고 옷이 내려가는 소리에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다;; "슈야." "으, 으응?" "넌 안 벗어?" "어... 그게... 난 들어가서..." "그래." 카즈는 그렇게 대답하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따, 따라 들어가야 하는 거지만.... 왠지 들어갈 수가.... "슈야, 왜 안 들어와?" "어? 그게..." 창피하다고, 이 자식아!!;; "아, 아냐. 안할래. 카즈 먼저 씻고...." 찰칵ㅡ. 문이 열리면서 타올을 두른 카즈가 밖으로 나왔다. 난....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후, 정말 번거롭게 하는군." "그러니까 먼저 하.... 히익!" 카즈는 나를 들쳐 업은 채 욕실로 들어와 버렸다!! 누, 눈을 어디다 둬야.... "슈야." "으응?" 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카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벗.어." .................... .................... .................... .................... .................... .................... .................... .................... .................... .................... "아, 아, 안해!! 나, 나갈래!! 이, 있다가 할꺼야!!" 나는 비명을 지르며 욕실 문을 열었다. 내 머리 위로 욕실문을 밀어닫아버리는 카즈의 손ㅡ. "어딜 도망가... 사람을 대하게 만들어 놓고." 카즈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혀서.... 부드러운 입술이 목에 닿아 버려서.... 난 풀썩 주저 앉아 버렸다!!;; "....긴장했군."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는 짓는 모습에. 난 굳어 버렸다. [어이, 심장. 지금 자네 바닥에 떨어져 있나? 방금 "툭ㅡ"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말이야.] [하하, 발가락 군. 자네가 밟고 있는 게 바로 나라네. 난 이미 터져버렸단 말일세~] [아, 그래서 몸이 굳은 거로군.] [뭐, 그렇지. 아하하~] ..............라고 혼자 떠들어댈 상황이 아니잖아!! "카, 카, 카즈?" 카즈는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채, 교복 단추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차가운 손인데.... 분명 차가운 손인데, 카즈의 손이 닿는 곳이 불에 닿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카즈가 등골을 핥아 내려가자 소름이 끼치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 하지마.... 시, 싫어...." "싫어....?" 카즈는 내 남은 옷가지를 밑으로 끌어내리며, 뜨거운 입술로 내 귓볼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솔직하지 못하군." 카즈는 짓궂게 웃으며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 .................... .................... .................... .................... .................... .................... .................... .................... .................... .......푸, 풀었다?! 다, 다 벗겨 놓고?! '써, 썩을 놈!! 그, 그렇다고, 응, 진짜로... 진짜로... 포기하냐?!;;' "이봐, 뽀송뽀송한 어린애." 한참 속으로 꽁시렁꽁시렁 거리고 있는데, 욕조 난간에 걸터 앉은 카즈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리와서 안겨봐." 카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저 놈이 돌았나!! "....시...싫어...!!" "싫어? 그럼 먼저 나가 있어. 씻고 나갈테니." 그리고나서 카즈는 샤워기를 틀고 씻기 시작했다(!) .....마, 망할 놈!! "창피하다고, 이 나쁜 놈아!!"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후다닥 달려나가.....버리지 않고 카즈에게 안겼다;; 아아, 어쩔 수 없는 끓는 피여;; "어린애는 말이야...." 카즈는 나를 벽에 밀어붙인 채, 손가락으로 내 가슴뚜껑(;;)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가끔가다 어른을 곤란하게 만든단 말이야...." ".....아.....아흑...." 내.... 내가 낸소리 아냐!!;; 누, 누가 낸 소리냐면... 그, 그러니까... 수도꼭지가 낸 소리야!!;; "유혹해 놓고 도망가 버린다던지....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서 목에 매달린다던지...." "....시, 싫....." "앙탈 부리지 말라고. 몸은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데 말이야...." 얼굴에 피가 몰린다;; 아, 핑도는 눈물이여... "....창피....하단 말이야.... 카즈 말대로.... 난 어린애잖아.... 그러니까...." 카즈는 매끄러운 혀로 내 눈물을 핥아내며 말했다. "울지마. 괴롭히고 싶어지니까." ".....이 변태!!" "그래도, 나 사랑하잖아." .....하, 할 말 없다. "....슈야...." 카즈는 등 뒤에서 나를 한 팔로 끌어안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게 해줄까?" "뭐...라고? 안 들렸.... 아아앗!!" 카즈의 긴 손가락이, 내 꼬맹이(!)를 감싸쥐었다. 머릿속이 뜨거워져서, 눈 앞이 흔들흔들거린다. "하, 하지.... 아흑.... 시, 싫어.... 하지마아... 카즈으..." "괜찮아." "안.... 안 괜찮....단 말이야.. 이 썩을...." 피, 피가 엄한 곳에 몰린다. 미치겠네... "...놔... 놔줘.... 나, 나 할 것 같....단 말이야...." "하라고 하는거야. 내가 심심해서 이러고 있겠냐." "우으윽, 시... 싫다구우... 더...더럽단 말이야, 손에..." "괜찮아. 이걸로 할꺼니까." "..........한다고?" 싱긋 웃는다. "당연하지." "미, 미쳤다!! 나 환자야!! 방금 수술 끝낸 환자라고!!" "포경 수술한거 아니잖아." "으으윽, 이.. 이상한 소리 좀 작작.... 아아흑...." "괜찮으니까 해. 그냥 들어가면 아프니까 필요하다고." "시... 싫어... 놔아... 놔달라....고.... 아아...." 히... 힘이... 빠져버리.... 허억!! 해, 해버린...거야?! 미, 미치겠다... 도, 도망가 버릴꺼야!!;; "어딜 도망가." ....라면서 나를 잡는 카즈의 팔. "아... 아아흑.. 뭐.. 뭐하는..." "힘 빼." "시, 싫어어.... 나 환자란 말이야아....!!" "꼬셔놓고 뒷걸음 치지마. 지금 화나기 직전이니까." 흑.... 카즈 화내면 무섭단 말이야. "욱.... 아파아.... 아프...." 아픈데... 아픈데... 이 야리꾸리한 기분은 또 뭐야!!;; 이상한 비명 지르는 거, 창피해서 싫단 말이야아!!;; "...아우흑... 흐읍!" 나는 이를 꽉 물었다. 그 때, 내 입술을 파고드는 카즈의 손가락.... (소, 손가락? 손가락으로 뽀뽀하자고?!;;) "... 소리... 내도 괜찮으니까..." "시.. 싫..." 기, 기절할 것 같아... "기절...하면 또 한다..." 누, 눈떠, 슈야! 오늘은 삭신 안 쑤시게 자야지!;; 뭐.... 뭔가가 들어오.... "..우우흑.... 아아.... 하우우윽...." "하아.... 하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온 몸으로 퍼지는 느낌과 함께, 나는 카즈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빠르게 움직이던 카즈의 움직임이 멈추자, 내 남은 의식은 거기에서 끊어져 버렸다. .......로 끝나버릴 줄 알았소냐!! "카, 카즈... 나, 안... 안 기절했...." "슈... 슈야?" ........라고 외친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말이야. 눈 앞이 껌껌해지고 기억이 안나는 걸 보면. 아하하하. 기절했구나. .................... .................... .................... .................... .................... .................... .................... .................... .................... .................... 이 바보같은 슈야!!;;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1 꿈뻑꿈뻑ㅡ.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새로 갈아입은 옷에서 은은한 피죤 냄새가 났다. 아니,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냄새인 것 같다. "카즈, 어디있어...." 나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탁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카즈는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긴 속눈썹이 보이도록 살짝 눈을 내리감았다. "화...났어?" "괜찮으니까 저녁 먹어." 카즈는 신문을 접고 일어났다. 나는 카즈의 등 뒤로 가,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화내지마... 응?" 카즈는 픽 웃으며, 물기가 덜 마른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 안났다니까. 내가 어린애한테 뭘 바라겠냐." 어린애.... 평소때 같으면 웃어 넘겼을 그 말이, 오늘은 유난히도 차갑게 심장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미안해.... 나, 다음에는 절대...." "괜찮으니까 무리하지마. 내 기분 때문에 널 혹사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카즈는 밥솥에서 금방 퍼낸 밥을 작은 공기에 담으며 말했다. 나는 카즈의 손을 끌어 두 손으로 맞잡았다. "미안해...." 카즈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어 내 뺨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그리고 뺨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ㅡ. "대신에, 어른이 되면 절대 봐주지 않을테니까." "....응...." 나는 조그맣게 대답하고 카즈의 품에 파고들었다. 카즈에게서 물의 향기가 났다. "이봐, 저녁은 먹어야지..." "응.." 나는 팔을 풀고 의자에 가 앉았다. 금방 끓인 국과 따뜻한 밥ㅡ. 카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저녁이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젓가락을 들면서 말했다. 카즈는 그런 나를 보고 빙긋 웃더니, 두 손을 모으고 살짝 눈을 감았다. 카즈는 무교신자이면서도 식사 전에 꼭 기도를 한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카즈가 눈을 뜨는 것을 확인하고 말을 꺼냈다. "카즈.... 나, 내일 학교 안 갈래." "왜? 많이 아픈거야?" "으응, 다리 때문에. 절뚝거리면서 가고 싶지 않아서." 카즈는 무겁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저녁에 초밥 사올테니까." "응." 카즈는, 그 날 설거지 당번은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피곤할꺼라면서 강제로 침대에 밀어넣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투정부리는 내 손을 잡아주고, 잠이 들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언제나.... 언제나..... 상냥한 사람. 난 방이 어두워 눈물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카즈는 내가 너무 행복해서 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테니까. 하루를 거른 학교는, 얼마 뒤에 있을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축구 예선, 스모 예선, 줄다리기 예선ㅡ. 이래저래 수업을 빠지다 보니 하루는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그 며칠동안, 유키에는 카즈의 아빠ㅡ다카츠 씨인가 하는 분ㅡ하고 다음 주 일요일에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왔고, 카즈는 그다지 밝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축하드린다고 전화를 했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 카오루로부터 축제에 갈테니 준비 단단히 하라는 협박편지(?)가 날아왔고.... 음, 또.... 점심시간마다, 나와 사노는 옥상에 올라와, 서로에게 연애상담을 했고... 그러다 켄지한테 들켜서 이상한 오해를 샀고... 나는 "후카다 쿄교가 아니면 안돼!!"라고 변명을 했고... 사노는 "꼬시려고 노력중인데, 잘 안돼네~"라고 말하다 나에게 몇대 얻어 맞았고...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축제 날의 아침이 밝았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2 "아자자자!!" 다카오카가 소매를 걷어붙히며 팔을 붕붕 돌리자, 켄지가 고개를 살짝 숙여 몸을 사렸다. 아직 응원도 시작 안했는데, 다카오카 녀석은 벌써부터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다. "짜잔!! 이것을 보시라!!" 다카오카는 응원석 앞에 뛰어올라가, 무언가를 쭉 펼쳐 보였다. 이마에 두를 심산으로 만든 띠인것 같은데... 중앙에 매직으로 "心勝"이라고 써 있다. "..............." "..............." 다카오카, 이 바보.... 대체 한문시간에 뭘 한거야. 그건 "필승"이 아니라 "심승"이잖아... 필승은 "必勝"이라고 써야지;; "야, 원숭이! 제발 내려와!" "너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 반 녀석들은 다카오카의 발목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다카오카는 "야, 왜 그래?"라고 하면서 "심승"이라고 쓴 머리띠를 다시 이마에 두른다;; "슈야, 애들이 왜 저러냐?" 다카오카는 팔꿈치로 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 나는 슬쩍 옆으로 물러나, 다카오카는 모르는 사람처럼 쳐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너 아직도 필(必)자하고 심(心)자를 구분 못하냐." "엥? 내가 잘못 썼어?' 다카오카는 머리띠를 풀어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내 어깨를 툭치며 소리내어 웃었다. "바보자식~ 이게 어딜 봐서 [심]이냐! [필]이지! 그렇지, 켄지?" "........저리가, 창피해." 켄지 마저도 외면을 해버리자, 다카오카 녀석... 그제서야 자기가 잘못 썼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으으음.... 이 천재께서 잠시 착각을 하신 모양이군." 순간, 우리 반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 자식을 죽여서 세계 평화를 이룩할 것인가, 아니면 불쌍한 중생 하나 구제한다고 치고 묵과해줄 것인가. 다들 그것을 고민하는 듯 했다. "에이, 뭐 어때. 다들 [필]자인줄 알꺼야." .....이봐이봐,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은 너 밖에 없어. "자자, 다들 화이팅이다!!" 어쨌든 다카오카는 그 띠를 다시 이마에 둘렀다;; "가자! 이기자! 패자에겐 죽음 뿐!" 우렁한 응원과 함께, 축제 첫째날이 시작되었다. 우리 반이 첫 번째로 한 경기는 스모 경기였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우리 반 최고의 거구인 츠카는 그의 1/2도 안되는 조그만 녀석에게 밀려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다케시에게 희망을 가져보았지만, 그것도 채 30초가 되지 않아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두 번째 경기였던 축구는, 무려 "7:0"라는 큰 점수차를 두고 이겼다. 축구가 아무리 팀웍 경기라고는 하지만, "아이카 고교"라는 이름보다 "센츠우치"라는 축구부 이름이 더 유명한, 센츠우치의 주장이 있는 우리 팀을, 2반이 이길 수는 없었다. 다카오카가 자기 입으로 "필드 위의 검은 질풍"이라고 떠벌리고 다닌 통에, 나는 그 말들의 반을 허풍으로 흘려들었었지만, 새까만 머리칼을 휘날리며 필드를 질주하는 다카오카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마치, 초원을 달리는 치타 같았다. (......타잔에 나오는 원숭이 치타가 아니라.) "다카오카, 멋지지?" 켄지는 다카오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저거 혹시, 다른 놈 아니야? 저게 어딜봐서 [심승]이라고 쓴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원숭이 다카오카라는 거야?" "쿡쿡... 저 녀석, 축구 할때만큼은 빛나는 녀석이니까." 난 그 말에는 어떤 꼬투리도 달 수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야, 봤냐? 이 몸이 7골 중에서 5골을 넣었다는 게 아니냐~ 슈야, 봤어? 나, 무지 잘했지? 그것봐, 내가 잘한다고 했잖아~" .........다카오카는 응원석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타잔의 치타로 변해버렸다. "얘들아, 잠깐 조용히 해보자." 사노는 다카오카에게 엉겨 있는 애들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한참 장난을 치던 녀석들은 웃음을 채 거두지 못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히로우 사노ㅡ. 공부 잘하고, 선생들에게서 이쁨(?)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감을 살만한 녀석이 반장의 권력(?)까지 휘두르는데, 이상하게도 이 녀석에게는 적이 없다. 적당히 반 녀석들과도 어울릴 줄 알고, 적당히 선생들과의 중재로 설 수 있는 녀석ㅡ. 게다가 이 녀석이 이렇게 씩 웃으며 청유조로 말하면, 왠지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카리스마"라는 것 자체로 보면 카즈와도 상당히 유사하지만, 느낌 면에서만큼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카즈가 사막의 왕이라면, 사노는 동방의 현자라고 할까. "슈야? 듣고있지?" "어? 아니. 딴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노는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이며 씨익 웃었다. "군, 너무 솔직하면 못 쓰지~. 거짓말 조금 해도 천당은 갈 수 있다고." "야... 목사 아들이 너무 한 거 아냐?" "아하하, 이 참에 면죄부도 팔아볼까?" "넌 지옥갈꺼다, 이 녀석아~!" "그래그래, 미인은 지옥에 더 많으니까 말이야." 사노는 쿡쿡 웃으며 대꾸하고는, 손뼉을 두어번 쳐서 반 녀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제부터 점심시간이거든? 나가서 사먹을 애들도, 되도록 1시 50분까지 들어와. 3시에 200미터 있으니까, 200미터 뛰는 애들은 조금만 먹고." "사노, 계주는 언제해?" "어디보자..... 계주는 5시니까, 조금 배부르게 먹어도 되겠네. 다카오카만큼 먹으면 곤란하겠지만." 사노는 주먹을 들어보이는 다카오카를 보고 몸사리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자자, 다들 해산! 1시 50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슈야, 가자. 저 쪽에 좋은 자리 봐뒀어." 나는 가방을 챙겨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응원석의 뒷정리를 하던 사노가 우리를 불렀다. "슈야와 그 친구들아~" "누가 그 친구들이라는거야!" 사노는 두 주먹을 들어보이는 다카오카의 목을 가볍게 조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 너희하고 점심 껴서 먹어도 될까?" "헤에? 센도들하고 안 먹고?" "응, 센도에게 애정이 식어버렸거든." 사노는, 벙진 얼굴을 하는 나를 보고는 말을 정정했다. "농담이고, 너희들하고 한번 같이 먹어보고 싶었어. 너희 그룹, 왠지 분위기가 좋아서." 다카오카는 사노의 팔을 탁 치며 씨익 웃었다. "짜식, 솔직히 말해봐. 나한테 반했지?" "아... 들켜버렸나?" 사노는 애절한(?) 눈빛으로 다카오카를 바라보며, 다카오카의 두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다카오카, 우리 금단의 사과를 먹어 보지 않을래?" "히익, 니나 쳐먹어!" "아하하~" 사노는 가방을 챙겨들며 다카오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걱정마라, 제군. 기독교에서는 동성간의 사랑이 극악죄란다." 순간, 뜨금한 나는 사노를 쳐다보았다. 사노는 그런 나를 향해 윙크(!)을 했다. "아참, 얘들아. 우리 끝내주는 미인하고 같이 점심 먹지 않을래?" "끝내주는 미인?" "응. 앞에 두고 있으면 개밥이라도 맛있게 넘어갈 것 같은 미인이 한명 있는데 말이야." 개, 개밥..... "야, 그거 혹시.... 히데야키 선생 말하는거야?" "어라? 어떻게 알았냐?" 다카오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너, 그 선생 좋아하냐? 왜 맨날 그 선생 타령이야?" 사노는 빙긋 웃으며 다카오라의 목을 한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다카오카, 질투하지마. 난 너밖에 없어." "히이이이익!! 저리가!!" "아하하, 사랑한다니까~" "난 너 싫다니까!!" 사노는 비명을 지르며 저 끝까지 뛰어간 다카오카를 보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음을 거두며 나를 돌아보았다. "슈야, 같이 갈래?" "나....?" 나는 치미를 뚝 떼고, "왜 하필 이면 난데?" 하는 얼굴로 사노를 쳐다보았다. 사노는 켄지를 살짝 돌아보며, 역시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네가 히데야키 선생님하고 제일 친하잖아. 그리고, 왠지 나 혼자 가기도 뭐하고." 내가 켄지를 쳐다보며 머뭇거리자, 사노가 켄지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슈야랑 다카오카랑 남겨두면, 다카오카가 바람 필 것 같아서 그래. 켄지군, 이해하지?" "푸... 못 말린다니까." 켄지가 두 손을 들며 말하자, 사노가 싱긋 웃으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럼, 기지에서 기다리고 있어!"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3 "조용하다..." "응, 다들 밖에 나가 있으니까." 텅빈 학교 건물 안에서는, 왠지 모를 스산함까지 느껴졌다. 겨우 벽 하나 차이로, 떠들썩한 외부와 이리도 상반되는 느낌이 들 수 있는건지. "훌쩍.... 훌쩍...." 순간 소름이 쫘악 끼쳤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맴도는 누군가의 흐느낌... "누구지?" 사노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그냥 가자." "가보자. 우리반 애일 수도 있잖아." 사노는 그렇게 말하고 흐느낌이 들려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존경해, 사노... 네 몸에는 진정, 반장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나는 나조차 이해하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사노의 뒤를 따랐다. 계단 옆에는 폐쇄된지 몇 년된 직원용 휴게실이 있었다. "드, 들어갈꺼야?" "응." 사노는 망설임 없이 휴게실 문을 열었다. 화아악, 하고 뿌연 먼지가 날렸다. "누, 누구?" 휴게실 안 쪽에서 누군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노는 손으로 거미줄을 걷으며 휴게실 안쪽으로 계속 걸어들어갔다. "히로우?" "나나세?" 사노가 걸음을 멈추는 통에, 나는 사노의 등에 콩 부딪혀 버렸다. 사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미안"이라고 말한 후,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왜소한 녀석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니?" "....악마가...." 악마? 드, 드디어 이 학교에도 "휴게실의 전설"... 뭐, 이 따위 이야기가 생기는거야? "악마라니, 자세히 말해봐." "히데야키....." 카, 카즈 얘기? "고백.... 했는데.... 아니, 하려고.... 떠밀....었어. 불쾌한 눈으로.... 만지지 말라고...." "그냥 고백만 했는데?" "....그게....." 나나세라 불린 녀석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쳐내며 말했다. "창가에.... 서 계셨.... 는데.... 바람이.... 아니, 커텐이.... 너무 예뻐서...." "끌어 안았지?" 내가 말했다. 나나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잠시 후, 녀석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게.... 나, 나는.... 나, 나쁜 의도로 그런 게...." "히데야키 선생님, 결벽증 있어." 이번엔 사노까지 나를 올려다 보았다. 헤에, 동방의 현자가 "설명을 해주시오."하는 얼굴로 쳐다보니 왠지 우쭐해지네. "누군가하고 접촉하는 것 자체를 싫어해. 그래서 애들 손에 반창고를 붙여주기만 해도 손을 씻는거야." "그....래도...." 나는 나나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녀석의 얼굴은 먼지투성이였는데다가, 눈물 때문에 더 꼬질꼬질해져 있었다. "결벽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이 닿는 자체가 송충이가 등 위를 기어올라오는 것처럼 불쾌한 일이래. 그러니까, 히데야키 선생님도 반사적으로 널 밀어냈던 걸꺼야." "...그...럴까...?" 나는 손등으로 녀석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조금은 이해해 줘야지." 나나세는 대답 대신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본인이 제일 힘들꺼야. 그런 이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노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노는 아는 걸까. 이런 말들이 내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 이제 괜찮아... 고마워...." 나나세는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사노도 녀석을 따라 일어섰다. "저어..... 너, 하나마치 슈야지...?" "어라?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어?" 나나세는 완전히 눈물이 걷혀진 얼굴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유명하잖아, 너." "내, 내가 왜?" 설마, 싸가지 없다고 유명한..... "1학년 때, 전학와서.... 이지메 당하던 쿄스케를 도와줬었지?" 아아.... 쿄스케. 폐쇄적인 성향이 있기는 했지만, 좋은 녀석이었는데. "또, 학교 옥상에서 자살하려던 아키라도 구해줬었고." "아, 그건 우연이었어. 사실은 낮잠 자려고 옥상에 올라갔던 건데...." "어쨌든 대단하잖아. 그런거..." "그럼. 자살 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는 거, 보통 심리 치료사들도 어려워 하는 일이니까." 사노가 녀석의 말에 덧붙이며 빙긋 웃었다. 사악해 보여, 이 녀석아;; "그리고 자퇴 하려던 나카츠를 막아준 것도 너였지?" "에에.... 같은 반 친구였으니까." 이거 왠지 심문 당하는 기분인데?;; "소문 듣고, 왠지 그냥 만나보고 싶었어." 나나세는 콧물을 훌쩍이며 멋쩍게 웃었다. "나도, 영혼을 씻고 싶었거든." "여, 영혼? 갑자기 왠...."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많이 괜찮아 졌어." 나나세는 휴게실 문을 열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참. 아키라, 내 친구야." "아... 그래? 잘 지내고 있지, 그 녀석?" "응. 녀석이 너한테 전해주라더라. 그 말.... 정말 고마웠다고." "아아...." "그럼. 나중에 봐." 나나세는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는, 복도 끝으로 뛰어나갔다. 녀석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고 서 있던 사노는, 내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그 말이라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니까.... 계속 그렇게 살아줘.]" 내 말에, 사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녀석을 향해 웃어주었다. "나도 누구한테 들은 말이야." "흐음... 상당히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네." "응,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 사노는 "엄마? 아빠?"라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그냥 웃음으로 떼워 버렸다. 이름도 아껴 말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고 있으니까. "아, 벌써 다 왔네. 슈야, 심호흡!" "응!" 내가 크게 심호흡을 하자, 사노가 가볍게 노크를 하고 양호실 문을 열었다. 순간, 열려진 창문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카....ㅈ" 보드라운 바람ㅡ. 가늘게 흔들리는 머리칼ㅡ. 몸을 감싸고 도는 커텐 자락을 붙잡은 긴 손가락ㅡ. 어느 아득한 곳을 향한 눈빛과 온화한 미소ㅡ. 고개를 돌려보니, 사노도 나처럼 넋이 나간 얼굴로 카즈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 카즈는 창문을 닫으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우리의 표정이 영 이상했는지, 카즈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가득했다. "환자?" "예? 아, 아뇨." 카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본래의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볼 일 없으면 나가봐. 젊은 청춘들의 고민 상담은 해줄 수 있지만, 끓는 피로 안겨 오는 건 사양하니까." "아하하...." 사노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어, 선생님. 괜찮으시다면....." "안 괜찮아." 허.... 거 참, 사람 무안하게 만드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는 사노의 앞에 나서서 말했다. "선생, 점심 같이 먹자." "하나마치 군. 나는 [선생]이 아니라, [선생님]이야." "싫어. 선생할꺼야." 카즈는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 웃었다....? "....난 싫으니까, 뽀송뽀송한 어린애는 뽀송뽀송한 어린애들하고 놀아." 카즈는 뒤늦게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사노는 맥이 탁 풀린 얼굴로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냥 가자." "싫어, 포기 안해." 나는 사노의 손을 내려놓고 카즈의 앞에 아주 가까이 섰다. 카즈는 싸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내가 등으로 사노를 가리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 웃었다. 대단한 표정관리;; '카즈, 점심 같이 먹자, 응?' '다른 선생들하고 먹기로 해서 안돼.' '....나보다 선생이 좋지?" '바보냐.' 카즈는 슬쩍 몸을 돌려 사노를 쳐다보고 말했다. '바람이나 피지 마,' '싫어.' '.....너.....' '그러니까 같이 가자, 응?' 카즈는 하소연하는 얼굴과, 곤란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나, 감시해야지. 바람 피나, 안 피나.' 카즈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카즈를 향해 헤죽 웃어 주었다. '....넌 악마야...' '응, 고마워~' 카즈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딱 30분만이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사노의 눈에 존경(!)의 빛이 흘렀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4 난 카즈의 옆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쭉 뻗은 콧날이라던지, 긴 속눈썹에 가려진 검은 눈이라던지, 적당히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라던지.... 그런 것들을 전혀 눈치보지 않고 오래도록 쳐다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다카오카, 저 자식은 왜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거야? "히데야키 선생님." 카즈는 다카오카의 시선을 싹 무시하고 바나나를 까고 있다. 다카오카의 눈꼬리가 쓱 올라갔다. "선생님이 왜 이 곳에 계신 건가요? 선생님은 선생님들끼리 식사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오키 군." 카즈는 천천히 다카오카를 돌아보았다. 다카오카는 순간 흠칫 하는 듯 했지만, 이내 눈을 누릅뜨고 카즈의 시선을 마주 받아냈다. 카즈는 그런 다카오카를 향해 빙긋... 아니, 생긋(!) 웃어주며, 까다 만 바나나를 내밀었다. "바나나 좋아하지? 원숭이니까." 카즈의 미소를 보고 정신을 못 차리던 다카오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즈는 가볍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앉아. 원숭이의 불안정한 직립보행을 지켜봐야 하는 건, 퍽 짜증스러운 일이니까." "제가... 제가 왜 원숭이라는 겁니까!!" 켄지는 웃음을 참으려고 교복을 꽉 쥐고 있었지만... 픽픽 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차라리 사노처럼 대놓고 웃지...) "오오키 군."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으니." ".......화를 내니 귀엽군." 카즈가 픽 웃으며 말하자, 사노 녀석은 보는 사람이 시원할 정도로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다카오카는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뭐라 반박도 못하고 입만 벙싯 거렸다. "오오키 군, 열이 있는 것 같은데?" "바, 바보 취급 하지 마십시오!! 제가 선생님의 도발에 넘어갈 것 같습니까?!" "도발?" 카즈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대로 흥분하지 말라고. 너같은 어린애를 유혹할 생각은 없으니까." ........당신, 그 행동 자체가 유혹이야;; 위험하다고;; "선생님이면 선생님답게 좀 행동하십시오!! 그렇게 아무한테나 가볍게 행...." "다카오카." 켄지는 웃음을 참느라 새빨개진 얼굴로, 다카오카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쿡... 쿡쿡... 코피나 닦고 얘기해." 다카오카는 멍한 얼굴로 카즈를 쳐다보다가, "젠장, 이러다 미쳐버리겠어!!"라고 비명을 지르며 어디론가로 달려나갔다. 카즈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바나나를 한입 물었다. "쯧쯧, 이래서 어린애들은." "선생님, 너무... 쿠쿡.. 하셨어요." 사노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카즈는 싸늘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뭘." "하하... 뭐, 웃는게 죄일 수는 없지만. 한창 피끓는 저희에게는 치명적이라구요." "치명적이면 어쩔건데. 다 늙은 남자 선생을 덮치기라고 할테냐?" 지, 직설적이다;; "뭐.... 깔려주신다면." 사노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켄지가 입에 문 사과를 툭 떨어뜨렸다. 카즈는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을 짜증스럽게 쓸어올리며 말했다. "목사 아들, 넌 지옥 갈꺼다." "아아, 저에겐 면죄부 100장이 있어서..." "면죄부로도 용서 안돼. 난 악마니까." 사노는 놀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 별명, 알고 계셨어요?" "지겹게 불러대는데 모를리가 있냐." 켄지는 떨어뜨린 사과를 치우며 정자세를 갖추고 말했다. "저어, 히데야키 선생님." "말해." "선생님은 늙지 않으셨습니다." 켄지의 말에, 카즈는 잠시 흥미로운 물건을 보는 듯한 얼굴로 켄지를 바라보았다. "소마군이 개구리 해부 실험을 할때, 나는 인체 해부 실험을 하고 있었지. 소마군이 태교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난 구구단을 깨우쳤고 말이야." "..............." 켄지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하지만 2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시지 않으세요." "소마군은." 카즈는 딸기 꼭지를 떼며 빙긋 웃었다. "무례한 원숭이나, 타락한 목사 아들과 어울리기엔 아깝군." "아... 오해를 하셨군요. 전 다카오카나 사노 친구가 아니라, 슈야 친구랍니다." "슈야? 아, 하나마치 군 말인가?" 카즈는 시치미를 뚝 떼며 그렇게 말하고는 이렇게 대꾸했다. "하나마치 군은 악마야. 사악하니까." "....당신 입에서 그런 말 들으니까 상당히 불쾌한데?" "하나마치 군, 난 자네 마누라가 아니야. [당신]말고 [선생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까짓 것 불러주지, 뭐. "선생." "[님]은?" "놀러갔어. 다카오카 네." 내 말에 사노와 켄지가 킥킥 거리고 웃었다. 카즈는 짧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라? 카즈야 선생님!" .....뭐지. 이 반갑지 않은 목소리는? "유키?" 사노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히로는 방긋 웃으며 사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는, 누가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카즈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까부터 찾았는데 여기 계셨네요~" ".....너 말이다." "예, 말씀하세요~" ".....누가 네 멋대로 카즈야 라고 부르라고 했냐?" 카즈는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히로를 노려보며 말했다. 히로는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요. 싫으세요?" "싫어." "죄송해요. 다음부턴 안 그럴께요." 히로가 순순히 사과를 하자, 카즈는 별 말 없이 계속 딸기의 꼭지를 떼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히로를 바라보고 있던 사노는, 말 걸 기회가 생기자, 재빠르게 히로에게 말을 걸었다. "유키, 너네 스모 어떻게 됐어?" "7반한테 졌어. 걔네, 정말 잘하더라." 히로는 아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너네 축구 이겼지?" "응, 아무래도 잘하는 녀석이 있으니까." "헤에.... 그거 다카오카를 말하는 거지? 그 녀석, 축구할때만큼은 반짝 거리는 녀석이니까." 히로는 즐거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 사노가 골 넣은 것도 봤어. 꽤 하던데?" "내 골이야 우연이지, 뭐." "아냐. 상당히 깔끔한 플레이였다고." 히로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나마치, 내일 까페 준비는 다 되어 가니?" "응." 히로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긴장하는 게 좋을꺼야. 우리도 열심히 할꺼니까." "유키, 너네 기모노 입는다며?" "응, 사사키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셨어. 붉은 바탕에 푸르스름한 꽃이 새겨진 천으로 만든건데... 상당히 예뻐." 사노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우리 쪽도 만만치 않다고. 내 동생 아야가 피아노 콩쿠르 때 입었던 보라색 드레스 알지?" "아아, 상당히 화려하고 예뻤지." "슈야가 그걸 입거든. 안 입는다고 빽빽 거리는 걸, 얼마나 달랬는지 몰라." "슈...야....?" 히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사노가 내 어깨에 얹었던 손을 내리며 변명조로 말했다. "아, 이름을 부른진 며칠 안됐어. 까페 준비하면서 자주 얘기도 하게 되고, 그래서..." "쿡쿡, 그래서 센도가 그렇게 얼굴이 부었던 거구나?" 히로는 그늘을 몰아내며, 다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예쁘겠다, 하나마치, 얼굴도 하얗고 공주님 같으니까." "..............." "아앗, 화났니? 미안미안, 칭찬의 뜻으로 말한 거였는데." "공주라면.... 히로 쪽이 더 어울려." 내 말에, 히로는 방긋 웃으며 사노를 향해 말했다. "내가 공주하면.... 너, 왕자해라?" "나?" "응, 조금 안 어울릴테지만.." 사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시켜주면 좋지. 망나니 왕자라도, 공주하고 결혼할 수 있으니까." 히로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 우리 농담이 너무 심했다. 너네 아버지가 들으시면 대단히 화를 내실껄." "...농담인데 뭘..." "아.... 그런가." 그러고 나서 침묵ㅡ. 켄지는 이 불편한 분위기가 힘에 겨웠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비실비실 일어섰다. "나, 다카오카 찾으러 갔다올께.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안 오네." "에에.... 그럼 나도 그만 갈께." 히로는 켄지를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사노는 히로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가는 거야?" "응, 장애물 달리기 준비도 해야 하니까." "내가.... 도와줄까?" "아, 정말? .....아, 사노는 3반 애들 집합 시켜야 하잖아." 나는 사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그 정도라면 나도 해줄 수 있어." 사노는 히로를 등지로 일어나며 나를 향해 윙크를 했고, 나는 히로가 눈치채지 못하게 브이자를 내보였다. "그럼 부탁해, 슈야." "걱정마." 사노와 히로가 멀어지자, 카즈가 나무에 기대 앉으며 눈을 감았다. "요즘 어린애들은, 선생 앞에서도 연애질이군." "괜찮잖아. 귀여우니까." 카즈는 픽 웃으며, 내 머리를 부시시 하게 쓸었다. "대체 누가 누구를 보고 귀엽다고 하는 거냐." "앗, 하지마. 땀에 젖어서 지저분하단 말이야.." "괜찮아, 땀 정도는." 카즈는 자신의 결벽증을 잊은 것처럼 그렇게 대꾸하고는, 슬쩍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넌, 내가 악마를 하면 뭘 할꺼냐?" "나? 으음...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나타난 용사?" "용사?" 카즈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나는 카즈의 옆에 나란히 기대며 말했다. "악마에게 잡혀간 아가씨와의 사랑보다,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나타난 용사와의 사랑이 더 멋지잖아." 카즈는 피식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용사하지 말고 하느님 해라. 용사는 언젠가는 죽지만, 하느님은 영원히 죽지 않잖아." "헤에, 그럴까." 나는 나무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악마와 하느님의 사랑이라... 그것도 멋지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5 들어가봐야 한다는 카즈를 10분이나 더 붙잡아 둔 나는, 1시 40분에서야 뿔뿔이 흩어진 반 녀석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녀석들이 사노의 말을 기억한 까닭에, 응원석에 늦게 나타난 녀석은 7명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2시도 안되어 다 집합한 반 녀석들과 달리, 사노는 2시 10분이 넘어서야 응원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얘들아, 잠깐만 여기 좀 보자!" 사노가 손뼉을 치며 말하자, 반 녀석들의 사노에게 야유를 하며 쓰레기를 집어던졌다. "뭐야, 느림보 사노 아냐!" "대체 얼마나 밥을 쳐먹었길래 이제야 나타나냐!" "아아, 미안미안. 내 엉덩이가 원체 무겁잖냐~" 사노는, 반 녀석들의 야유에 가볍게 화답해주고는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2시 20분쯤에 체육관에서 농구 결승이 있는 거 알지?" "응, 그런데 미무라하고 토야는?" "그러고 보니 걔네들 안 보이네?" "걔네들. 주전선수 아니야?" 사노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귓볼을 만지작 거렸다. "그렇긴 한데.... 걔네들 병원에 갔거든." "병원? 갑자기 왜?" "미무라, 아까 축구 뛰다가 발목 다쳤잖아. 그게 잘못된 모양이야. 그래서 토야가 미무라하고 같이 병원에 갔어." "야... 걔네들 없으면 어떡해. 토야 대신이야 세이지가 한다고 해도, 미무라를 대신할 녀석은 없다고." "그래, 그 녀석은 농구부니까 말이야." 사노는 다시 가볍게 손뼉을 쳐서, 술렁거리는 반 녀석들을 집중 시키며 말했다. "얘들아, 잠깐만 조용히 하자. 2시 20분까지 선수 선발해야 하니까, 빨리 정해야 하거든? 혹시 이 중에, 전에 농구 한적 있는 사람?" "야, 잠깐만. 우리 반에 카사구치 중학교에서 농구부였던 녀석 있지 않아?" "카사구치? 거기 농구로는 도내 최강이잖아. 그런데 그런 녀석이 우리반에 있다고?" "그거, 혹시 미무라를 말하는 거 아니야?" 센도는 생수를 빙빙 돌리며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거 슈야인데." 이가 꽉 물린다. "하나마치? 하나마치는 환자잖아." "야.... 무릎 수술 때문에 달리기도 못한다고 했는데, 농구처럼 격한 운동을 어떡해 하겠냐." "그래, 하나마치는 안돼. 무리하면 일 난다고." ....난 환자가 아니야. "잠깐만 기다려." 나는 센도가 던진 생수를 가방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노는 내 팔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슈야, 어딜 가려고?" "양호실에." "양호실? 거긴 왜?" "무릎에 붕대 감고 올께." 내가 응원석에서 내려오자, 다카오카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바보 같은 짓 하지마. 너, 평생 불구로 살려고 그래?" "오버하지마. 그것 조금 뛴다고 해서 불구가 된다거나 하지는 않아." "하지만 넌 환자잖아." 나는 다카오카의 팔을 가볍게 뿌리쳤다. 다카오카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무모해져 있었다. "걱정마. 중학교 때도 충분히 했었어." "그건 중학교 때지. 게다가 그 때는 무릎 수술도 하지 않았잖아." "시끄러워. 내가 한다면 하는거야." "이 바보야, 그러다 피라도 보면...." "환자 취급 하지마...!!"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 걸까. 반 녀석들의 시선은 전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여기 살아 있어. 그러니까 죽은 사람 취급하지마."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다카오카를 밀어내고 본관 건물로 뛰어갔다. 심장이, 무언가로 꽉 쥐어누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내가 혈우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3살 때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녀석이었다. 아니, 오히려 보통 녀석들보다 뛰는 것을 좋아해서, 체육대회 때 세 경기 이상 참여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부모님들은, 내가 혈우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운동하는 것을 막거나 하지 않았다. 그 분들은 내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봐, 늘상 여기저기 다쳐서 돌아오는 나를 말없이 보살펴 주었다. 그 해 겨울에, 나는 농구를 하다 손등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괜찮겠지, 하고 두었던 출혈은 몇 시간동안 계속되어서, 결국 나는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 때부터였다. 부모님이 내가 운동을 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은. 땀에 젖은 채로 차가운 바람을 맞는 즐거움ㅡ.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중학 농구부에 들어갔다. 물론 농구부에는 내가 혈유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도 나의 부모님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테니까. 나를 믿고, 나와 함께 뛰어주는 부원들에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즐거웠다. 공을 만지는 것이ㅡ. 그리고 반질반질한 코트 위를 뛰는 것이ㅡ. 그 해 2학기 말쯤에, 나는 무릎에 피가 고여 그것을 빼내는 수술을 받았다. 숨기려고 했던 일이었지만, 진실은 퍼지고 퍼져... 마침내 그 사실은 농구부 주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수술 후, 처음 학교에 등교하던 날ㅡ. 나는 주장으로부터 부를 탈퇴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 그 날이 처음이었다. 분함 때문에 운 적은... "선생, 들어갈께." 나는 노크를 하려던 손을 내리고 양호실 문을 열었다. 책을 읽고 있던 카즈는 고개를 들며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슈야?" "........나, 무릎에 붕대 감아줘." 카즈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이리와 앉아." 한동안,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카즈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내 눈을 쓸었다. 그의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났다. "왜 우는 지는 모르겠지만." 울고.... 있었나. 나약하구나, 나라는 녀석은.... "아파서 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카즈는 가볍게 내 무릎을 눌러보며 말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떡거렸다. "그런데 붕대는 왜? 혹시 농구 시합이라도 나가려는 거야?" 나는 카즈의 눈을 피해, 고개를 떨구며 짧게 대답했다. "......응... " "그래, 알았어." 카즈는 그렇게 대답하고 서랍에서 붕대를 하나 꺼내들었다. 사각사각 하고 무언가를 자르는 소리가 난 후, 차갑고 보드라운 붕대가 무릎에 닿는 느낌이 났다. ".....농구 하는 거, 말리지 않아?" "왜?" "왜라니. 난 환자잖아." 카즈는 내 무릎에 붕대를 감으며 픽 웃었다. "환자? 네가 무슨 환자냐?" "....상처나면 안되는 환자잖아." "그거라면 다 마찬가지야. 이 세상에 상처나서 괜찮은 사람은 없어. 네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른 점이라면, 그 상처가 조금 늦게 치유된다는 것 뿐이야." 카즈는 붕대 끝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며 말했다. "휠체어 타고도 하는 농구야. 사지 멀쩡한 네가 두려워 할 필요는 없잖아?" "....그거와는 달라..." "다르지 않아." 카즈는 손으로 내 양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 "너, 농구 잘하잖아. 그러면 된 거 아냐?" ".............." "좋아하잖아. 그러면 된거 아냐?" ".........응.." 카즈는 빙긋 웃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본때를 보여주고와. 내 악마의 힘을 불어넣어줄테니." "응." 나는 카즈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무릎에 감은 붕대가 조여오는 만큼, 꽉 조여오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6 체육관 안으로 발을 내딛자 열띤 응원의 함성이 웅웅 거리며 들려왔다. 나는 가만히 딱딱한 바닥을 굴러보았다. 탁탁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무릎에 감은 붕대가 조여왔다. "사노." 선수들에게 등판을 나누어 주고 있던 사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씩 웃으며 사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줘." "슈야..." "오랫동안 쉬어서 몸이 말을 안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실망시키지는 않을테니까." 구석에서 등판을 입던 다카오카는 사노의 어깨를 툭 치며 나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다카오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카오카, 날 막을 생각이라면..." "막을 생각 따윈 없어." 나를 등진 다카오카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형편 없지만, 봐줄만은 하니까." 사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등판을 건네주며 말했다. "무리가 간다 싶으면 곧바로 선수 교체해. 우리 반 녀석들, 믿을만한 녀석들이니까." "응." 나는 사노에게 고개를 끄떡여준 후, 여전히 나를 등지고 있는 다카오카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다. "가, 갑자기 뭐야...!!" "형편 없다는 말, 후회 하게 해주지." 나는 다카오카에게 혀를 내밀어 준 후, 센도가 던진 농구공을 건네 받아 손가락 끝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이 감촉ㅡ. 정말 오랜만이다. "슈.야.군." 센도는 내 이름을 딱딱 끊어 부르며, 볼을 향해 손을 뻗혔다. 나는 몸을 숙여 낮게 드리블 하면서 센도를 재꼈고, 센도는 빠르게 돌아 내 앞을 막으며 씨익 웃었다. "우리 오랜만에 한번 엉겨볼까?" "흐응, 애송이 주제에." 센도는 내 볼을 쳐내며 왼쪽으로 빠르게 뛰었다. 나는 센도의 측면으로 파고들어 볼을 빼앗기 위해 팔을 뻗혔다. 센도는 내 팔목을 가볍게 움켜쥐며 히죽 웃었다. "오랜만인데? 재수없는 슈야 모드." "그럼, 그 동안은 뭐였는데?" "병약한 공주 모드." ".........미친놈." 나는 센도의 발을 짓밟아 뭉개며 볼을 스틸했다. 센도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이봐, 아가씨. 너무 과격하잖아?" "흐응.... 내가 아가씨로 보인다 이거지?" 나는 볼을 집어던지며 센도의 목을 팔로 끌어안았다. 팔에 힘을 주자, 센도가 켁 하는 소리를 내며 내 팔을 풀어내려고 바둥거렸다. "형님한테 까불면 안돼지. 안 그래?" "크.. 커억..." "너 따위를 상대하기엔, 내 다섯 손가락이 아까워." "아....아잉..형님~" 으드드드.... 나는 센도를 탁 밀어내고, 팔에 돋은 소름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아하하하, 내 애교 죽이지?" "....죽어버려;;" 나는 센도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어 보인 후, 바닥을 뒹굴고 있는 농구공을 주워 들었다. 삐익ㅡ. "양팀 선수들 중앙으로!" 드디어 시작이다. "가자! 이기자! 패자에겐 죽음 뿐!" 우리는 손을 모으며 소리치자, 관중석에서 "가자! 이기자! 패자에겐 죽음 뿐!"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우리 반 녀석들은, 우리들이 관중석을 돌아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단순무식 다.카.오.카!!" "카리스마 히.로.사.노!!" "무적치한 이.카.리.센!!" "철판얼굴 사.츠.마.키!!" "예쁜형님 하.나.마.치!!" 반 녀석들의 응원구에, 우리는 잠시 벙진 표정을 지었다. 언제 저런 걸 준비한거야?;; "야, 내가 왜 [센]이냐;;" "4글자 맞추느라 그랬지, 뭐. 그러는 나도 성이 [히로]인걸;;"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이 악문 소리로 말했다. "........예쁜 형님이 뭐야, 예쁜 형님이......!!" 사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나마 [예쁜공주]가 아닌 게 다행이지 않아?" "......사노, 너도 맞고 싶은 거냐?" "아잉, 형님~" ....................... ....................... ....................... "아하하~ 센도한테 좋은 거 배웠지?" ".....센도 이 자식!! 미친 짓만 가르치고 있어!!" 사노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참아참아~"라고 말했고, 센도는 온갖 요염(?)한 포즈를 지으며 애교(?)를 떨었다. "각팀 대표선수 앞으로!" 심판의 말에 다카오카가 센터라인으로 나아갔다. 나는 다카오카의 어깨를 뒤로 잡아 빼고 앞으로 나아갔다. "야, 너...." 센도는 다카오카의 머리를 팔꿈치로 찍으며 말했다. "보고만 있어. 저 자식, 점프력 하난 끝내 주니까." 센도, 네가 사람 볼 줄 아는구나. 나는 내 앞에 마주선 장신의 꼬마녀석을 바라보았다. "여어, 꼬마~" "누가 누구보고 꼬마라는거야;;" 그 놈은 당황한 얼굴로 대꾸했고, 나는 손가락으로 녀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끄러. 내가 꼬마라면 꼬마인 줄 알아." 삐이이이익ㅡ. 나는 무릎을 가볍게 낮췄다가 위로 뛰어올랐다. 탁ㅡ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볼의 꺼끌꺼끌한 표면이 느껴졌다. 타앙 하는 소리와 함께 볼이 바닥을 튀어오르자, 마키가 볼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익ㅡ. 난데없는 심판의 호각소리에, 우리는 우뚝 멈춰서서 심판에게 고개를 돌렸다. 심판을 주먹을 번쩍 들며 오른손을 들었다. "바이얼레이션!" 심판의 말에 서클 안에 들어가 있던 13번 녀석이 손을 들었다 놓았다. 센도는 빙긋 웃으며 그 녀석을 향해 이죽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 혹시 농구 처음하니? 내가 가르쳐 줄까?" "..............." "점프볼할때, 점퍼 말고 다른 선수가 서클 안에 들어가면 바이얼....." "시끄러워!!" 13번 녀석은 인상을 쓰며 자리로 돌아갔고, 마키는 "호호~"하고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 성질하고는~ 참 재수없다, 그렇지?" .......같은 편이지만, 너희가 더 재수없다;; "간다!!" 내가 볼을 던지자, 마키가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3번은 벌써 골밑에서 수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마키가 다카오카에게 패스를 하자, 다카오카가 훅슛ㅡ몸은 움직이지 않고, 손목 스냅만을 이용하여 짧은 거리에서 하는 슛ㅡ을 시도했다. 티잉ㅡ. 볼이 어이 없는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가자, 사노가 재빨리 점프에 볼을 잡아냈다. 곧 사노의 주위에 세 녀석들이 들러붙었고, 사노는 패스할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사노!" 내가 손을 들며 소리치자, 사노가 다카오카에게 볼을 패스하며 소리쳤다. "거긴 슛하기에 너무 멀어!" "시끄러워!" 나는 다시 다카오카를 향해 손을 들며 다카오카를 불렀다. 다카오카는 빠르게 돌아 두 녀석을 재끼며 센도에게 패스했다. "거긴 무리야!" "시끄럽다니까!" 센도는 한 녀석을 재빠르게 재끼며 나에게 패스했다. 녀석의 눈이 나를 직시했다. '널 믿어.' 쳇쳇, 중학교 때엔 날 버린 주제에. 나는 가볍게 점프에 훅슛을 쏘았다. 노마크 였기 때문에 슛은 안정했다. 척ㅡ. 볼이 들어가자 "삐이이익ㅡ"하는 호각소리가 났다. 기뻐할 새도 없이, 나는 재빨리 반대편으로 달렸다. 내 스피드는 사노나 다카오카에게 한참 뒤지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 어려울 것이었다. "온다!" 순식간에 자리를 잡은 사노가, 1반 녀석들을 맞이하며 소리쳤다. "다카오카!" 13번 녀석이 무섭게 수비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하자, 다카오카가 뛰어나가 녀석을 마크했다. 13번 녀석은 페인트ㅡ상대를 속이는 것ㅡ로 다카오카를 가볍게 재끼며 골 밑으로 파고들었다. 처억ㅡ. 삐이이익ㅡ. 점수판에 숫자가 올라갔다. "어디 가르쳐줘 봐." 13번 녀석은 재수없게 웃으며 말했다. 사노는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짜증나는 녀석~" ........사노, 눈이 안 웃고 있어;; "가자!" 사노가 볼을 잡자 1반 녀석들이 재빨리 수비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다카오카 녀석은 벌써 1반 녀석들의 수비대형에 파고들고 있었다. 다카오카가 미키에게 볼을 패스하자, 미키가 골 밑에서 슛을 시도했다. 티잉ㅡ 하는 소리를 내며 볼이 튕겨나가자 사노가 다시 볼을 잡아 센도에게 패스했다. 깔끔한 슛ㅡ. 삐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볼이 다시 1반에게 넘어갔다. 나는 5번의 뒤를 쳐 볼을 스틸한 후, 사노에게 볼을 돌렸다. "나이스 하나마치!" 미키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사노의 볼을 받았다. 미키가 센도에게 패스를 하자, 센도가 공을 받자마자 나에게 패스했다. 나는 가볍게 골을 넣은 후, 수비 대형으로 돌아가며 센도에게 소리쳤다. "썩을 놈, 제대로 좀 해!" "예에, 예에~" 타앙ㅡ 하고 공이 손바닥에 착 붙는 소리와 함께 수비 대형으로 돌아가던 우리반 녀석들은 다시 방향을 틀었다. 23번의 공을 스틸한 사노가 나에게 패스를 했다. .....여기에서도 할 수 있을까? 1반 녀석들은 내가 패스를 할 줄 알고 다른 녀석들을 마크하기 위해 뛰어가고 있다. 그래, 아까도 성공했는데 이까짓것쯤.... 나는 등 뒤에서 스틸을 감행하는 한 녀석을 따돌리고 힘차게 점프했다. 처억ㅡ 삐이이이익ㅡ "3점 슛의 왕, 하나마치 슈야!" "....띄우지 마, 미친 놈아." "헐, 이놈은 칭찬을 해줘도 욕이네." 나는 킥킥 거리며 센도를 걷어차준 후, 본 대형으로 돌아왔다. 타앙, 타앙 하는 드리볼 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망할, 또 13번 놈이냐." "내가!" 사노는 짧게 외치며 13번의 정면을 마크했다. 13번이 5번에게 패스를 하자, 노마크인 5번인 훅슛을 시도했다. 망할, 노마크에 훅슛이면 먹혔.... 티잉ㅡ. 하늘이 도왔는지 볼이 튕겨져 나왔.... 처억ㅡ 삐이이이이익ㅡ. .......지만 골 밑에 있던 13번 녀석의 망할, 팁 인ㅡ 오펜스 리바운드에서 손끝으로 살짝 밀어넣는 슛ㅡ이 들어가며 호각이 울었다. 저 놈, 만만히 볼 녀석이 아니네. "슈야, 무릎은?" "괜찮아." 나는 벌써 센터라인을 넘고 있는 다카오카에게 볼을 패스했다. 그 때, 터억ㅡ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내 무릎을 찍어 내렸다. 순간, 나는 무릎을 감싸며 주저앉아 버렸다. "우욱... 이 썩을...!!" 삐이이이익ㅡ. "블로킹!" "아아, 미안하게 됐네. 무릎이 약.한.지 몰랐어." 13번은 픽 웃으며 말하자 사노가 굳은 얼굴로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센도는 사노의 어깨를 끌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만해." "저 녀석, 고의였어!! 우리가 한말을 듣고 일부러...!!" "그러길래, 누가 비리비리한 놈을 시합에 내보내래?" 13번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나는 찌이이잉ㅡ 하고 울리는 무릎을 움켜쥐고 일어나 녀석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없애버린다, 13번." "큭, 계집애 같이 생겨서 빽빽대긴." 다카오카가 볼을 내던지며 13번에게 달려가자, 마키가 재빨리 다카오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카오카는 마키의 팔을 꽉 움켜쥔 채 소리쳤다. "한마디만 더 해봐, 죽여버릴테니!!" "오, 이게 누구야. 센츠우치의 주장 오오카 다카오카 아니야? ......넌 얌전히 축구나 할것이지, 왜 코트에 까지 와서 지랄이냐?" "그만해, 다케조." 23번이 13번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거기 무슨 일이야!!" "....아닙니다." 나는 13번을 밀쳐내고 프리드로우 자리로 발을 돌렸다. 젠장, 무릎이 시큰시큰 거린다. 삐이이이익ㅡ. 나는 가볍게 드리블을 하고 골대를 직시했다. 볼을 던지려던 찰나, 양 쪽에서 수근거림 같은 게 들려왔다. "걱정마, 사노. 저 녀석, 프리드로우 같은 것 놓친 적 없으니까." "아니, 그게 걱정이 아니라...." 나는 팔을 내리며 사노와 센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당사자 앞에 두고 뒷말하지마. 나, 아직 멀쩡하니까." 내 목소리가, 내 귀로도 싸늘하게 들렸다. 사노의 얼굴이 굳은 얼굴을 보니, 왠지 화풀이 한 기분이 들어서 미안해졌다. 하지만....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처억ㅡ 삐이이이익ㅡ 나는 다시 공을 건네받고, 두어번 드리블을 했다. "슈야." "왜."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대꾸가 튀어나왔다. 사노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체육관 입구를 가리켰다. "............." 입구에는 카즈가 서 있었다. 뒤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왠지 그가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골대로 눈을 돌렸다. 처억ㅡ 삐이이이이익ㅡ 호각소리와 함께 1반 녀석들이 빠르게 오펜스를 들어왔다. 난 재빨리 13번의 앞을 가로막았다. 슛인가, 아니면.... 녀석이 점프를 하자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해 버렸다. 순간, 볼이 내 바로 옆에 서 있던 5번에게 패스되었다. 처억ㅡ 삐이이이이익ㅡ 볼이 골대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사노가 반대편 코트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카오카가 그 뒤를 따랐다. 아직 1반 녀석들은 수비 대형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찬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타앙ㅡ 23번이 공을 가로채어 우리 쪽 코트로 달렸다. 우리 쪽 녀석들은 이미 센터라인을 넘어서, 이 쪽에 남아 있는 거라곤 오직 나 하나 뿐이다. '막을 수 있을까.' 나는 바닥에 발을 세게 굴렀다. 쿵쿵ㅡ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에 통증이 왔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나는 고개를 돌려 카즈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23번을 맞기 위해 뛰어나갔다. 23번은 주춤하다가 뒤쪽에 있는 17번에게 패스를 했고, 17번은 벌써 복귀한 다카오카에게 막혀, 다시 23번에게 패스를 했다. "....안 비킬거야." 23번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이런 틈새를 보이다니, 바보. 타악ㅡ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볼이 손바닥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센터라인에 서 있는 센도에게 볼을 던졌다. 센도가 두 팔을 내밀어 공을 잡으려는 순간, 5번이 볼을 가로채 그 자리에서 점프를 했다. '들어가지 않아, 들어가지 않아, 들어가지 않는다고!' 처억ㅡ 삐이이이이익ㅡ "빌어먹을." 다카오카는 낮게 으르렁 거리며 무겁게 드리블을 했다. 벌써 1반 녀석들이 자리를 잡아버려서 속공은 힘든 상태였다. "패스." 내 말에 다카오카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다카오카의 시선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말했다. "패스하라고." "어쩌려고?" "....죽기 전에 발악한번 해보려고." 타악ㅡ 나는 공을 가볍게 드리블 하며 센터라인으로 향했다. 사노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스쳐지나가듯 말했다. "슈야, 무리하지마..." 나는 사노의 시선을 못 본채 하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이가 악물렸다. '한심해.... 겨우 이것 뛰고 숨이 차다니....' 나는 비집고 들어오는 23번을 재끼고 점프를 해버렸다. 티잉ㅡ 하는 한심한 소리와 함께 볼이 튕겨나왔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볼을 잡아채고 뒤로 돌아섰다. 다카오카가 나를 향해 손바닥을 내보였다. 내가 다카오카에게 볼을 패스하려는 순간, 무언가가 떠미는 느낌과 함께 뒷통수에 강한 충격이 왔다. "슈야!!" "크으으으윽!!" 13번, 이 자식...!! 실수로 넘어뜨린 척 하면서, 무릎 끝으로 내 붕대를 짓눌렀다. 놈의 눈이 웃고 있다. 퍼억ㅡ. 13번 놈이 훌쩍 들려지는가 싶더니, 둔탁한 소리를 내며 골대 밑에 쳐박혔다. "사노..." 내 눈 앞에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사노가 서 있었다. 삐이이이익ㅡ "뭐하는 짓이야, 11번!!" 사노는 심판의 외침을 뒤로한 채,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사노는 내 팔을 잡으며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선수 교체해." ".....싫어." "하라면 해." 사노, 이 녀석... 평소 답지 않게 인상을 쓰며 말한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뭐야, 환자 운송인가." 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봤...겠지? 형편없이 나뒹굴어버린 나를 봤겠지...? 농구, 잘한다고 자랑했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고 웃기다고 생각했겠지....? "하나마치." "이거 놔!!" 나는 카즈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얼굴이 달아올라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히로우, 선수 교체 해라." "누구 멋대로!!" "시끄러워. 환자는 지금 여기 있어봤자 걸림돌 밖에 안돼." 그 말에 힘이 빠져버린 나는, 카즈의 손에 이끌려 힘없이 대기석으로 빠져나와버리고 말았다. 삐이이이익ㅡ 하는 호각 소리가 여러 번 들릴 동안, 카즈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걸림돌이겠지." "뭐가." "나 말이야." 카즈의 시선이 뺨에 느껴졌다. "...화가 나서 돌아버리겠어. 내 몸이 내 몸같지가 않아. 차라리 예전부터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텐데...." "네가 특별하기 때문에. 선수교체를 해달라고 한 게 아니야." 나는 카즈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즈는 앞만 쳐다본 채 묵묵히 말을 이었다. "원숭이 녀석이든, 히로우 녀석이든. 그 녀석들이 무릎에 부상을 입고 뛰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난 당연히 선수 교체를 하라고 말했을꺼야. 넌 환자일수있지만, 환자가 너인건 아냐. ......이해 하겠어?" "아니." 카즈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누군가가 [넌 환자야]라고 말한다면, 넌 스스로를 환자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경계하겠지. 또한 자기 자신을 병자 취급할테고." "..............." "다른 누군가가 [넌 환자가 아냐]라고 말한다면, 넌 스스로 무리를 하겠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상처를 입어서, 똑같은 치료를 받을 때도, [난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치료 따위는 받지 않을꺼야] 하고 거부하려고 할지도 모르지." 카즈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어. 길다가 넘어진 소마도, 원숭이짓 하다가 타박상을 입은 다카오카도, 전부 환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야. 너도 물론 환자가 될 수 있어. 하지만 네 자체가 환자인 건 아냐." 카즈는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스스로를 평범한 녀석 취급해줘. .....물론, 양호 선생하고 동거하는 평범한 학생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나는 힘없이 웃었다. 카즈는 매끄러운 손으로 나를 잡으며 말했다. "무릎 이리 내봐. 얼음찜질 좀 하자." "....안해." "후반전, 안 뛸꺼야?" "............"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궜다. "물론, 나는 네가 안 뛰길 바라고 있지만." "무릎이.... 걱정되서?" "그런 것도 있지만...." 카즈는 어둠의 기운(!)이 물씬 풍겨나오는 말투로 말했다. "....그 자식이, 널 깔아눕힌 일을 잊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까, 깔아 눕히다니...;;; "그 놈, 황산구리를 입에 쳐넣어 주겠어." "카, 카즈... 그거 독극물이잖아." "아아.... 그럼 양잿물이라도." "....살인자는 되지 말자, 카즈." 카즈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웅[*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어서 바늘을 꽂을까. 그거라면, 녀석이 죽어버려도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않잖아?" "....카즈...." "후반전 때, 그 녀석 머리카락 몇 개만 뽑아와. 알았지?" 나는 진지하게 말하는 카즈를 보며 힘없이 웃어버렸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7 "슈야." 사노가 내 앞에 서자, 다카오카와 센도가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손바닥으로 밀어 닦으며 내 옆으로 섰다. "10분만 뛰어도 좋으니까, 미무라하고 교체해라." 사노의 말에 카즈가 벽에 머리를 기대며 이유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나는 카즈에게서 눈을 떼내며, 말없이 사노를 올려다 보았다. 사노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 사노. 부탁은 부탁처럼 해야지." 센도가 사노의 어깨에 달라 붙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사노는 까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센도처럼 징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군... 형님, 10분이라도 좋으니까 부디 저희들하고 같이 뛰어 주십쇼. 이 미천한 것들의 평생 소원입니다." 나는 사노에게 씩 웃어 주고 운동화 끈을 세게 조여맸다. 다카오카는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스쳐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13번 녀석, 내가 맡는다." 나는 다카오카에게로 눈을 돌렸다. 수건을 뒤집어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꽤나 벅찬 경기였는지 다카오카의 어깨는 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아... 다카오카 녀석도 한방 당했거든." 사노는 무릎으로 센도의 허벅지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센도는 사노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그 자식, 심판 모르게 잘도 얍삽질 하던걸? 언제 불러다 놓고 개타작...." 센도는 거기까지 말해놓고, 조심스럽게 카즈의 눈치를 살폈다. 양호 선생이라도, 선생은 선생이니까. 카즈는 여전히 앞을 주시한 채 픽 웃었다. 그러자, 천하의 센도의 얼굴이 불그스름해(!) 졌다. .....이걸로 놀릴 거리가 하나 생겼네. "크흠흠.... 그럼 갈까?" 센도는 두어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나는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가볍게 발을 구르고 코트로 들어갔다. "여어, 무릎 부상자." .......어째, 내가 그 말 안 하나 했다. 내가 뭐라 한마디 하려는 순간, 다카오카와 센도가 13번 녀석을 스쳐지나가며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닥쳐." "죽지 않을 정도로 맞고 싶지 않으면." 사노는 둘의 뒷모습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이 13번 녀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이름이, 다케조였던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노는 살짝 고개를 떨구며, 그 녀석 답지 않은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고두고 괴롭혀 줄테니까." "협박하는 거냐!" 사노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 반 응원석을 가리켰다. 나는 사노의 손끝을 따라 우리반에게로 눈을 돌렸다. "비.겁.하.다. 13번!! 짜.증.난.다. 13번!! 두.고.봐.라. 13번!! 죽.일.테.다, 13번!!" ............당신들. 멋져. 정말 대단한 단결력이야. 우리 반의 과격(?)한 내용의 시위에 당황한 선생들은, 우리 반을 진정시키느라 난리를 피웠다. 우리반이 꿋꿋하게 응원 아닌 응원을 해대자, 심판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3반 반장! 3반 반장 누구야!" "접니다." 사노는 방긋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어보인 후, 심판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응원석을 향해 소리쳤다. "이 멋진 놈들아, 사랑한다!!" "우오오오오오!!" 사노는 벙진 얼굴로 서 있는 심판을 향해 "시합 언제 시작하나요?"라고 한마디 던진 후,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난 사노에게 말없이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고, 사노는, 꼬리가 있었다면 꼬리를 살랑살랑 쳤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삐이이이이익ㅡ. 볼을 잡은 다카오카가 재빠르게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혼자 힘으로 골밑 슛을 넣을 듯한 기세ㅡ. 덕분에 수비 녀석들은 다카오카의 주위에 더덕더덕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지. 볼은 이쪽으로 오게 되어 있다고. 다카오카가 사노에게 볼을 패스하자, 사노가 나에게 패스를 했다. 수비 녀석들은 뒤늦게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볼은 쏘아져버렸는걸. 쳐억ㅡ 삐이이이이익ㅡ. "좋아, 이대로 가자!" 32대 47. 아직 따라 잡을 수 있어. "슈야!!"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다카오카!!" "시끄러워!!" 사실, 나와 다카오카는 사노의 처절한 외침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5초 남은 지금, 13번 녀석이 슛을 쏘아버리면.... 타앙ㅡ 볼은 링 위를 위태위태하게 빙글빙글 돌았다. 우리의 시선이 링 위를 돌고 있는 볼에 집중되었다. "들어가지마, 망할!!" 다카오카의 목소리ㅡ.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곧 삐이이이익ㅡ 하는 호각 소리가 들렸다. 시합 종료 호각 소리인줄 알고 눈을 번쩍 떴을 때, 다시 삐이이이익ㅡ 하는 긴 호각 소리가 들렸다. '들어.... 갔구나...'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잊고 있었던 무릎의 통증이 그제서야 몰려오는 것 같았다. ".....슈야....." "미안해. 내가 일찍만 들어왔어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사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를 감싸안았다. "괜찮아. 잘했어." "....됐어, 위로는...." 나는 사노는 밀어내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다카오카는 입술을 짓이기며 나를 돌아보았다. "....미안하다. 네가 없는 동안, 우리가 점수를 많이 빼앗겨서...." 나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다카오카의 어깨를 툭 쳤다. "아냐. 열심히 잘했어, 다카오카." 우리가 한참 서로를 위로하고 있을 때, 13번이 농구공을 집어던지며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녀석의 눈이 이글거렸다. "...씹어먹을 놈들. 이겨놓고 무슨 쇼냐?" .................. .................. .................. .................. .................. .................. .......아하하~ 센도는 13번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하지만, 겨우 10점 차로 이겨서 화가 나는 걸~" "맞아!! 겨우 10점이라니!! 제기랄!!" 다카오카는 주먹을 불끈쥐며 이를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팀 녀석들은 "....저 자식, 또 오버네."하는 얼굴로 다카오카를 바라보았다. 결국, 다카오카의 오버에 참다 못한 센도는 다카오카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넌 한게 뭐가 있다고 흥분이냐."라고 한마디 해버렸다. 다카오카는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말없이 서 있다가 우리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너희들, 왜 나만 미워해." 다카오카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 ...................... ...................... ...................... ...................... ...................... ...................... ...................... ...................... ...................... 침팬지, 아니... 부시 대통령 같았다. "너, 너, 너무 웃기잖아, 이 자식!!" 나는 센도와 서로의 목을 조르며 웃어댔고, 마키는 배를 부여잡고 괴로워 하며 웃어댔다.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13번도 픽픽 거리는 입방귀를 뀌다가, 결국엔 웃음을 못 참고 크게 웃어버렸다. "웃지마, 이 자식들아!! 너희는... 너희는 내가 그렇게 우습단 말이니!!" 다카오카가 그렇게 말하며 농구장을 뛰어나가버리자, 우리는 더욱 미칠 듯이 웃어댔다. 센도가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우습단 말이니?"하고 콧소리로 흉내내는 바람에, 어찌나 웃었는지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각팀 선수들 중앙으로!!" 우리는, 다카오카의 얼굴이 침팬치를 닮았는지, 부시를 닮았는지 두고 열띤 논쟁을 하며 센터 라인으로 걸어갔다. 1반 녀석들은, 씩씩 거리며 우리에게 뛰어갔다가 키득 거리고 웃으며 나타난 13번 녀석을 보고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우리는 크게 인사를 한 후, 1반 녀석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1반 녀석들은 떨떠름한 얼굴로나마 우리들의 악수를 받아들였지만, 13번 녀석은 팔짱을 낀 채 손을 내밀지 않아서, 녀석의 앞에 서 있던 사노의 손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이 꼬장꼬장한 자식!! 감히 우리반 반장을 물 먹여?!" 센도가 완력으로 팔을 잡아당기자, 13번 녀석이 못 이긴 얼굴로 사노와 억지 악수를 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짓궂은 악수로 "아악!"하고 소리를 지른 쪽은 사노가 아닌 13번 쪽이었다. 사노는 새빨개진 13번의 손을 후다닥 놓으며 씨익 웃었고, 13번은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와 우리를 노려보았다. "너, 우리 예쁜 형님을 괴롭힌 대가는 톡톡히 치뤄주겠어." 사노가 내 어깨에 팔을 얹으며 말하자, 센도가 내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우리 반 녀석들이, 지금 널 죽이겠다고 길길이 뛰고 난리다. 그러길래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그 자식이 너네 반의 뭔데?" 사노와 센도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13번에게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큰 형님." "큰 형님." 그 말에, 13번은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 복학생이었냐?" "..................."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온다, 이 자식아;; "그래, 복학생이다. 사실 너보다 3살은 많다, 이 자식아." 나는 13번이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며 말한 후, 대기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카즈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옆에 있는 수건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감사해, 선생." "고마워면 고마워고, 감사합니다면 감사합니다지.... 감사해는 뭐냐." 나는 카즈에게 히죽 웃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 정리를 하던 사노는, 들고 있던 공을 바닥에 내려 놓으며 내 앞에 섰다. "집에 가는거야?" "응, 담임한테는 몸이 안 좋아서 갔다고 그래." "알았어. 내일 하는 일, 조금 힘들지 모르니까 푹 쉬어두고..." 나는 사노에게 등 뒤로 손을 흔들어 주며 체육관을 나섰다. 등 뒤로 훈훈한 바람이 어왔다. 그 바람에는 카즈의 향도 섞여 있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카즈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즈." "응." ".....나, 잘했어?" 유, 유치해;; 이건 마치.... 유치원생 같잖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거야, 바보 슈야!!;; "응, 잘했어..." 카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바람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버렸다. 카즈는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내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13번 녀석, 반드시...." 바, 반드시... 뭐 어쩌려고...?;; 말끝을 흐리지마;; 불안하단 말이야;; ".......해주겠어." "뭐?!;;; 아, 안들였어!!;; 다시;;" 카즈는 "후..."하고 짧은 한숨을 쉬며 싱긋 웃었다. "글쎄, 뭐였을까....?" 카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유히 교정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 ....................... ....................... ....................... ....당신, 최고야;; 방금 정말 악마 같았어;; "앗!! 카즈으, 같이 가아아!!" 그렇지만... [그래도, 나 사랑하잖아] .......그건 그래;;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8 "....슈야, 이제 일어나." 나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카즈의 손을 잡고 크게 하품을 했다. 카즈는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바라보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업어줄까?" "아냐... 10발자국도 안되는데." 나는 비실비실 차에서 내려 길게 기지개를 폈다. 카즈는 가볍게 내 어깨를 도닥이며 앞서 가 문을 열었다. "저녁 뭐 먹고 싶어?" "후아아암... 반찬꺼리 있어?" 한참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카즈는 식탁 옆에 주저 앉아 있는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이런.... 올 때 장을 볼 껄 그랬나." "먹을 꺼, 아무것도 없어?" "어제 먹던 반찬 몇 가지 밖에 없는데." 나는 카즈의 다리를 끌어당겨 무릎을 베고 누웠다. 카즈는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쓸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두부라도 사올껄. 계란 몇 개 있으니까, 묻혀서 튀기면 되는데." "그럼 내가 가서 사올까?" "아냐, 여기 있어. 내가 사올께." 카즈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들어안았다. 나는 카즈의 목을 꼬옥 끌어안고 품에 파고 들었다. "많이 피곤해?" "으응으응.... 그런데 지금 침대에 눕혀주면, 자버릴 것 같은데." "그럼 잠깐 자고 있어. 저녁 다 하고 깨울테니까." 카즈가 말할 때마다, 가슴에 대고 있는 뺨이 지이잉 울린다. 내가 가슴에 뺨을 갖다대고 히죽 거리자, 카즈가 내 머리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뭐해....?" "카즈가 말하니까 뺨이 울려. 기분 좋아." 카즈는 나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난간에 걸터 앉았다. 나는 슬금슬금 기어가 카즈의 무릎에 철푸덕 엎드려 버렸고, 카즈는 내 등을 가볍게 토닥토닥 거렸다. "카즈." "응." "요즘엔 왜....." ......안 안아줘? "슈야?" ".....왜 그렇게 일찍 자?" "축제준비 때문에 피곤해 보이길래, 너 일찍 재우려고 그랬지." "그렇지만 왜....." ......키스도 안해주고. "슈야?" ".....카즈가 더 바빠보여. 맨날맨날 '얼른 자' 아니면 '내일 학교 안가?'이고." 나는 뒹굴 굴러서 카즈를 올려다 보았다. 카즈는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빠." "뭐가?"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카즈의 아랫입술을 만지작 거렸다. 카즈는 쿡쿡 대고 웃으며 간지럽다고 내 손을 내려놓았다. (...바보, 카즈.) "카즈랑 산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네." "응." "난 지금도 카즈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 그러는데.... 카즈는 안 그러지?" 내 말에, 카즈는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를 잡아끌어 품에 파묻었다. "들어봐." "어떤 걸?" "심장 뛰는 거." 나는 카즈를 살짝 밀어내며 카즈를 올려다 보았다. 카즈는 전교생 녀석들이 발악하고도 남을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디가 좋아?" "응?" "카즈는 나보다 미인이고, 팔다리도 길고, 머리결도 좋고...." 카즈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기분 좋게 웃으며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슈야가 더 예뻐. 그리고.... 난 다 좋아." ".....발가락도 좋아?" "응." ".....귓구멍도?" "응." ".....입술도?" 카즈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내 어깨를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내가 팔을 둘러 목을 끌어안자, 카즈가 살짝 내 어깨를 밀어냈다.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카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두부 사러 갔다올께." "............응.." 나는 비실비실 기어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침대 무게가 쏠리는 것으로 카즈가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철컹ㅡ 하고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얼마나 잠들었던 걸까. 고소한 두부 튀김 냄새에 눈을 비비고 일어난 나는 가스렌지 앞에 서 있는 카즈의 등 뒤로 부슬부슬 걸어갔다. "일어났어?" ".....응....." 내가 등을 끌어 안으려고 하자, 카즈가 살짝 내 팔을 피하며 말했다. "식탁에 젓가락 좀 놔줄래?" "..............." 나는 가스렌지를 꺼버렸다. 카즈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슈야?" "싫어, 이런 건... 난 성질이 더러워서 못 참는단 말이야." "무슨 말을...." 나는 카즈의 어깨를 밀어 벽에 밀어붙였다. 그제서야 카즈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젠..... 내 몸이 식상해?" "뭐?" "그래서 날 거부하는거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카즈의 어깨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만큼.... 매달리게 만들었으면 됐잖아.... 카즈가.... 나 따위에겐 과분한 사람이란 것만으로도.... 난.... 비참하단 말이야...."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억눌렀다. 그 때문에, 자꾸만 어깨가 작아지는 것 같았다. ".....화나는 군." "카즈?" 카즈는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내 팔을 뿌리치며 내 눈을 직시했다. "식상해서....? 그래서 거부한다고....?" 카즈는 이를 악문 소리로 말했다. "내가, 네 몸만 바라고 이런 짓꺼리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널 학교 보내고, 이래저래 돈을 대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게.... 아냐." "그럼 어째서 그 따위 말을 한건데!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도 모르고 한 말은 아니겠지?" 나는 카즈의 꽉 쥐어진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답답했단 말이야.... 난..... 아직도 이렇게 많이 좋아하는데.... 카즈만 자꾸 물러서는 것 같아서 초조했단 말이야.... 카즈는 모든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러니까 나 같은 건, 별 것 아니겠지만...." 카즈는 "후...."하고 짧은 한숨을 쉬며, 나를 끌어 안았다. 따뜻한 느낌.... 왠지 모를 안도감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말했잖아.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니까, 계속 그렇게 살아있기만 해달라고.... 내가 그렇게 감사하는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다른 놈들 따윈 수천이든 수백이든.... 그 놈들이 살아봤자, 그 놈들이 내뱉는 이산화탄소 때문에 온실효과만 가중된다고 생각해버린다고, 나는." 나는 카즈의 옷을 꼭 움켜쥐었다. 눈물을 떨구고나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아까.... 왜... 화냈어...?" "같은 공간 내에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매순간 끌어안아버리고 싶은 걸 억누르느라 힘들어.... 널 힘들게 하는 게 싫어서, 내 자신이 대견하게 생각될 정도로 잘 참고 있는데.... 식상하다니, 몸이 어떻다니 하면.... 내가 속상하지 않겠냐..." 카즈는 내 눈에 살짝 입을 맞추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은 일이고, 우선 저녁부터 먹자." 카즈에게 미안한 말을 해버린 기분에, 나는 고개를 푸욱 떨구고 끄떡거리기만 했다. 그 날 저녁은, 굳은 기름에 쩔은 두부 튀김이었다. 내가 중간에 가스렌지를 꺼버린 게 화근이었지만.... 카즈가 자기 요리실력을 탓하는 통해, 미안해 죽는 줄 알았다. (한숨)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29 "야, 1회용 접시 어디 있어!" "상자에 없어? 그런데 사과는 어디있냐?" "헉, 케잌이 80개 밖에 안 왔어!" "책상 배열 다시해! 18개는 되야한단 말이야!" 나는 삐뚤어진 가발을 바로 쓰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커텐을 여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조금씩 열리는 커텐이 츠츠츠ㅡ 하는 마찰음을 냈다. "야, 하나마치 나왔어!! 하나마치!!" "우오오오오!!" "슈야, 이리 좀 나와봐!!" 촤아악ㅡ. ........심장이 벌렁벌렁거린다;; "야아, 그러지 말고 좀 보여주라~" "어차피 볼껀데 뭘 그렇게 숨고 그래." "그래그래, 다카오카는 저 꼴을 하고도 잘 돌아다니잖아." 그 다카오카 꼴이 되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 "슈야, 막상 나오면 안 쪽팔려. 그러니까 우리 딴반에 홍보 하러 다니자~" .......다카오카 놈, 벌써 맛들린거냐;; "슈야, 곧 까페 여는데... 정말 안 나올꺼야?" "너라면 나오고 싶겠냐!!" ".....난 나왔잖아;;" "넌 화장 안했잖아!!" 커텐에 비친 사노의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커텐을 강제로 열어버리는 줄 알고 두 손으로 꼭 커텐을 붙잡았는데, 한걸음 정도 남기고 사노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유키, 기모노 입고 홍보 돌더라." "..................." "괜찮겠어? 양호실에도 갔었다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에 묻어나는 핑크색 립스틱.... 기절할 것 같아;; "정말 안 나올꺼야?" ".....나갈께. 조금만 더 있다가...." "응, 알았어. 서빙할 때까지만이라도 나와 있어줘." 나는 긴 한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나름대로 탈의실이라고, 저 편엔 전신 거울까지 놓여있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안에는, 크게 웨이브진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여뜨린, 왠 빈약한 계집애 한명이 서 있다. "너가 나라고? 웃기지마." 나는 거울에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한바탕 욕을 해주려다가, 왠지 거울 속에 있는 계집애가 웃는 것처럼 보여서 그만 두기로 했다. 나는 다시 의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치렁거리는 보라색 드레스가 하늘하늘 거리면서 발에 채였다. [ 아아, 안내 방송 드리겠습니다. 2학년 1반 가와무라 다케조, 2학년 1반 가와무라 다케조. 지금 즉시 양호실로 와주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2학년 1반... ] 다케조라....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에서 들어봤더라? -그만해, 다케조- -네 이름이, 다케조였던가?- 아아, 그 13번 녀석이 다케조였지? 그런데 방금 무슨 방송이.... -.......해주겠어.- -글쎄, 뭐였을까....?-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촤아악ㅡ 하고 커텐 마찰음과 함께 왁자지껄한 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하나마치다!!" "캬아아~ 역시 슈야!! 똑같은 여장이지만, 어떤 원숭이 자식하고는 확연히 다른데?" "여어, 사노!! 드디어 공주님 등장이다!!"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가, 몰려드는 반 녀석들을 밀어내고 교실을 뛰어나왔다. 양호실로 내려가는 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하아... 하아..."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양호실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양호실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눈이 시뻘개진 멀대같은 놈 하나가 튀어나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다케...." 다케조는 이를 앙다문 얼굴로 나를 힐긋 쳐다보고는 복도 저편으로 뛰어갔다. 나는 멍하니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양호실로 뛰어들어갔다. "카즈!" 의자에 몸을 기울인 채, 차를 마시고 있던 카즈는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나는 카즈의 앞에 서서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저 놈한테 무슨 말했어?" "별 말 안했는데." 카즈의 입술에서 녹차 향기가 났다. 게다가 녹차물이 묻어서 촉촉...... 이런 걸 신경쓸 때가 아니잖아!!;; "울고 있었단 말이야, 그 자식." "아아, 그래?" 카즈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거 잘됐네." "잘 돼다니... 카즈가 울린거야?" "글쎄...." 카즈는 녹차를 한모금 마시며 살짝 눈을 내리 깔았다. "난 타인에게 그다지 관대한 편이 아니라서 말이지." "..................." "그건 그렇고." 카즈는 내 가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빙긋 웃었다. "예쁘네." 얼굴에 피가 몰린다;; "그런데.... 대체 뭘 넣은 거야?" 카즈는 내, 아니... 뽕(?)가슴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나는 카즈의 손등을 찰싹 때려준 후, 드레스 안에 손을 집어넣어서 눌린 것을 도로 빵빵(?)하게 만들었다. 카즈는 녹차잔을 설렁설렁 흔들면서 말했다. "휴지야?" "아니, 단팥빵." "............." 카즈는 잠시 벙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쿡쿡 거리며 웃었다. 그 미소가.... 마치 부서지는 빛처럼 주위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카즈.... 예쁘다." 나는 카즈의 뺨에 손바닥을 대며 말했다. 카즈는 묘하게 매혹적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가, 긴속눈썹을 드리며 눈을 감았다. 키, 키스하라는 건가? 리드해 본적, 한번도 없는데.... 시, 심장이 벌렁.... 아니, 벌컹벌컹 거린다;; "....구경 그만하고, 빨리 해." 카즈의 도발적인 말에, 나는 정신없이 카즈의 입술을 탐했다. 살짝 눈을 뜬 채, 그 내리깐 눈으로 나를 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숨이 터억 막힐 것 같았다. "후......" 내가 입술을 떼어내자, 카즈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립스틱 맛이 나." ".............;;" 카즈는 입술에 남은 립스틱을 손등으로 밀어 닦으며 말했다. "까페, 언제 시작한다고 했지?" "11시라고 했으니까, 곧 시작할꺼야." "먼저 올라가 있어. 정리하고 올라갈께." "응." 카즈는 무언가 잊은 말이 있었는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슈야." "응?" ".....안하면 안돼?" 나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며 말하는 카즈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아, 정말 눈물 나게 사랑스럽다!! "슈야......?" "카즈, 당신 정말 사랑스러운 거 알지?" "....언제는, 왕싸가지에, 변태에, 악마같은 늙은이라며." 기, 기억력 좋네;; "그, 그건 반어법이었지~ 사실은 성격 좋고, 건전하고, 천사같은 젊은이란 말이었어~" "................." 불신의 눈으로 쳐다본다. 쳇쳇;; "그럼, 나 먼저 올라올께. 늦게라도 꼭 와!" "응." 나는 카즈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양호실을 나왔다. 그런데.... 무언가 잊은 듯한 기분.... 뭐였지? 내가 뭘 깜빡했지? '그러고 보니까..... 내가 왜 양호실에 왔는지 모르겠네.' 설마, 이 모습을 카즈에게 보여주려고 내려온 건 아닐테고.... 11시까지라는 걸 알려주려고 내려왔었나? '헐, 정말 악마한테 홀렸나?;;' 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3층으로 올라왔다. 뭘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별일 아니겠지...?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30 "야, 쟤 좀 봐..." "저거 3반에 하나마치 아니야?" "화아... 여장한다더니 정말이네?" .....이상한 거 알고 있어. 아주 자알~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만 쳐다보란 말이다, 이 자식들아!!" 내가 버럭 소리 지르자, 내 주위에 몰려 들어 있던 놈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비켰다. 우으, 짜증이 용솟움을 치는 것 같아. "앗, 슈야! 어디 갔었어~" 찰랑거리는 짧은 갈색 머리칼, 그것을 산뜻하게 묶은 붉은 리본ㅡ.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떠올리게 하는 짧은 치마는 나풀나풀거리고, 각색의 프릴이 흔들리면서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돋보이게 한다. 그래, 좋아. 다 좋다고. 그런데...... 왜 얼굴이 다카오카 인거야!!;; ".... 난 당신 모르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그녀는 "흑, 날 버리지마~"라고 처절하게 외쳤고, 난 그녀를 잘근잘근 밟아 주었다. "앗, 하지마~ 치마 구겨져~" ................. ................. ................. ................. ................. ................. ................. ................. 나는 샌들로 다카오카의 뒷통수를 걷어찬 후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 중앙에 서서 반 녀석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던 사노는 나를 발견하고 생긋 웃었다. ......예쁘다, 사노. 켄지가 널 추천 안했으면, 뭇 남학생들이 켄지를 원망했을꺼야. "어디 갔다왔어?" 사노는 긴 검은 치마를 쓱 걷어올리며 매끈(?)한 다리로 유혹..... 이 아니라, 책상 위에 터억 올려놓았다. 여장을 하고도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고생하네, 사노."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손등으로 사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사노는 빙그레 웃으며 내 손을 내려놓았다. "공주님의 손에 땀을 묻힐 순 없지." ".......맞고 싶지?" "아아, 하지만 정말 공주님 같은 걸." 사노는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Dear my princess, 제가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어, 히로다." "어디어디?" 사노는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나는 사노의 뒷통수를 따악 소리나게 때렸다. "아이고, 아파라~" "엄살 부리지마. 살살 때렸어." 사노는 뒷머리를 슬슬 부비며 씨익 웃었다. "그나저나, 우리 벌써 소문 났나 보네?" "에?" 나는 고개를 들어 반 녀석들을 둘러보았다. 녀석들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얼른 고개를 돌리며 일하는 척을 한다. "......저 썩을 것들이." "그래도 재미있잖아?" 나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사노의 멱살을 움켜쥐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상한 소문나면, 죽여버린다." "뭐, 질투심을 유발해 보는 것도 괜찮잖아~" "괜찮기는! 네가 카.... 아니, 히데야키의 사악한 성격을 몰라서 그래! 다케조 일만 해도...." 다케조... 맞아, 그 녀석이었어! 내가 왜 녀석을 잊고 있었을까! "다케조? 그 13번 녀석 말이야? 갑자기 그 녀석 이름이 왜 나오는데?" 울고.... 있었지, 분명.... 카즈, 대체 그 녀석에게 무슨 말을 했던거지.... "슈야?" "아, 미안.... 다른 생각을 하느라." 나는 사노의 멱살을 놓고, 아무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뭔가 복잡 미묘한 감정...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의도적으로 무릎을 건드렸을 때는 화가 났었지만.... 아니, 아직도 화가 나지만.... ....카즈의 손을 더럽히는 건 싫어.... "슈야?"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켄지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켄지는 무척이나 어색하고 어설프게 보여서, 켄지를 여장하게 만든 장본인인 나는,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예쁘다.... 정말 동화속에서 막 빠져나온 공주님 같아..." ........너도냐. "이왕이면 왕자라고 해줘." "하지만 왕자 같지는 않은 걸." "드레스를 입은 왕자는 없으니까 말이야~" "사노, 너 계속 깐죽거릴래?" 내가 주먹을 들며 말하자 사노가 아양(!)을 피우며 부비적 거린다. 센도 녀석.... 여러모로 사노 녀석을 망가뜨리는 구나;; 켄지는 쿡쿡 거리고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런데 사노, 까페 언제 열어?" "케이크 오면 열려고." "케이크? 아까 센도가 도착 했다고 하던데?" "왔긴 한데.... 아직 80개 밖에 안 왔거든." 사노는 의자에 걸터 앉으며, 흘러내리는 어깨끈을 요염하게 올렸다. 켄지는 가볍게 혀를 차며 "너무 야한것 같은데..."라고 한마디 했고, 사노는 눈을 빛내며 "너희가 치한들로부터 날 지켜줘."라고 말해서 우리에게서 외면을 당했다. "그런데 히데야키 선생님은 안 오신데?" 켄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복도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악마의 행차로군." 우리는 의자를 밀어넣으며 교실 앞문으로 향했다. 잠궜던 앞문을 열자, 복도의 소란스러움이 교실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후, 소란스럽군." 카즈였다. 켄지는 카즈에게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하고 슬금슬금 피해버렸고, 사노는 카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눈을 이리저리로 돌리고 있었다. 가운을 벗은 카즈는 평상시 즐겨 입는 대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불편해서 인지 겉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보통 선생들도 겉옷을 벗고 다니지만, 그게 카즈라는 게 문제였다. 카즈는 와이셔츠 소매를 반쯤 걷은것만으로도 상당히 묘한 분위기를 풍겨서, 괜히 덩달아 나까지 눈을 여기저기로 돌리게 만들었다. "늘 보는 거야! 집에서 매일 보던 거라고!"라고 세뇌까지 시켜봤지만.... 반 분위기가 "부끄러워 하는 분위기"로 돌아가자, 쉽게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둘꺼지?" 카즈는 짜증이 배여나오는 얼굴로 말하며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사노는 당황한 얼굴로 문을 바짝 열며 말했다. "예? 아, 들어오세요." "고맙군." 카즈는 빈 의자에 걸터 앉으며,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들에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나타냈다. 반 녀석들은 후다닥 고개를 돌리면서도, 시간이 날때마다 흘끔흘끔 카즈를 쳐다보았다. 역시 미인에게 시선이 가는건 어쩔 수 없는 건가보다;; "하나마치." 내가 카즈를 향해 돌아서자, 카즈가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나는 몸을 사리며 카즈를 경계했다. "왜, 왜 그래?" "이리와 봐." "시, 싫어. 또 이상한 짓 하려고?" "후.... 앙탈을 부리다니. 귀여워 미치겠군." 카즈는 살짝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순간, 비디오를 정지시킨 것처럼 반 녀석들의 몸이 굳었다. 움직이고 있는 놈이라면.... 구석에서 코피를 닦고 있는 다카오카 뿐. "....까페 안 여나?" 카즈는 약간 짜증이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노는 흘러내리는 끈을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직 케이크가 안 와서요.... 80개가 있기는 한데...." "나중 것은 나중에 팔아. 밖에 바글거리는 놈들때문에 정신이 없다." "그럼.... 지금 열까요?" "좋을대로." 사노는 우리에게 눈짓을 하며, 잠궈두었던 앞문을 열 준비를 했다. 우리는 메뉴판과 주문서를 챙기고 앞문 옆에 섰다. 드르르르륵ㅡ "어서오세요~" "어서오세요~" 순식간에 들어찬 손님들은 몇개 안되는 테이블을 빽빽히 차지했다. 인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짤린 다음 손님들은, 카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우성을 했다. "어떤 걸 주문하시겠습니까?" 까맣게 그을린 운동복의 이 녀석은, 흘끔흘끔 카즈를 쳐다보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카즈를 향해 말했다. "서, 선생님! 어, 어떤 걸 먹으면 좋을까요!" ....그걸 왜 카즈한테 묻는데. 카즈는 물끄러미 그 녀석을 쳐다보다가,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내가 카즈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이자, 카즈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서 제일 비싼게 뭐지?" "...케이크." 카즈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인 후, 그 녀석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케이크." ....그렇게 케이크는 순식간에 바닥나 버렸다.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31 "케이크 품절!" "아이스크림도 품절이야!" "냉커피는?" "냉커피도 품절!" 나는 풀썩 주저 앉아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빈 테이블을 꽉 움켜쥐었다. 자리가 비자마자 선착순 하듯이 달려오는 손님들ㅡ. 나는 깊은 한숨을 쉬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았다. "슈야, 괜찮아?" 서빙을 하던 사노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 사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도닥였다. "가서 좀 쉬어." "쉴 새가 어디 있어. 손님이 저렇게..."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복도에 줄을 서 있는 손님들을 가리켰다. 사노는 힘없이 웃으며 어깨를 추욱 늘여뜨렸다. "손님이 많아서 걱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러게...."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카즈를 돌아보았다. 카즈는 책에 심취해서, 주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리는 것은 그다지 신경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사노는 나를 따라 카즈를 돌아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참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야." "뭐가?" "히데야키 선생님 말이야. 케이크를 먹으면 케이크가 품절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아이스크림이 품절 되잖아." "....하지만 사악하다고. 일부러 비싼 것만 먹고 있잖아." "우리야 좋지 뭐. 수익금의 70퍼센트는 학생들에게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사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수학여행, 좋은 곳으로 가야지. 우리 반 애들이 이렇게 고생했는데." "응..." "히데야키 선생님도 같이 가자고 할까?" "에에?" 사노는 팔꿈치로 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 "같이 가고 싶지 않아? 간만의 이벤트를 만들 수 있는 기회인데 말이야." "하지만...." 카즈와 여행.... 에에, 그러니까.... 손잡고, 여기저기 유적을 보러 다니고, 같이 사진 찍고, 저녁도 먹고.... "슈야?" 놀이동산도 가고, 온천 같은 곳도.... 온천.... 온천이면.... 에.... 그러니까.... "슈야?" "으응! 가고 싶어! 같이!" 내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반 녀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됐다. 나는 녀석들이 오해할까 싶어 손을 세게 휘저으며 소리쳤다. "아니, 사노하고 말고!" "사노하고?" "하나마치, 무슨 말을 하는거야?" ......괜한 말을 했다. "야아, 벌써 그런 사이가 된거야?" "부럽다. 누구는 청춘이구만." "죽여버린다, 너네!"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카즈의 눈치를 살폈다. 별 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못 들은 것 같기..... "그런 사이란 말이지, 하나마치." .......드, 듣고 있었구나;; "그, 그런 게 아니라...." "서빙들이나 해. 이런 곳에서 청춘 극장 만들지 말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 "시끄러워. 빽빽 거리지마, 어린애." 카즈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사노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카즈야?" 앞문 쪽에서 들려오는 미성의 목소리. 이런 호칭으로 카즈를 부를 만한 사람은... "카오루?" "카즈야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카오루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카즈에게 달려와 포옥 안겼다. 헐렁헐렁한 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카오루는 전에 봤을 때보다 더 활동적인 차림이었다. "대체.... 여긴 왜 온건데." "당연히 우리 카즈야 보고 싶어서 왔지!" 카오루는 밝게 웃으며, 다시 한번 카즈의 목을 꼬옥 끌어 안았다. ....기분 나쁘지만, 미인끼리라 그런지 잘 어울린다. (한숨) "어라, 슈야?" 카즈의 목에 매달려 이리저리로 흔들어대던 카오루는 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어, 그 옷차림..." 카오루는 내 앞에 바짝 다가와, 어깨에 달린 프릴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정말 꼴사나워." ......네가 그러면 그렇지. "카즈야아~ 나, 맛있는 거 사줘!" 홱 돌아선 카오루는, 다시 카즈의 팔에 매달리면서 말했다. 카즈는 카오루의 손을 탁 뿌리치며 책장을 넘겼다. 그에 볼을 잔뜩 부풀린 카오루는 카즈의 눈을 손으로 가리며 다시 앙앙 거렸다. "맛있는 거 사줘~ 안 그러면 안 놔줄꺼야~" "돈 없어." "카즈야아아~" "시끄러워, 앵앵 거리지마!" 카즈는 짜증이 배여나오는 얼굴로 카오루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카오루는 전혀 무안한 기색 없이, 방긋 웃으며 카즈에게 매달렸다. "저, 옷~ 내가 입으면 정말 예쁘겠지? 그렇지?" ".....입으면 죽여버린다." "후훗, 카즈야는 수줍음쟁이라니까~" "누가 수줍음쟁이라는 거냐!" 카오루의 등장에, 까페는 더욱 시끄러워졌다. 누가 소문을 냈는지, "히데야키의 애인"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까페는 발 디딜틈도 없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히데야키 선생님?" 후우, 이번엔 히로냐.... 붉은 기모노를 입은 히로는 조심스럽게 사람들 사이를 제끼고 들어와, 카즈의 앞에 섰다. 카오루의 가느다란 눈썹이 쓱 치켜올라갔다. "넌 뭐야?" "뭐...라니?" 카오루는 찌푸린 눈으로 히로를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못생긴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꼬리를 치려는거야?" 카오루는 날카롭게 말하며 히로의 어깨를 탁 밀어냈다. 서빙을 하던 사노는 재빠르게 달려와 히로의 어깨를 잡아주며 카오루를 직시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뭐야.... 꼬맹이 애인이냐?" 카오루의 말에 불끈한 히로는 두 주먹을 꼭 움켜쥐며 눈을 부릅떴다. "내가 왜 꼬맹이야!" "꼬맹이니까 꼬맹이지! 그렇지, 카즈야~" "이잇... 함부러 이름 부르지 마! 선생님은 이름 부르는 거 싫어하신단 말이야!" "흐응, 그거야 너나 그렇겠지." 카오루는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카즈의 목을 끌어안았다. 카즈는 귀찮다는 손짓을 할 망정, 다른 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버럭 화를 내거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봤지?" 카오루의 행동에, 히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본인들은 심각하겠지만..... 너무 유치하다;; '슈야, 너 괜찮아?' 내 뒤로 다가온 사노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사노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냐니?' '너, 히데야키 선생님 좋아하잖아.' '그런데?' '그런데라니.... 너, 너무 태평한 거 아니야?' 그런가.... 하지만 재미있는걸;; "뭐야? 넌 뭔데 슈야랑 속닥거리는 거야?" 카오루는 눈을 흡뜨며 사노를 노려보았다. 얼떨결에 그의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된 사노는 두 손을 내저으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어디서 삿대질이야!" "카, 카오루. 저건 삿대질이 아니라.... 아니라고 부인하는 손짓이야." "시끄러워! 넌 편들어주지마!" 내가 어깨를 움찔하자, 사노가 눈을 찌푸리며 카오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슈야에게 함부러 대....." "슈야? 너, 방금 슈야라고 했어?" 카오루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사노의 멱살을 움켜쥐고 빽빽 거렸다. "슈야를 슈야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나하고 카즈야 뿐이야! 얼굴도 못생긴 주제에 감히 누구를 슈야라고 부르는 거야!" 거, 거기서 왜 갑자기 얼굴 얘기가 나오는데;; "슈야라고 부를 자격은 충분히 있어. 난 슈야 친구니까." 사노는 카오루의 손을 탁 뿌리치며 말했다. 그 말에, 카오루의 눈에 독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친구? 친구라고?" 카즈는 물끄러미 카오루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양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았다고? "웃기지마." "카, 카오루?" 카오루는 고개를 번쩍 들며 째지게 소리쳤다. "슈야는 내꺼야!!" ..................... ..................... ..................... ..................... ..................... ..................... ..................... ..................... ........하하...... ..................... ..................... ..................... ..................... ..................... ..................... ..................... 너, 미쳤어?!!;; 내가 왜 네꺼야!!;; "내꺼야!! 내꺼란 말이야!! 너네 같은 못생긴 애들한테는 안 줘!! 내꺼란 말이야!! 더러운 손 치워!! 물어버릴꺼야!! 지저분해!! 못생겼어!! 저리가!! 내꺼야!! 손대지마!! 죽여버릴꺼야!! 가만 안둘꺼야!! 다 없...." 카즈는 한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다른 한 손으로 가만히 카오루의 입을 덮었다. 카오루는 아직도 울분이 덜 풀린 듯 눈물을 그렁거리며 카즈를 올려다 보았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흑...... 저 못생긴 애들 싫어어....!!" 카오루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카즈에게 안겨들었다. 카즈는 긴 한숨과 함께 카오루의 등을 도닥거리며 말했다. "슈.... 아니, 하나마치." "으, 으응?" "네가 맘에 드는 모양이다." "맘에... 든다고?" "카오루한테 말이야." 에....에....에....? 나, 카오루한테 미움 받는 거 아니였나....? "흑... 슈야는 보통 사람들보다 덜 못생겼으니까." 카오루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왠지, 벙진 기분에... 나는 멍하니 카오루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못난이들... 다 쫓아내 버릴꺼야!" 카오루의 눈이 다시 날카롭게 빛났다. "나가! 너네 나가!" 카오루는 내 어깨를 밀쳐내고는 사노와 히로를 교실 밖으로 마구 밀어내기 시작했다. 히로는 꽤 반항(?)을 했지만, 사노는 당황한 손짓만 하느라 그보다 훨씬 작은 카오루에게 교실 밖으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자, 잠깐만! 사노가 가버리면 서빙을 할 사람이 모자란단 말이야." "그 따위 것은 내가 해도 되!" "카오루가....?" 카오루는 꼿꼿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득이잖아? 저 까만애보다는 내가 더 미인이니까." 그, 그거야 그렇지만..... 그런 말, 본인의 입으로 하면 부끄럽지 않아?;; "그리고, 우리 카즈야도 도와줄꺼야~" 카오루는 카즈의 목에 매달리며 말했다. 순간, 카즈의 표정이 굳었다. "왜 내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거지?" 카오루는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슈야랑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학교에 알려지면 곤란하지 않아?" "................." "굳은 표정도 예쁘다, 우리 카즈야~" 카오루는 카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도와줄꺼지? 그렇지?" "......아무튼,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카즈는 카오루의 손을 탁 뿌리치며, 내 손에서 행주를 빼앗아 들었다. 카오루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교실 밖을 향해 소리쳤다. "내 미모에 반한 자들아, 어서들 오렴~" ..................... ..................... ..................... ..................... ..................... ..................... ..................... ..................... ..................... ..................... ......왜 내가 창피하지?;;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32 "슈야! 문 열어줘! 슈야!" 나는 카오루의 눈치를 보며 주저주저 하다가 조심스럽게 앞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즈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카오루는, 낌새를 눈치챘는지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문 열지마, 못난이. 원래 널 싫어하지만, 지금 문을 열면 더 싫어할꺼야." .......거봐, 카즈. 나 싫어한다잖아;; "슈야! 문 열여줘!" "시끄러워! 다른 곳으로 가버려! 애인하고 데이트 할 시간 주겠다는데, 왜 이래!" "그, 그러니까 우린 애인 같은게 아니라...." 사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사노, 왠지 기쁘게 들리는걸?;; "됐어, 사노. 가자." "가자니?" "....이런 기분으로 선생님을 뵙고 싶지 않아...." 히로의 말을 마지막으로, 복도에는 더 이상 사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손님들은 의아한 얼굴로 "무슨 일이 났나?"하는 얼굴로 나와 카오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못난이들 주제에." 카오루는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금새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새하얀 눈송이 같은 카오루의 미소는, 의외로 붉은 색ㅡ. 카즈와 비슷한 색이다. "자아, 그럼 시작해 보실까?" 카오루는 잠궜던 앞문을 열어 사노들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후, 반팔 소매를 더 겉어붙이며 말했다. 나는 물끄러미 카오루가 하는 냥을 지켜보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못생겨가지고." "에에... 아니, 왠지 즐거워 보여서." 카오루는 "흐응"하고 코웃음을 치며 "가소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천사같은 얼굴로 돌아와 방긋 웃는다. "사실,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에에?" "난 1학년 학기 중간에 학교를 그만둬 버렸으니까." "어째서?" 카오루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즈야한테 못 들었어? 내가 학교 선배들한테 어떤 짓을 당했는지." .......머릿속이 차가워진다. "그런 표정 짓지마. 그 때는, 카즈야를 너한테 빼앗기기 전이었으니까." 카오루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복수라면 카즈야가 철저히 해줬거든." 복수...라고? "궁금해? 카즈야가 어떻게 복수해 줬는지?" 난 마른 침을 삼키며 카오루를 응시했다. 카오루는 내 앞에 바짝 다가서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뽀뽀해주면 가르쳐주지." "히이이이이이이익?!" "병신, 농담이야." ....벼, 병신..... "누가 너하고 못생긴 애하고 하고 싶데? 난 단지.... 네가 그런 꼴사나운 차림을 했으니, 카즈야가 너한테 해줬을 것을 빼앗고 싶었을 뿐이야." "............." "흐응, 얼굴 빨개진 걸 보면 정말인가 보네? 씨발, 기분 나빠." .....천사가 욕을 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혹시 카오루는 진짜 천사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나는, 카오루의 욕을 들으며 굉장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있다;; ".......종알종알 떠들지 말고 일해." 헉, 깜짝 놀랬다! 혹시 카즈도 사노랑 같은 여우족?;; "카즈야아~" "매달리지마. 일을 벌려놓은 건 너다." "치이, 알았다, 뭐..." 카오루는 가볍게 박수를 쳐서 손님들의 이목을 끈 후,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문할 꺼 있는 사람은 테이블로 와. 돌아다니면서 주문 받기 귀찮으니까. 돈은 주문하면서 내고 자리는 알아서 찾아. 테이블 자리 없으면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먹던지." "카, 카오루! 장사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시끄러워. 빨리 팔아버리고 놀고 싶단 말이야." 카오루는 내 팔을 가볍게 뿌리치고 카운터에 앉았다. 문 밖의 손님들은 안의 눈치를 볼 뿐, 들어오려고 하지는 않는다. "카즈야, 손님들이 돈내면 안에서 음식 가져와. 슈야, 너는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이름들을 주방에 알려주고." 카즈는 불만 어린 시선으로 카오루를 바라보았지만, 별 대꾸 없이 카오루의 곁에 섰다. 문 밖의 손님들은 카즈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웅성거렸지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다. "빨리 올 수록 좋아. 빨리 사서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까." 카오루의 말에, 문 밖에 서 있던 손님들 중 한 두명이 달려와 줄을 섰다. 곧 손님들은 교실이 떠나가라 달려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줄은 앞문에서 뒷문으로 이어져 복도까지 나갔다. "거 봐, 이렇게 하길 잘했지?" 어린아이처럼 우쭐거리며 말하는 카오루였다. 오후 5시쯤이 되니, 그 많던 손님들의 줄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반에서 띵깡띵깡 놀던 다카오카가 나타나 내 일을 대신해 주는 덕분에, 나는 구석에 앉아 있다가, 손님들이 무언가를 흘리거나 하면 티슈를 가져다 주는 소일거리를 맡았다. 카즈는 간간히 카오루와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웠지만ㅡ아니, 일방적으로 구박했지만ㅡ대부분 카오루의 애교어린 윙크(!)로 넘어갔고, 다카오카는 의외로 카오루와 죽이 잘 맞아서 시시덕 거렸다. "이봐, 여기 휴지 좀 가져와봐!" 나는 다 구겨진 드레스를 탈탈 털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대머리가 번들번들 거리는ㅡ왠지 [나 변태요]하고 얼굴에 써붙인 듯한ㅡ중년 아저씨가 손을 흔들고 있다. "여기요." "....고거 참 예쁘게 생겼네." 찐득찐득한 눈으로 쳐다본다. 짜증나는 놈. "휴지나 받으세요." 아저씨는 레몬티가 묻은 셔츠, 그러니까 가슴 부분을 내밀면서 말했다. "좀 닦아줘봐." "....직접 닦으세요." "손님이 하라면 할 것이지, 뭐 이리 말이 많아?" 아저씨의 크고 텁텁한 손이 손목을 붙잡았다. 순간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야, 너 죽고 싶어?" 그래, 내가 그 말을 하려고 했.... "짜증나는 기름 덩어리 주제에, 감히 어딜 잡아!!" "카...오루?"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 카오루는 주방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생선칼을 휘두르며 소리질렀다. 아저씨는 '커헉'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사렸다. "도망가? 감히 도망가?!!!" 난 나도 모르게 카오루에게서 주춤 물러섰다. 카오루의 눈이 광기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또 무슨 일이야." 카즈가 카오루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카오루는 이를 박박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미친 자식이 슈야한테 지랄을 떨었어!!" "말려, 카즈! 카오루 저러다가 정말 찌르겠...." 퍼억ㅡ "신성한 학교에서, 신성한 학생에게 추근거리면 안돼지." 맙소사... 카즈는 구둣발로 바닥에 앉아 있는 아저씨의 머리를 걷어차며 말했다. 순간,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학생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저 자식이, 드레스 입은 애한테 추근 거렸어요!!" "조져버려요!!" "쫓아내요!!" .....아니, 환호성이다. 카즈가 빙긋 웃으며 환호성에 가볍게 답하자, 환호성의 내용이 좀 더 잔인해졌다. "죽여버려요"라던지 "칼부림해버려요"라던지.... "돼지 주제에." 카오루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아저씨는 주위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허둥지둥 교실을 뛰어나갔다. 몇몇 학생 손님들은 빈 종이컵을 말아서 아저씨의 등에 집어던지거나 해서, 카오루는 통쾌하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아아, 이 학교 무지 마음에 들어. 최고야." 한참 웃던 카오루가 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한 말이었다. [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33 "카즈야, 가는 거야?" "어." 카즈는 넥타이를 바로매며 걷어올렸던 소매를 내렸다. 카오루는 조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을 나서던 카즈는 계속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카오루를 돌아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 있어. 다른 데 가지 말고." 카즈가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하자, 카오루가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카즈는 카오루의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눈짓을 했다. "잘 가." 내가 손을 흔들며 말하자, 카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카오루는 그런 카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흰둥아." 뒷정리를 하던 다카오카는 카오루의 어깨에 팔을 터억 얹으며 말했다. 카오루는 앞문에 서서 미동도 없이 카즈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다카오카는 땀에 절은 리본을 풀며 카오루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카오루는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다카오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카즈야, 너무 예쁘지?" "예쁘긴. 네가 더 예쁘다." "헤헤~ 정말?" "고럼! 사나이 다카오카,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다카오카의 말에 카오루가 귀엽게 웃는다. 다카오카는 카오루를 따라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다. "원숭아, 그럼 말이야. 내가 예뻐, 슈야가 예뻐?" "으응?" 다카오카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다카오카에게 입모양으로 '카오루'라고 말했다. "다, 당연히 우리 흰둥이가 더 예쁘지! 고럼고럼!" "헤에.... 정말?" 카오루는 희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엥?" 나는 고개를 돌려 카오루를 바라보았다. 카오루는 나를 등지며 다카오카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난 정말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뭐야, 우리 흰둥이 짝사랑하냐?" "응, 10년도 넘게 좋아한 사람...." "흐에엑! 10년을 넘게?" 카오루의 목소리가 쓸쓸해졌다. "그런데 걔는 내가 별로래. 아니, 싫데. 예전엔 날 좋아해줬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싫어졌데." "흐미, 대체 어떤 자식이 걜 꼬셨어? 너보다 예쁜 자식이야?" .....바로 네 뒤에 서 있잖아, 다카오카. "못생겼어. 아주 못난이야." 카오루는 고개를 홱 돌렸다. 다카오카는 곤란한 표정으로 카오루의 등만 도닥거려주었다. "무지 재수없다. 누군진 몰라도." "....하지만 미워할 수가 없었어. 그 사람이, 그 아이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부터." 카오루의 가느다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카오루를 향해 뻗어져 나가는 손을 간신히 억눌렀다. "....게다가 그 아이, 무지 좋은 애다? 참 재수없지? 차라리 싸가지가 없는 애였으면 마음 편히 미워했을텐데...." 카오루는 앞치마를 풀어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아이는 친구들도 많고.... 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그래서 어쩔 땐, 그 아이의 모든 걸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날때가 있어. 그 아이와 나는 같은데.... 너무나도 달라서.... 난 이렇게 슬픈데.... 왜 그 아이만 행복할까, 하고." 카오루는 손바닥으로 눈을 훔쳐내며 말했다. 다카오카는 머뭇머뭇 거리다가 카오루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가 슬퍼하고 좌절하는 순간에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꺼야. 비록 네가 그 사람을 볼 수 없을지라도, 그 사람을 늘 네 행복을 바라고 있을꺼라고." 다카오카는 카오루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거리며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데. 그러니까, 너도 분명 행복해 질 수 있을꺼야." ".....고마워." 카오루는 다카오카, 아니 나를 향해 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마워, 다카오카...." "에엣? 뭐, 고마울 꺼 까지야...."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짓고 빈 의자에 걸터 앉았다. [모든 사람은 행복해 지기 위해 태어난다]라.... .....글쎄, 맞는 말 같기도 하네. 카즈를 만나기 전의 나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나 따윈, 전혀 상상할 수 없었겠지. 그 때의 나는.... 모든 사람들을 저주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이런 음습진 곳에, 오직 나 혼자 있다고.... 그렇게 울었으니까.... 하지만 카즈를 만나고.... 내가 숨쉬는 것 자체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다카오카를 만나고.... 겐지를 만나고.... 사노를 만나고.... 나를 소중하다고 여겨주는 사람들과.... 내 말에, 이 곳으로 이끌려져 나온 사람들을 만나.... 이제는 자신있게.... 행복하다, 라고 말할 수 있어. 그리고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 카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다카오카가 카오루에게 했던 것처럼. "슈야." "응?" "나, 잠깐 흰둥이 좀 배웅하고 올께. 뒷정리 좀 부탁해." "응."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카오루를 돌아 보았다. 카오루는 울어서 발개진 눈을 하고 있었지만, 눈이 마주치자 헤죽 웃어보였다. "잘 있어, 못난이." "가는거야?' "응. 아빠가 늦지 않게 오라고 했거든." 카오루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카즈한테 전해줘. 그냥 가서 미안하다고." "응...."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카오루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돌아섰다. "슈야, 사진찍자~" "헤에?" 어디선가에서 즉석 카메라를 들고온 센도가 싱글벙글 하면서 말했다. "슈야가 드레스를 입을 일은, 두번 다시 없을테니까 말이야." "그, 그럼 지금 드레스 사진을 찍자는 거야? 너, 죽고 싶어?" ".......찍자." 나는 카오루에게 눈을 돌렸다. 카오루는 샐쭉 웃으며 말했다. "네 못난이 사진, 좋아할 만한 사람 있잖아?" 카, 카즈가.... 조, 좋아할까....? 에.... 어, 어쩌면.... 좋아할...지도.... "그, 그럼 딱 한장만...." "두 장." 카오루가 손가락 두개를 내보이며 말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장?" "한 장은 내가 가질꺼야." "히이이익?" "걱정마. 네 못난 얼굴,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생각 없어." 카오루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그냥.... 욕하고 싶은데, 네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때, 꺼내보려고 그러는거야." 왠지... 기뻐. "고맙지?" "으응?" "욕 먹으면 오래 산다잖아. 너, 벽에 똥칠하고 오래 살라고, 이 카오루 님이 욕을 해주겠단 말이야." "아아... 고마워;;"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카오루가 입을 삐쭉거리며 눈을 흘겼다. "칫, 바보같아." "자자, 슈야. 창가에 서봐." 내가 머뭇머뭇거리며 창가에 서자, 센도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셋하고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ㅡ 다카오카가 사진을 받아들자, 센도가 다시 한번 숫자를 셌다. 찰칵ㅡ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혀나오자, 카오루가 재빨리 사진을 챙겨들고 앞 문쪽으로 쪼르르 달려나갔다. "가자, 원숭아!" "어? 알았어, 잠깐만." 다카오카는 사진을 나에게 건네주고는 카오루를 향해 달려갔다. 카오루는 나를 향해 사진을 흔들며 말했다. "이 못생긴 사진은, 이 몸이 잘 보관해줄테니까 걱정마. 사실은 저주를 걸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저주 거는 방법을 몰라서."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카오루. 언제 또 놀러와." 내가 손을 흔들며 말하자 카오루가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오지 말라고 해도, 나타나서 괴롭혀 줄꺼다~ 베에!" 나는 학교를 폴짝폴짝 뛰어나가는 카오루를 내다보며 쿡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왠지, 마음을 붕붕 들뜨게 하는 행복한 기분ㅡ. 이 기분이, 카오루에게 전해 졌으면 좋겠어. [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34 나는 텅빈 교실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피를 머금은 듯한 하늘이 그 핏기를 토해내며 어둠으로 물들 무렵ㅡ. 교실 문이 열리며 켄지가 들어왔다. "다녀왔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노을 때문인지, 밀린 배달 일들 때문에 지쳐서 그랬는지, 켄지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다른 애들은?" "캠프 화이어 구경하러 나갔어." "너는 안 가?" "응, 여기서 보는게 더 좋아서." 켄지는 한참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침묵이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옆의 책상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여기 앉아." 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 곁에 다가와 섰다. 난 왠지 켄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편해져서, 창 밖만을 바라보았다. "슈야." "응?" "넌.... 네가 아름답다는 걸, 알고 있니?" "이, 이봐! 드레스 따윈 아까 벗었다고! 농담은 그만 받기로 했단...." 켄지의 손이 내 머리카락에 닿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켄지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손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조금 과장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사실은 며칠동안 머리를 안 감아서 말이야;;" ".....슈야." "으응?" 켄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린 좋은 친구지?" "어? 어.... 그, 그럼! 낯간지럽게 뭘 그런걸 묻고 그래~ 아하...하..." "그래, 다행이다." 켄지는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을 그치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전에.... 대답을 못 들었는데 말이야." "으응?" "슈야는.... 사귀는 사람... 있어?" 나는 켄지를 올려다 보았다.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상당히 굳어져 있는 얼굴ㅡ. 나는 켄지를 외면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아... 역시 그랬...구나." 창문이 열리며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켄지는 창가에 기대서며 아까보다 편안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 "응... 착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야." "그래..." 켄지는 검은 테 안경을 벗으며 손등으로 눈을 부볐다. "그런데 다카오카는?" "아까 카오루를 배웅한다고 나갔는데, 여태 안 들어오네." "카오루?" "카.... 히데야키 선생님의 동생." ....사실은 형이지만. "동생? 히데야키 선생님의 동생?" "응." "어떤 사람이야? 히데야키 선생님하고 닮은 사람이야? 성격은 어때? 히데야키 선생님하고 비슷해?" "푸, 하나씩 물어봐." 나는 조금 편안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히데야키 하고는 하나도 안 닮았어. 성격도 그렇고." "아아.... 그러니까 다카오카하고 어울린 거겠지?" 켄지는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 때, 드르륵ㅡ 하고 앞문이 열리며 카즈가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소마군인가..." 카즈는 우리의 곁에 다가오며 말했다. "소마군, 오늘 배달일 하느라 수고 했어." "저야 맡은 일을 한것 뿐인걸요. 선생님이야 말로, 불평 한마디 없이 열심히 일해 주셔서,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불평이라면 혼자서 여러 마디 했는데 말이야." 켄지는 카즈의 중얼거림에 빙긋 웃었다. "그럼, 전 나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사노가 찾을 것 같아서요." 켄지는 뒷문 쪽으로 걸어다가, 나를 돌아보며 살포시 웃었다. 설마 켄지.... 알고 있는 거야....? "하늘, 예쁘다." 카즈가 내 옆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나는 카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카즈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카즈는 내 머리를 어깨에 대어주며, 내 어깨에 가만히 팔을 둘렀다. "오늘 힘들었지." "으응으응, 다들 열심히 일해줘서 별로 힘들지 않았어. 카오루도 열심히 도와줬고." 나는 조심스럽게 카즈를 올려다 보았다. 카즈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상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카즈...." "어." "다케조한테.... 무슨 말 했어?" 카즈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며 먼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 싸늘한 눈빛에, 난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걱정되는 거냐? 그 녀석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카즈의 팔을 끌어 안았다. 카즈는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내가 두 팔로 꼭 안고 놓아주지 않자, 금새 단념하고 팔에 힘을 풀었다. "나, 그 녀석 따위는 어떻게 되도 상관하지 않아. 하지만.... 카즈를 더럽히는 건 싫어."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카즈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카즈는 가만히 내 손을 감싸쥐었다. "카즈는 나의 왕이야. 메마른 축복의 대지를 다스리는 사막의 왕ㅡ." 카즈는 잡아끈 내 손바닥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나는 카즈의 품에 파고 들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의 왕을 더럽히는 자는.... 내가 죽여버릴꺼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꺼야." 카즈는 가만히 나를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아아, 나의 성자는 무척이나 과격하군." "성자....?" "사막을 다스리려면, 메마른 땅을 적셔줄 신의 성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카즈는 내 턱을 들어올리며 살며시 입술을 포개왔다. 나는 목마른 사람처럼 카즈의 입술에 매달리며 목에 팔을 둘렀고, 카즈는 저번처럼 어깨를 밀어내는 대신, 내 등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내가 목마름을 간신히 해결했을 무렵, 카즈가 살짝 입술을 떼어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후, 신이 화내겠군." "으응?" "신의 성자에게 이런 짓을 해버렸으니 말이야." 내가 킥 웃자, 카즈가 내 뺨을 쓸며 다시 입을 맞춰왔다. 부드러운 입술과 매끄러운 혀가 너무 유혹적이어서, 나는 자꾸만 카즈의 입술 속에 파고 들었다. 순간 몸이 이상하게 기운다, 싶더니 책상이 뒷머리 닿아왔다. "카, 카즈?" 카즈는 긴 손가락을 입 앞에 가져가며 내 어깨를 눌렀다. 마지막 힘을 짜내는 노을이 카즈의 머리칼을 붉게 물들였다. 카즈는 천천히 몸을 낮추며, 내 귓가에 녹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참았어. 더 참으라고 한다면, 불타 죽어버릴지도 몰라." "하, 하지만 여긴 학교고.... 중간에 다른 애들이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카즈는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래도 스릴 있잖아?" "으윽;;" 나는 카즈의 가슴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양호실로 가..." "아아, 그런 장소를 원하는 건가." "그, 그런 게 아니야, 바보!" 나는 피가 몰린 얼굴을 카즈의 품에 숨기며 말했다. "양호실이라면.... 창문을 가릴 필요도 없고.... 문을 잠궈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거길 내려갈 동안 참을 수 있을지가 미지수인걸?" 나는 카즈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눈을 빛냈다. "뛰어가자." "응?" "뛰자고." "이, 이봐...." 나는 카즈의 손을 잡고 재빠르게 교실을 뛰어나왔다. 스포츠카 경기를 하는 것처럼 벽에 손바닥을 대고 쭈우욱 밀어내고,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내려왔다. 숨이 가빠오지만 왠지 웃음이 나온다. "하아... 푸.. 푸하하하..하아...하아..." "슈야... 너 괜찮은거냐?" "응! 기분 최고야!" 나는 카즈를 양호실에 밀어넣고(!) 양호실 문을 잠궜다. 카즈는 갑자기 기운이 펄펄 넘치는 나를 얼떨떨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정말.... 괜찮은거야?" "그렇다니까~ 자자, 빨리빨리~" "빠... 빨리?;;" 나는 양호실 침대에 걸터 앉아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카즈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부스스하게 쓸며 내 옆에 걸터 앉았다. ".......란 말이야." "뭐?" 나는 열이 오르는 얼굴을 푸욱 떨구며 말했다. "카즈만 참은 거.... 아니란 말이야." ".....풉!" "웃지마! 웃으면, 나 안해!" "알았어, 알았어." 카즈는 웃는 얼굴로 나를 달래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기절하면 곤란할텐데." "절대 기절 안해! 세 번도 끄떡없어!" 카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려 버리는 카즈ㅡ. ".....푸훕! 아하하하~" "아, 웃지 말라니까!!;;" "아아, 미안미안." 카즈는 나를 바라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세 번도 끄떡없단 말이지....?" "에에, 말이 그렇....." 카즈는 내 어깨를 감싸쥐며 빙긋 웃었다. "중간에 [스톱] 부르면 화낸다." ...................... ...................... ...................... ...................... ...................... ...................... ...................... ...................... .....나 뭔가 실수 한거 같은데?;; [黑香]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35 "카즈." "응." "카즈는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 내 물음에, 카즈는 내 뺨에서 입술을 떼내며 빙긋 웃었다. 나는 카즈의 목을 끌어안으며 재촉하듯 되물었다. "응? 말해봐. 언제부터 좋아했어?" "글쎄.... 싸가지 없는 꼬마가 비에 축 젖어서 재워달라고 문을 두드렸을 때부터였나." "거짓말. 그 때 무지 짜증냈잖아. 미친 개한테 단단히 물렸다고." 내 말에 카즈는 낮은 목소리로 쿡쿡 거리고 웃었다. "그럼 너는?" "나? 음.... 앞치마를 맨 카즈를 보고." "하필이면 왜 앞치마야...;;" "앞치마를 입은 모습이 너무 예뻤거든. 그래서 내 마누라 삼아야지ㅡ 하고 생각했지." 카즈는 푸ㅡ 하고 짧게 웃고는, 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런데 항상 마누라한테 깔려서 어떡하지?" "윽....." 나는 열에 달아오른 얼굴을 카즈의 품에 숨겨버렸다. 카즈는 내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내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나는 카즈의 어깨를 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두고봐. 앞으로 열심히 커서 언젠가는...." "언젠가는?" "에.... 그러니까.... 언젠가는...." "아아, 날 밑에 깔아보시겠다?" 카즈는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게 과연 네 마음대로 될까?" "이잇, 될꺼야! 진짜진짜, 언젠가는 카즈가 찍소리 못하게...." ".....재갈 물리고 채찍질 하려고?" "이봐아, 난 변태가 아니야!!;;" 라고는 말했지만, 하지만 카즈는 고통스러워 하는 얼굴도 아름답지 않을.... ........................ ........................ ........................ ........................ ........................ ........................ ........................ ........................ ........................ 헉!! 내, 내가 무슨 생각을!!;; "슈야." "으, 으, 으응?"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여." "허억!" 카즈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후.....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묘한 것에 관심을 가지는 군." "아, 아니야!! 그, 그냥.... 새, 생각만 조금...." "아아, 걱정이 되서 살 수가 있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양손은 침대에 묶여있고, 그 앞엔 채찍을 든 꼬마가...." "상상하지마!!;;" 나는 카즈를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절대로 안 때려! 절대로! 절대로! 이렇게 예쁜 카즈를, 내가 어떻게 때리겠어!" ".....정말?" 카즈는 살짝 눈을 뜨며 물었다. 크어어어, 이러다 유혈 사태가 발생하겠어;; "슈야, 얼굴이....."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전혀! 아무것도 아니야!" "전혀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아니,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황해서 말도 안나오네;; "너, 고양이 같아." "고양이?" "응. 강아지풀에 발광하는 고양이." ".....바, 발광;;" 카즈는 쿡쿡 거리고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바닥, 기분 좋아ㅡ. "착하지.....? 할퀴면 안됀다....?" 나는 카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정신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시르륵ㅡ 하는 소리와 함께 넥타이가 풀려져나가자, 남방 난추는 순식간에 끌러졌다. 나는 살짝 몸을 일으켜 카즈가 옷을 빼내는 것을 것을 도운 후, 카즈의 넥타이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손이 후들후들 떨려서 제대로 풀려지지가 않았다. "...내가 할께." 카즈는 내 손을 살짝 잡아 내려놓으며, 다른 손으로 넥타이를 풀어냈다. 살짝 고개를 돌리며 넥타이 끈을 잡아당기는 카즈의 옆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순간 나는 멍해져버렸다. "...슈야...?" "으, 으응?" 카즈는 바보같이 대꾸하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너무 예뻐서." 카즈는 웃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는 두어번 주먹을 쥐었다 편 후 조심스럽게 카즈의 단추를 풀어냈다. 툭ㅡ 하는 소리를 내며 옷깃이 벌어질때마다 드러나는 매끄러운 몸에 숨이 턱 막혀왔다.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만 말이야..." 카즈가 내 입술을 살짝 핥아내며 말했다. "아직까지 설레이는 걸 보면 빠져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야." "에.... 에에?" "매일매일 안아도, 금새라도 눈물을 뚝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으면, 숨이 꽉 막힌다고." "나... 나같은 걸 보고도 가슴이 설레...?" "나같은 거라니." 카즈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처음이었다고. 나를 설레게 한 건 말이야." "에에, 하지만.... 내가 카즈라면, 거울을 보고 늘 설레일텐데....." "푸ㅡ 내가 무슨 나르시스냐." 카즈는 짧게 웃으며, 보드라운 입술을 내 입술 위에 살포시 얹었다. 이 때를 기다렸다고 열심히 달려들자, 카즈가 입을 꾹 다물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팍 인상을 쓰자, 카즈는 입술을 떼어내며 소리내어 웃어댔고, 나는 그런 카즈를 무지무지 째려주었다. "아하하... 쿨럭... 하하..." "웃지마!" 카즈는 몇번의 헛기침 끝에 간신히 웃음을 그치며ㅡ하지만 아직까지 웃겨서 죽겠다는 얼굴로ㅡ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쌓였었구나, 슈야..." "시, 시끄러!" 카즈는 쿨럭 거리며 엄청나게 웃어댄 후,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아아.... 나 웃겨서 못하겠다;;" "못해?" 나는 눈을 번쩍 빛내며 카즈를 끌어안고 한바퀴 뒹굴 굴렀다. 좁은 침대위에서 구르느라 조금 고생했다. 하지만!! 아하하하~ 내가 위다! ".....카즈, 죽었어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카즈는 뒤늦게 내 말을 알아듣고 픽 웃었다. "어디 해봐. 유혹해 줄테니." 카즈는 옷을 반쯤 풀어내며 붉은 미소를 띄고 나를 올려다 보았다. ......살인적이다..... "왜 안해? 해보라니까." .......어, 어떻게 할까.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에에..... 피는 바글바글 끓는데, 어떻게 해야할지를..... "....선심써서 깔려줬더니." 하는 말과 동시에, 카즈의 팔이 내 목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힘에 눌려 몸을 낮추자 카즈의 말캉말캉한 혀가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키스만으로도 하늘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후...." 카즈는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내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3번까지 버틸수 있다며. 벌써부터 돌면 곤란해." "....아, 아냐! 끄떡 없어!" "아아, 그래?" 카즈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자,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며 보들보들 떨렸다. 나는 떨고 있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카즈의 등을 꼭 끌어안은 채 작은 돌기를 핥아냈다. 카즈는 깊은 숨을 몰아쉬며 나직하게 말했다. "버티지 못할 것 같으면 말해. 여기서 기절하면 정말 곤란하니까." "으응..." 이번에는 고집 피우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떡였다. 카즈는 빙그레 웃으며, 내 뺨을 부드럽게 핥아내렸다. ".....강아지." "으응?" 카즈의 차가운 손이 허벅지에 닿자, 순간 움찔해 버렸다. 카즈는 그런 나를 보며,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어린...." 탕탕탕ㅡ.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계시면 문 좀 열어주세요! 선생님!" 카즈는 내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생각 같아서는 확 잡고 싶지만.... 그러면 카즈가 곤란해 할테니까.... "후, 돌게 하는 군." 카즈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요염해서, 하마터면, 정말 붙잡아 버릴 뻔했다. "여기 있어." 카즈는 내 머리에 살짝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잠깐만 기다려." 카즈는 문을 향해 말하고, 바리켓으로 내가 앉아 있는 침대를 가렸다. 나는 이불을 끌어덮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에서 카즈 향기가 난다ㅡ. -......겠어?- -응?- 카즈는 나를 향해 돌아서며 빙긋 웃었다. 빛이 산산히 부서지는 듯한 미소다. -나를 원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리와.- 카즈는 몸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천을 어깨까지 끌어내리며, 살쯕 등을 돌렸다. 내 발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카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더 가까이 와- 카즈는 살짝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새하얀 천사와 같은, 내 입술과 손으로 더럽혀 버리고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단아한..... -어서- 카즈는 천을 허리까지 끌어내리며 나를 살짝 돌아보았다. 나는 천천히 팔을 뻗어 카즈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어째서인지, 나보다 큰 카즈가 내 품에 쏙 들어왔다. -빨리....- 카즈가 유혹을 하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정신 없이 카즈의 입술을 탐했다. 카즈의 입술 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아,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카즈의 입술이 마른 천처럼 빳빳했다. -.....야?- 나는 카즈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인지 눈 앞이 몽롱했다. -.....좀 차려봐. 슈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슈야, 괜찮아?" "우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내 앞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카즈를 보고 빽 비명을 질러버렸다. 카즈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 뭐야. 무슨 악몽이라도 꾼거야?" 악...몽.... 차라리 악몽이면 나아!! "슈야?" 겨우 며칠 참았다고 그런 꿈을 꾸다니... 최악이다!! 이건 정말.... 욕구불만이잖아!! "이봐,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미, 미안해." "뭐?" "미안해....!!" 나는 카즈의 어깨를 확 밀쳐내고 양호실을 달려나왔다. 얼마나 얼굴에 피가 몰렸는지, 어지러울 정도였다. "최악이야! 정말 최악이야, 하나마치 슈야!" 나는 왁왁 비명을 지르며, 옥상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이대로 달리지 않으면 창피해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하아.... 하아...." 나는 옥상 난간에 팔을 얹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아, 하늘이 노랗다. "하아... 갑자기.... 하아.... 도망가버리면.... 콜록... 어쩌자는 거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옥상 문에는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카즈가 서 있었다. "카, 카, 카, 카, 카즈?!" "....내 이름은 [카, 카, 카, 카, 카즈]가 아니야." 카즈는 살짝 머리를 뒤흔들며 말했다. 나는 내 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카즈를 보고, 난간에 바짝 몸을 기댔다. "말해봐. 도망간 이유를." "도, 도망이라니.... 내가 언제...." "지금도 도망가고 있잖아." 카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난감하다. [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36 "......왜냐고." 카즈가 한 걸음 다가오고, 내가 한 걸음 물러섰다. 등에 닿는 옥상 난간의 차가운 감촉에 등꼴이 오싹해졌다. "말해." 카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 표정마저 어찌나 예쁘던지, "확 더 화나게 해버려?"하는 위험한 생각이 팔짝거리며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말 안할꺼냐?" 카즈가 짜증이 배여나오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새까만 하늘 님의 엉덩이를 푹 찌르며 말했다. "카, 카즈!! 나, 날씨가 참 좋지이!!" ".......말 돌리지마." "네, 네넵." .......하나마치 슈야, 이렇게 비굴해지는 구나;; "말해." "뭐, 뭐를?" "다짜고짜 밀어내고 도망간 이유." "아....하하하;; 내, 내가 언제 도망을...." 난 단지..... 에.... 그, 그래!! 철 지난 마이클 잭슨 춤을 연습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뒤로뒤로 움찔움찔 춤 알지? 그게 바로 이거라니까~ 아하하하;; "....도망가지 말라고 말했을텐데?" 카즈의 팔이 내 어깨를 잡는 순간, 심장이 바닥에 뚝 떨어지면서 팍 터져버렸다. 허허~ 저렇게 터져버리면 꿰매기도 힘들건데;; "말해." 카즈는 내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럼, 넌 조랑말해~"라고 하면 욕먹을 것 같은 분위기다;; "사실은..... 아까 살짝 잠에 들었는데, 꿈에서 카즈가 홀라당 벗은 채로 하얀 천 하나만 두르고, 날 유혹하지 뭐야? 그래서 [얼씨구나, 좋다~]하고 덮쳐들었지. 그런데 꿈에서 깨어보니까, 내가 이불을 잘근잘근 물고 있지 않겠어? 아하하하~" ..........라고 어떻게 말하냐, 이 썩을 놈아!!;; "마, 말 못해." ".....못해?" 카즈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카즈의 좁혀진 미간을 펴며 헤죽 웃었다. 이 정도면, 지존급 비굴이 아니겠는가. 아하하하~;; "화나게 하지 말고 말해." 카즈가 다시 인상을 쓰며 말했다. 으으, 비굴 모드가 안 통한다면, 심각 모드다! "....말하기 곤란한거야." 내가 심각하게 말하자, 카즈가 내 어깨를 잡고 있던 팔을 내렸다. 휴우, 이걸로 넘긴건가? ".....알았다." 카즈는 그대로 몸을 돌려 옥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이, 이게 아닌데?;; "카즈!!" 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 벌써 복도까지 내려간 카즈의 팔을 꽉 움켜 쥐었다. 카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뭐야." 뭐긴!! 사람이지!!;; "화, 화났어?" "됐어." 카즈는 내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카즈의 등을 향해 빽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 그래!! 나, 욕구불만이다!! 그래서, 응, 야한 꿈 꿨다!! 어쩔래!! 이, 이씨... 따지고 보면 다 카즈 탓이야!! 카즈가... 응.. 그러니까... 에... 아무튼 카즈 탓이야!!" ".....야한 꿈?" 카즈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난 카즈의 입을 틀어막고, 재빨리 카즈를 옥상으로 끌고갔다. 카즈는 끌려오는 내내 굳은 얼굴이었다가,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말뜻을 이해한 듯한 얼굴을 했다. "야한 꿈을 꿨는데.... 내가 나왔다 이건가?" "확인 사살하지마, 이 썩을 놈아." 나는 바닥에 주저 앉으며 고개를 푸욱 떨궜다. "....그렇게 두번 안 찔러도, 충분히 창피해 하고 있단 말이야...." "................." 분명 "푸하하하하~"하고 웃겠지. 눈물까지 줄줄 흘리면서 말이야. ....이건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어쩔 수 없군! "차원의 문아, 열려라!!" 나는 허공을 향해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자자, 얼굴에 피가 몰려 호흡이 곤란해 질정도로 창피할 때에는, 다같이 "차원의 문아, 열려라!!"라고 외치며 다른 세계로 도망가 버리자고!! "현실도피 하지마." 카즈는 벽을 향해 달려가는 나를 붙잡으면서 말했다. 내가 팔을 뿌리치려고 바둥바둥 거리자 카즈가 나를 와락 끌어 안았다. "그만 하라니까.." 카즈가 "푸하하하하~"하고 웃는 대신, 가만히 내 등을 끌어안았다. 나는 슬쩍 카즈를 돌아보았다. 카즈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카즈로 돌아와 있었다. "후, 걱정이나 하게 하고... 대체 도망은 왜 간거냐." 카즈가 가볍게 책하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따끈따끈해진 귀를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창피하잖아." "그런 게 뭐가 창피하다고.... 알몸으로 춤추는 것 까지 본 사이인데." "히익!! 그, 그 얘기 안하기로 했잖아!!" "푸ㅡ 알았어, 알았어." 카즈는 짧게 웃고는 나를 끌어안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뭐, 뭐가?" "내가 널 초조하게 만드는 지 몰랐어. 넌 항상...." 나는 두 손으로 카즈의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푹 떨궜다. "말 안해도 알아." "뭘?" ".....맨날 도망만 가고, 어린애처럼 칭얼거리고." 카즈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괜찮아. 하지만 현실 도피 한답시고 벽을 향해 돌진하는 건...." 민망해진 나는 손가락만 꼼지락 거렸다. 카즈는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그런데 대체.... 그 [차원의 문아, 열려라!!] 라는 말의 정체가 뭐야?" "....만화에 나와." 나는 개미 발바닥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즈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혹시, 그 만화보고 많은 아이들이 뇌진탕으로 쓰러지지 않았어?" ".....애들은 그런 거 안 따라해. 철없는 어른이나,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가끔 따라할 뿐이지." "흐음, 그럼 우리 어린애는 방황하는 청소년 쪽에 들어가는 건가." 카즈는 나를 끌어안으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나는 움츠렸던 어깨를 조심스럽게 펴면서 카즈에게 등을 기댔다.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내 손등을 쓸던 카즈는, 문득 생각이 난 듯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카즈는 꿈 속에서 짓던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꿈에서, 내가 어떻게 유혹했는데...?" "무, 묻지마!!" "말해봐. 궁금하잖아." "......그냥..." "그냥?" ".....안에 아무것도 안 입고... 천 하나 달랑 둘러가지고..." 카즈는 내 눈을 응시하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걸 좋아하는 거야?" "아냐!!;;" "그래서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묘한 눈으로...." "아니라니까아!!;;" 카즈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후, 이젠 채찍질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누드쇼까지 해야하는 건가...." "제발 카즈!!;;" 카즈는 내 머리를 누르며 뭐라 입을 열려다, 내 입을 막으며 살짝 고개를 돌렸다. "에 으에? (왜 그래?)" "누가 오는 것 같은데.... 숨자." 카즈가 나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카즈를 따라, 옥상 가건물 뒤에 숨으며 눈을 찡그렸다. "대체 왜 숨어야 하는 건데?" "담배 피러 올라온 녀석이면 밟아주려고." "................." 카즈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주저 앉으며 나를 바짝 끌어 안았다. 카즈의 가슴에 귀를 가져가자, 콩 딱콩딱 거리는 소리가 났다. 좀비가 아닌 이상 당연히 뛰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므헤헤~"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보여?" "아직." 카즈는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아아, 누구 마누라인진 몰라도 참 예쁘다!! "아직도 안 보여?" "어." 달싹거리며 움직이는 입술이 딸기맛 사탕처럼 보인다. 나는 손가락으로 카즈의 입술을 쭉 잡아당기다가 낼름 핥아 버렸다. 당연한 거지만, 딸기맛은 안 났다. "왔어." 카즈가 내 손가락을 떼어내며 말했다. 나는 옥상 입구로 눈을 돌렸다. "소마하고 히로인가." 사노와 히로였다.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러 올라온 듯, 상당히 심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 건 히로였다. "알고 있지? 내가 히데야키 선생님 좋아하는 거." "응." 사노가 웃으며 말했다. 잠시지만 히로의 눈이 찌푸려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뭘?" "내가 히데야키 선생님 좋아하는 거." 사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미인인데다, 쌀쌀맞은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좋은 사람이니까." "....그냥 동경하는 게 아니야." "응?" "다른 녀석들 처럼, 동경으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고. 여자애를 좋아하듯이 좋아해. 사랑한다고." 사노는 왠지 비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이 있나." "호모 자식이라고 욕하지 않을꺼야?" "뭐....?" "너, 목사 아들이잖아. 교회에서, 동성애는 죄 아냐?" 사노는 난감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히로는 입술을 꼭 깨물며 사노를 노려보다, 사노의 어깨를 잡고 입술 도장을 꾹 찍어버렸다. "....미성년자 관람불가야." 카즈가 내 눈을 가리며 말했고, 난 그 손을 끌어내리며 킥킥 거리고 웃었다. 그 무렵, 히로의 도장 찍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무슨 의미야, 이건?" 사노가 화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왠지 기뻐보여;;) "좋아해." "뭐.....?" "좋아한다고." 히로가 말했다. 사노가 아니라, 히로가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갑자기]가 아니야.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어." "너... 히데야키 선생님을 좋아하는 거, 아니였어?" "그건.... 널 떠보려고 그런 거였어. 히데야키 선생님, 늘 상냥하게 상담에 응해 주셔서, 좋아하기는 했지만.... 널 좋아하는 거하고는 달라." 난 카즈를 돌아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카즈, 알고 있었어?' '어. 나한테 상담한 적이 있거든.' ....진작에 말해주지. 난 아무것도 모르고 사노하고 "타도 동맹"을 맺어버렸잖아;; 어쨌든, 갑작스런 고백을 받은 사노는 부시시하게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너, 중학교 때 여자애하고 사귄 적 있잖아." "....그 애랑 사귈까, 하고 물었을 때, [안돼]라고 대답해 주길 바랬어. 그런데.... 사노가 웃으면서 [미야자와, 좋은 애야]라고 말하니까...." 히로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절친한 친구여서.... 너무 좋은 친구여서.... 그래서, 그걸 좋아하는 감정으로 착각한 줄 알았어. 그래서....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 "그래서 갑자기 날 멀리했던 거구나." "......미안." 히로는 손등으로 눈을 훔쳐내며 말했다. "무서웠어. 이런 말하면.... 두 번 다시 날 친구로도 여겨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그럴리가 없잖아." 사노는 히로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며 말했다. 히로는 작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죄...잖아...? 내가... 사노 좋아하는 거.... 용서 받지 못하는.. 죄잖아...?" 사노는 히로의 양 어깨를 두어번 도닥거리며 말했다. "날 봐, 유키. 난 목사의 아들이지 목사가 아니야." 사노는 부드러운 눈으로 히로를 응시하며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죄가 될 수는 없어. 물론, 그것이 비뚤어진 모습으로 드러나면 곤란하겠지만." "사, 사노....?" "좋아해. 성경보다도, 하나님보다도 네가 좋아." 히로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사노를 바라보았다. 사노는 그런 히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만약, 내 솔직한 감정을 성경책이 막는다면, 난 성경책을 버리겠다고. 그리고 신이 내 순수한 감정을 막는다면, 난 신을 버리겠다고." "사노....."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 그 동안 많이 힘들었지?" 히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사노의 품에 안겼다. 아아, 이걸로 해피 엔딩인건가? 그런데.... 카즈 표정이 참.... 와작 밤을 씹었는데, 밤의 나머지 반쪼가리에서 반뎅강난 애벌레가 꼼질거리면서 "살려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얼굴이랄까. '카즈, 표정이 왜 그래?' '......닭 되겠군.' 카즈는 눈을 찡그리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는 카즈가 너무 귀여워서, 뺨을 잡고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해주었다. 그런데...... 카즈가 내 입술 안에 바람을 부는 바람에, 입술이 떨어질 때 "쪽"소리 대신 "뻥~"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카즈도, 나도, 눈이 동그래졌다. "거기 누구 있어?" 카즈는 뒷쪽으로 손짓해 나를 가건물 반대쪽으로 내보냈다. 나는 가건물 측면으로 도도도도 달려갔다. 내가 도망간 것을 확인한 카즈는 그대로 벌렁 누워서 자는 척을 했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사노와 히로는 카즈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섰다. "................." "................." 뭐, 뭐야. 왜, 왜들 저렇게 쳐다보고 있지? 부, 불안하네;; "미, 미안해." 히로가 사노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는데?" "나, 실은.... 방금 히데야키 선생님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사노는 히로의 손가락으로 입을 막으며 불그스레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 그러라면 나도 사과 해야 겠는걸. 나도 사실은 히데야키 선생님을 보고... 하하;;" .......보고 뭘 하려고 했는데? "악마다." 사노는 카즈를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은 진정 악마인거야." "으응;;" "가자. 이러다 정말.... 엄한 짓하겠다." 어, 엄한 짓? 감히 내 마누라(!)한테 엄한 짓을 하려고 했단 말이야?! "......웃기는 놈들." 사노와 히로가 옥상을 내려가자, 카즈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나는 슬금슬금 기어와 카즈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카즈." "어." "다카오카 앞에서 잠들지 않게 조심해." "왜?" .....그 녀석은 피 끓는 청춘이니까;; "조금 있다가 내려가자." "응." 나는 카즈의 앞에 털썩 주저 앉았다. 동시에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즈는 날 빤히 쳐다보다가 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꺼내는 것은... "히이이익!!" "...................." 카즈는 눈쌀을 찌푸린 채, 그 씹어먹을 드레스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던 카즈는 고개를 번쩍 들며 나를 직시했다. 나는 괜시리 쫄아서 어깨를 움츠렸다. "압수." "어, 어, 어째서?" 카즈는 혀를 내밀며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꾸를 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의미야!!;; "이거 유일본이지?" 카즈는 사진을 가운 안 주머니에 꼭꼭 넣어두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카오루한테도 한 장...." .....머리카락이 바짝바짝 떠오르면서, 뒷배경으로 벼락이 콰콰광 쳐준다면, 정말 끝내주겠다;; "그 자식에게 줬다고? 나한텐 보여주지도 않은 사진을?" "그, 그게...." "필요 없어. 유일본이 아니라면." 카즈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았다. 흐미, 화났나보네;; "카즈 화났어....?" "................." "에잇, 안돼겠다. 내가, 이것만큼은 정말 안 주려고 했는데...." 나는 두 팔을 머리위로 네모나게 잡으며 말했다. "이걸 가져!" ".....뭐야." "전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카즈 전용 인간 사진! 게다가 입체야!" 나는 팔로 머리 위로 네모를 만든 채, 몸을 뒤로 돌리며 말했다. 카즈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굴할 내가 아니다! "봐봐! 표정 변화도 가능해!" 내가 우는 표정, 웃는 표정, 화내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카즈가 고개를 푹 떨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괜한 짓을 했나 싶어서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데, 큭큭 거리는 웃음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웃는 거구나~ "봐! 목 돌리는 춤도 춰!" "푸훕...." "얼른 봐~ 아무때나 볼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푸....ㅂ.... 하....하하하하~" "웃기지? 웃기지?" 내 현란한(?) 목춤을 지켜보던 카즈는 고개를 끄떡거리며 고통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내가 코 찡끗거리기에, 귀 움찔거리기까지 보여주자, 카즈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날 끌어안으며 "그만...그만..."하고 항복 선언을 했다. "드레스 사진보다 좋지?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이 웃겨주는 사진이 또 어디있냐~" 카즈는 고개를 끄떡거리며 내 팔을 천천히 내렸다. "그런데, 실물이 더 좋아. 사진은.... 키스를 해주지 않잖아?" "으으으음, 그럼 어쩔 수 없이 실물을 줘야겠네." 카즈는 빙긋 웃으며 살며시 내 뺨을 감싸쥐었다. 나는 카즈의 앞에 바짝 다가가 앉으며 숨을 참을 준비를 했다. 드르르르르ㅡ. 카즈의 앞주머니가 부들부들 떨렸다. 카즈는 손을 내리며, 앞주머니에서 발발 떨고 있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썩을 눔." 내가 핸드폰을 노려보며 말하자 카즈가 픽 웃었다. 나는 카즈의 어깨에 기대 누웠고, 카즈는 핸드폰 플립을 열어 귀에 가져갔다. "히데야키 카즈야입니다." ".................." 카즈의 한쪽 눈썹이 천천히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카즈의 입에서 낯선 단어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37 한참이 지나도록, 카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핸드폰에서 들려오던 작은 목소리가 조금 크게 들리기 시작하자, 카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들립니다." [.................] "안 들립니다." [.................] "안 들린...." [지금 장난하냐!!!!] 카즈는 눈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낸 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들립니다!!!!" ..................... ..................... ..................... ..................... ..................... .....................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대화인데...;; [장난도 한두번이다.] 카즈는 핸드폰을 멀찌감치 떼놓은 채, 역시 큰 소리로 말했다. "안 들립니다!" [다 큰 놈이 애정 결핍이냐?] "안 들립니다!" [죽고 싶지?] "안 들립니다!" [간다. 그쪽으로.] "미쳤군요. 이 곳이 어딘지나 알고 오신다는 겁니까?" [.......안 들린다며?] 카즈는 인상을 구기며 눈을 꾹 감았다. 애써 화를 억누르는 듯 했지만, 눈꼬리가 쓱 치켜올라갔다. "끊겠습니다." [카즈.] ".....당신한테 카즈라고 불러도 좋다고 말한 적은 없을 텐데요?" [하하~ 아주 귀여워 미치겠구나. 홀라당 벗겨서 온 몸에 뽀뽀라고 해줄까?] "그 따위 농담은 집어치워." 카즈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으르렁 거리듯이 말했다. 말이 없었는지, 아니면 작게 말했는지, 그 말에 대한 대꾸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 웃기는군. 당신이 그러고도 아버지란 사람인가?" [................] "헛소리 하지마." [................] "내 몸에 손대면 죽여버리겠어." [................] "시끄러워." 카즈는 탁 소리 나게 플립을 닫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부시시하게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카즈의 손길에서 짜증이 배여나왔다. "기분 더럽군." 카즈는 난간에 바짝 기대 서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차갑지 않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카즈를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슈야." 카즈는 나를 돌아보며 팔을 벌렸다. 나는 천천히 카즈에게 다가가, 카즈의 품에 푹 파묻혔다. 카즈는 내 등을 바짝 끌어안으며 말했다. "....정화해줘." 나는 카즈의 어깨를 끌어내린 후, 카즈의 얼굴을 내 품에 파묻었다. 카즈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카즈의 어깨를 밀어내며, 나를 올려다보는 카즈의 눈에 살짝 입을 맞췄다. "내가 지켜줄께. 카즈를 괴롭게 하는 사람, 내가 혼내줄께." "....응...." "알지? 나 무지 센 거." "....응...." 나는 카즈의 등을 가만히 쓸다가, 운동장 쪽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어깨를 흠칫했다. 카즈는 나를 가볍게 밀어내며 옥상 난간으로 걸어갔다. 가만히 운동장을 내려다보던 카즈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놈들......." "왜 그래?" 난간에 가까이 다가가자, 왁왁 거리는 소리를 들려왔던 함성이, 묘한 박자를 띈 외침으로 들려왔다. 나는 불분명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나.와.라! 나.와.라!] "무슨 무대있나?" 카즈는 미간을 짚으려 빙글 돌아섰다. 나는 난간에 몸을 내밀고, 다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와.라! 나.와.라! 히.데.야.키.카.즈.야!] "뭐.. 뭐야?" 카즈는 흘러내려오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마녀 사냥이군." "마...녀사냥?" 카즈는 가운을 여며 잠그며 나를 돌아보았다. "슈야, 숨어 있어." "어어?" "숨어 있으라고." 카즈는 나를 가건물 쪽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나는 카즈를 두어번 돌아보다 가건물 뒤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옥상문이 열렸다. "여기있다!!" 한 놈이 소리치자, "우와아아!"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우당당탕 하고 무언가가 우르르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스무명은 되어보이는 놈들이 카즈를 둘러쌌다. "손대지 마. 내 발로 간다." 카즈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놈들의 손을 탁 뿌리치며 말했다. 나는 카즈가 옥상을 내려간 후에도 한참동안 바깥 상황을 주시하다, 조심스럽게 옥상을 내려왔다. 현관에 서 있던 사노는 나를 보자마자 급하게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사, 사노?" "빨리 와!" 사노는 가설 무대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사노에게 손목이 잡힌 나는 "미안! 미안!"하고 소리치며 사노를 따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녔다. "........를 봐!" "뭐?" "무대 위를 보라고!" 사노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자 음악 동아리인가 하는 녀석들이 떼거지로 보였고, 녀석들에게 둘러싸인 채 오만한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즈가 보였다. "소개합니다!! 아이카 고교 최고의 미인, 히데야키 카즈야!!" 저 녀석은.... 아마도 히카루일꺼다. 한번도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지만, 학교 유명인이라 이름은 안다. 외부 공연도 잘 다니는 데에다, 무대 매너가 좋아서 축제 때마다 선전하는 녀석이다. ".....[선생님]은 어디갔지?" "아아, 정정합니다. 히데야키 카즈야 선.생.님!!" 녀석의 말에, 주위에 있던 녀석들이 "와아아아!!"하고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 나는 양 귀를 들어막으며 사노를 돌아보았다. 사노는 귀를 막은 채 무대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 나에게 다가왔다. "슈야!! 나...... 했다!" "안 들려!!" "나, 히로한테 고백했다고!!" ......에에, 아까 봤는데;; 그래도 예의상 물어봐 줘야겠지? "그래서 히로가 뭐래?!!" "좋데!!" "정말?!!" "응!! 그래서 사귀귀로 했다!!" ".....엇, 사노 여자친구 생겼냐!!" 나는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다카오카와 켄지, 그리고 센도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야!! 봤어?! 히데야키, 마녀 사냥에 끌려가던데!!" "저기 무대 위에 있어!!" "정말?!!" 우리는 무대 위로 고개를 돌렸다. 공연 중인 녀석들에게 둘러싸인 카즈는 별 미동도 없이 한 곳 만을 응시하고 있다. "슈야, 어떻게 할꺼야?!!" 켄지가 나를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어떻게 하다니?!!" "선생님, 그냥 둘꺼야?!!" 다카오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와 켄지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고, 눈치 빠른 센도는 고개를 끄떡끄떡 거렸다. "벗.어.라!! 벗.어.라!!" 한 두명이 소리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전교생들이 "벗.어.라!!"하고 소리치기 시자기했다. 카즈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히카루를 돌아보았고, 히카루는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씩 웃었다. "....죽여버린다." 히카루가 마이크를 가져가자, 카즈가 짧게 말했다. 그 말에, 함성은 더욱 커져버렸다. "자자, 박자를 맞춰 주세요!! [벗.어.라! 벗.어.라! 히.데.야.키.카.즈.야!]입니다!!" ....저 녀석이 주동자였군. "슈야!! 어떻게 할꺼야!!" 켄지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나, 나보고 어쩌라고!!" "끌고 와야지." 센도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무대 위에 올라가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카즈를 끌고 내려올 위인이 아니란 말이야;; "그만." 카즈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 순식간에 좌중은 조용해 졌다. 카즈는 살짝 고개를 돌려 교장이 있는지를 확인하고는, 짜증이 배여나오는 손길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가운을 벗었다. 아까의 외침에 두 세배는 더 되어 보이는 괴성(?)이 들려왔다. "슈.... 다카오카!! 부탁해!!" 켄지는 다카오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별 감 흥없이 무대 위를 올려다보고 있던 다카오카는 흠칫 놀라 켄지를 돌아보았다. "뭐, 뭐를?!!" "선생님, 끌고 내려와!!" "내, 내가 왜!!" "여기에서 네가 가장 얼굴이 두껍잖아!!" 카즈는 벌써 정장 마이까지 벗고 있었다. 피가 머리로 치솟아 오르는 느낌에, 등꼴이 오싹해졌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켄지는 발을 세게 구르며 소리쳤다. "다카오카!!" "알았어!! 가면 될꺼 아냐!!" 다카오카는 남방 소매를 어깨까지 끌어올리며 투덜거렸다. "켄지, 이 자식.... 왜 챙기지도 않던 놈까지 챙기고 그래!!" "시끄러워. 가려면 빨리가." 센도가 다카오카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다카오카는 "으씨, 차지마!!"라고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에 탁 침을 뱉고 무대 난간을 붙잡았다. "다카오카!!" "알았다니까, 이 자식들아!!" 카즈는 남방의 소매 단추를 풀다가 천천히 좌중을 훑어보았다. 나, 나를 찾는 건가.... "벗.어.라!! 벗.어.라!!" 카즈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넥타이에 손을 가져갔다. 주위 녀석들의 환호성에, 살며시 내리깐 카즈의 긴 속눈썹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만!!" 무대 위에 올라간 다카오카가 카즈를 향해 소리쳤다. 카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카오카를 쳐다보았다. "됐어. 거기까지." 다카오카는 입고 있던 교복 마이를 카즈를 향해 집어던졌다. 카즈가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자, 다카오카가 우리쪽을 향해 돌아섰다. "내가 대신 벗는다." "뭐, 뭐야, 쟤?" "다카오카다!! 센츠우치 주장이야!!" 카즈가 무대 계단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히카루가 카즈를 가로막았다. 그 때, 켄지가 갑자기 무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케, 켄지?!" 켄지는 재빨리 뛰어가 히카루의 배를 걷어찼다. 히카루가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자, 무대 뒤에 서있던 전자 음악 동아리 녀석들이 켄지에게 달려들었다. "재미있겠는데?" 센도는 씨익 웃으며 무대 위로 올라가 켄지에게 달려드는 녀석들에게 몸을 부딪혔다. 우당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센도와 두 세명이 나자빠졌다. 사노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무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뭐, 뭐야, 갑자기?!" "왠 난장판이야?!" "어라, 쟤 3반 반장 히로우 사노 아냐?" 사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이크를 집어들며,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제군들!! 임무다!!" 사노는 카즈를 가리키며 말했다. "히데야키 선생님을 보호할 것!! 종료시간은 축제가 끝날때까지이다!!" 잠시 후, 뒷쪽에서 "우와아아아아!!"하는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눈에 낯익은 녀석들이 무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자! 이기자! 패자에겐 죽음 뿐!" ......머, 멋지다, 우리반. 순식간에 무대를 점령한 우리 반은 전자 음악 동아리 녀석들을 무대 밑으로 집어던지고 위를 점령했다. 가슴이 찡하고 울리면서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가자, 제군들!! 아이카의 악마를 지키자!!" 사노의 지휘하에, 성공적으로 마녀 탈환(?)에 성공한 우리반은 카즈를 끌고 우리 반으로 도망쳤다. 앞문과 뒷문을 꼭꼭 잠근 우리는 창문에 보초까지 세웠다. "야, 3반!! 문 열어!!" "양호 선생님이 너네꺼냐!!" "짜증나!! 3반 뭐야!!" 잠시 후, 몇몇 녀석들이 우리반의 문을 두드리며 난리를 피웠다. 애들이 더 몰려오지 않을까, 하고 염려한 우리반 녀석들이 술렁거리자, 사노가 교탁을 가볍게 탁탁 치며 말했다. "얘들아, 조금만 버텨보자. 교장하고 다른 선생들이 돌아오면, 녀석들도 난리를 피우지는 못할꺼야." "에이씨, 이 놈의 미친 교장은 대체 어딜 간거야!" "전자 음악 동아리 놈들, 왜 양호 선생님을 가지고 지랄이래?" "짜증나는 놈들이야, 아무튼!!" 책상에 걸터 앉은 채, 가만히 우리를 훑어보던 카즈는 픽 웃으며 말했다. "3반에게 신세를 졌군." 카즈의 말에, 갑자기 불탄 우리반 녀석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소리높여 소리쳤다. "걱정마세요!! 저희가 다른 반 놈들, 다 막아드릴께요!!" "선생님은 저희 담임이나 마찬가지에요!!" .....오늘따라 애들이 유난히 오버하네;; "그런데 사노, 우리 담임은 왜 안 나와? 요새 통 보지를 못했네." 내 말에 사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담임, 애 낳으러 갔잖아." "에? 진짜?" "맨날 학교를 빠지니, 알턱이 있나~" 센도는 내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다카오카는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했다, 슈야. 담임이 널 얼마나 생각하는데." "저 녀석, 은근히 무심하다니까." "맞아. 생긴 건, 다정다감해지고." 무안해진 내가 귓볼을 만지작 거리자, 센도가 내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도 귀엽잖아. 냉정한 우리 자기~" "....누가 자기야!!" "아이고, 형님~ 지가 실수를 했구만요~ 부디 화를 푸십쇼~" 센도가 굽신거리며 말하자, 켄지가 찡그린 얼굴로 웃었다. "센도, 비굴해." "맞아. 저 자식 비굴해." 이런 게 군중 심리라는 걸까. 우리반 녀석들은 센도에게 휴지와 쓰레기를 던지면서 "비굴해"라고 한마디씩 던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카즈는 쿡쿡 거리고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튼 특이한 반이라니까." [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38 '왜 저러고 계시지?'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가?' 창가로 자리를 옮긴 카즈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반 녀석들은 흘깃흘깃 카즈를 쳐다보는 폼이, 뭔가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감히 카즈의 공간에 끼어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슈야, 괜찮아?" "어? 뭐가?" "오늘 무리했잖아." "무리는 무슨.... 괜찮아." 켄지는 그제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켄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켄지, 고마워." 켄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평소 때의 차분한 그로 돌아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우린 친구인거지?" "그러엄! 당연하지!" 켄지는 쓸쓸하게 웃으며 내 뺨을 가만히 쓸었다. ".....슈야, 좋아해." ".....응, 나도." 켄지는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켄지는 내 이마를 쓸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마. 난 괜찮으니까...." "................." "넌 좋은 녀석이야." 켄지, 너야말로 좋은 녀석이야..... "그런데 슈야. 아무래도 미열이 있는 것 같은데?" "헤에?" "어지럽거나 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조금... 앗, 아냐! 괜찮아!" 켄지는 내 팔을 끌어당겨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아프다고 말하는 건 폐가 아니야." "......응......" "사노, 선생님들 오신 것 아냐? 밖에 애들 없는 것 같은데?" "그래?" 사노는 잠궈두었던 앞문을 열며 복도를 내다보았다. 바닥에 주저 앉은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우리반 녀석들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그만 나가자. 선생님들 오신 것 같아." 켄지는 마이와 넥타이를 챙기며 천천히 카즈를 향해 걸어갔다. 카즈는 켄지의 기척을 알아채고, 창 밖에서 시선을 떼냈다. "무슨 일이지?" "선생님, 퇴근 안하시나요" "해야지." 카즈가 짧게 말하며 가운과 겉옷을 챙기자, 켄지가 가만히 내 팔을 끌며 말했다. "그럼 슈야 좀 데려다 주세요. 몸이 조금 안 좋은 모양이에요." "괘, 괜찮다니까!" "고집 피우지 말고 들어. 괜히 무리해서, 내일 결석하는 것 보다는 낫잖아." 나는 켄지를 돌아보았다. 켄지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잔잔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카오카, 우린 그만 내려가자." "슈야는?"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어엇, 그래? 그럼 내가 데려다 줘야지!" "너는 나나 데려다 줘." 켄지는 나를 향해 달려오는 다카오카의 목을 가볍게 조르며 반대편으로 질질 끌었고, 교실쪽 창문을 잠그던 사노는 나와 카즈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사노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카즈가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사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센도는 우리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여어, 그림 좋습니다?" "까불다 다치지?" 사노는 센도의 뒷통수를 탁 내리치며, 켄지가 그랬던 것처럼 센도를 질질 끌고 교실을 나섰다. 애들이 모두 교실을 나가자, 카즈가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집에 가자." ".....응....." 켄지의 말대로 조금 무리를 하기는 했지만, 미열은 집에 오는 길에 금방 내려버렸다. 가뿐한 기분으로 옷가지들을 챙기고 차에서 내리는데, 빌라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멀리에서 였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처럼 새하얀 사람도 없을테니까. "카오루?" 무언가 커다란 것을 끌어안고 있던 카오루는,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걸어왔다. 뺨을 때리는 걸까, 하고 흠칫 어깨를 움츠렸는데, 정말 의외로.... 카오루의 팔은 나를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난로를 끌어안은 것처럼, 카오루의 몸에서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카오루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카오루, 열 있는거 아니야? 상당히 뜨거...." "내 몸에 손대지 마!" 카오루는 내 손을 찰싹 쳐내며 말했다. 난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카오루?" 차 문을 잠그고 뒤늦게 나타난 카즈가 내 등 뒤에 서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카오루는 물끄러미 카즈를 올려다 보다, 환하게 웃었다. "카즈야...." "집에 안 가고 뭘 하고 있는거냐." "갔다가 왔어." "왜?" "집에.... 그 여자가 있어서." ....아마도, 유키에를 말하나는 거겠지. "카즈야, 나 잠깐만 들어가 있으면 안될까....?" "안돼." "이렇게 부탁할께. 응?" 카즈는 그의 옷깃을 움켜쥐며 처연한 얼굴을 하는 카오루를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보다, 고개를 홱 돌리며 그의 손에 잡힌 옷깃을 빼냈다. "부자가 번갈아서 성가시게 하는 군." 카즈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카오루가 뻘쭘하게 서서 카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카오루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들어가자. 응?" ".................." "초여름이라고는 하지만, 밤은 아직 쌀쌀해. 이러다 감기 걸린단 말이야." 카오루는 어린 짐승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카오루의 팔을 잡고ㅡ손을 잡는 건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ㅡ집 안으로 들어갔다. "슈야." "응?" 카오루는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것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좋은 거 보여줄께." "좋은 거?" 카즈는 부엌에서 시장 봐온 것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있었다. 카오루는 살짝 고개를 돌려 카즈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방으로 가자. 이거, 카즈야 몰래 봐야 하는 거야." "헤에?" "얼른얼른." 나는 카오루에게 이끌려 내 방으로 들어갔다. 카오루는 조심스럽게 방문 밖을 살피다가, 방문을 걸어 잠그며 내 앞에 주저 앉았다. "짠!!" 카오루는 밝게 웃으며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오래되어 보이는, 다 헤지고 헤진 사진첩이었다. "이게 뭐야....?" "카즈야 사진첩!" "앗, 정말?!" 카오루는 "쉬잇."하고 손가락을 입 앞에 가져간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즈야는 다른 사람이 자기 사진 보는 거 싫어하니까 몰래 봐야 되." "응, 응. 알았어." 카오루는 헤실 웃으며 내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소중한 물건을 다루는 손길로 조심스럽게 사진첩을 넘겼다. "앗... 이게 카즈야? 완전히 핏덩이네?" "응, 간호사 언니가 찍지 말라고 한 걸 아빠가 몰래 즉석 사진기로 찍은거야. 눈 봐, 무지 크지?" "헤에... 정말." 다음 장을 넘기자, 정말 카즈와 쏙 빼닮은 꼬맹이 하나가 방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꼬맹이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한 손에 토끼 인형을 들고 있었다. "귀, 귀엽다...." "그치그치? 이 토끼 인형, 아직까지 우리 집에 있다?" "와아, 정말?" "아, 그렇지. 이 사진 좀 봐봐." 카오루가 가리킨 사진 속의 어린 카즈는 카메라를 향해 잔뜩 애교를 부리며 방긋 웃고 있었다. 카오루는 애잔한 눈으로 사진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카즈야, 어릴때 부터 딸기를 무척 좋아해서.... 엄마가 아무리 [까꿍~]해도 전혀 웃지 않다가도, 이렇게 딸기만 보면 예쁘게 웃고는 했어. 이 사진도, 아빠가 딸기를 들고 찍은거야." "헤에....." "이건 유치원때 사진인데, 봐봐. 애들이 전부 카즈야를 보고 있지?" "앗, 정말..." "어릴때부터 인기인이었다니까, 카즈야는." 카오루는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카오루, 정말로 카즈를 좋아하는 구나.... "뭐야, 날 보지 말고 사진을 보라니까." "어? 응, 보고 있어." "이것 봐. 너무 귀엽지? 이건, 카즈야가 유치원에서 학예발표할 때." "앗, 정말! 너무 귀여워!" "그리고 이건 초등학교 때." "헤에... 지금이랑 똑같네." "응, 하지만 그 때는 더 귀여웠어. [형아~ 형아~]하면서 쫄랑쫄랑 쫓아다닌 게, 얼마나 예뻤다고...." 카오루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카즈의 사진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중학교 때는.... 늘 골골 거리기나 하는 나를 지켜줬었어. 남자 선배들이.... 한번은 따로 불러서 험한 장난을 치려고 했는데.... 카즈야가 나타나서 날 구해줬었지. ....아니, 나 대신 맞았어. 날 꼭 끌어안고.... 선배들이 계속 발로 차고 때리는 데도, 날 놓지 않았어...." 툭하고 무언가가 사진첩 위에 떨어져 내렸다. 카오루는 재빨리 손으로 사진첩 위에 떨어진 그것을 훔쳐내며, 몸을 웅크렸다. "난.... 아무것도 못했어.... 카즈야가 계속 맞고만 있는데도..... 난 아무것도....." "카오루....." "카즈야는.... 얼굴도, 팔다리도.... 상처 투성이가 되어서는..... 자기는 건강하니까.... 괜찮다고..... 나만.... 괜찮으면.... 자기도 괜찮다고...." 카오루는 욱욱 거리는 소리를 내며 심하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난 주저주저 하다가 카오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정말.... 오랫동안 사랑했단 말이야.... 어쩌면 카즈야가 날 카오루라고 부르기 전부터...." 감출수록 커질 수 밖에 없어.... 항상 곁에 있으니까.... 늘 곁에서 미소를 지어주고 있으니까.... "....카즈... 카즈야...." 이 작은 주먹을 쥐고, 얼마나....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을 참아왔을까.... 나는 카오루의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카오루의 작은 어깨가 유난히 여리게 느껴졌다. "네가... 너무 미워.... 난.... 난 정말.... 오랫동안 카즈야를....." "...카오루......." "아니야, 미안해. 이제 됐어." 카오루는 날 가볍게 밀어내며 손등으로 눈을 훔쳐냈다. 천천히 가쁜 숨을 고르던 카오루는 사진첩을 탁 접으며 나에게 내밀었다. "너 가져." "카....오루....?" "난 이제 필요 없어." "하지만.... 소중한 거잖아." 카오루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좋은 애인걸까. 차라리.... 못된 애라면.... 편하게 미워해줬을텐데....." "....카오루...." "....나, 갈께." "간다고? 이 밤중에?" 카오루는 내 팔을 가볍게 뿌리치며 말했다. "붙잡지 마. .....부탁이야." 카오루는 방문을 뛰쳐나가며 현관으로 내달렸다. 부엌에서 "카오루....?"하고 의아하게 그를 부르는 카즈의 목소리가 들린 후, 쾅ㅡ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슈야, 무슨 일....." 카즈는 방문에 선 채로 나를 바라보다가 국자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으며 나를 살짝 끌어 안았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는데." 아아.... 내가 울고 있었나....? "울지마. 네가 울면 미칠 것 같으니까." 카즈는 내 어깨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카즈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카오루의 눈물이 너무 차가워서.... 난 그렇게 한참동안 카즈에게 안긴 채 울기만 했다. "이제 다 울었어?" "............." "이제 그만 저녁 먹자. 국, 다 식었겠다." 카즈는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만히 덮으며 말했다. 나는 가만히 나를 달래듯 말하는 카즈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몇시야?" "11시 조금 넘었어." ".....나, 무지 오래 울었네." "응, 1시간만 더 울면 기네스 북에 올리려고 했어." ".....피이. 그 정도는 아니다, 뭐."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식탁 앞에 앉았다. 다 식은 국을 다시 끓이던 카즈는 [우우우우웅]하는 진동음을 듣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히데야키 카즈야입니다." "................" "뭐라고....하셨습니까?" "................" 카즈는 거칠게 앞치마를 벗어던지며 방으로 뛰어갔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카즈는 그의 근처를 서성거리는 나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열쇠를 챙겨들며 말했다. "나갈 준비해." "응."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겉옷 하나를 챙겼다. 벌써 차에 탄 채 나를 기다리는 카즈는 평상시답지 않게 상당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내가 차에 타자마자, 카즈는 거칠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렇게 40분이 다 지나가도록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젠장...." 카즈는 이를 악물며 엑셀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그렇게 20분을 더 달리자, 새까만 도시의 외각에, 파리하게 불켜진 초록색 십자가가 보였다. 카즈는 빈공간에 차를 밀어넣다시피 주차를 하고는 급하게 병원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버지!!" "들어갔다." 카즈와 정말 똑같이 생긴.... 하지만 느낌은 전혀 다른 아저씨 한분이 우리를 맞이했다. 카즈는 거대한 철문 위에 켜져 있는 [중환자실]이라는 글자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주먹으로 세게 철문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카오루.... 카오루....!!" "그만해." "놔.... 놓으라고!! 카오루....!!" "그만하라고, 이 멍청아!" 카즈의 아버지는 카즈의 어깨를 벽에 밀어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카즈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떨궜다. "어린애처럼 뭐하는 짓이야. 이런 일, 한 두번 겪은 것도 아니잖아!" ".......했단 말이다." "뭐.....?"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했단 말이다...." 카즈의 아버지는 천천히 카즈의 어깨를 놓으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해줘 봤자 아무 소용 없다. 저 녀석, 네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카즈는 고개를 툭 떨구며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주저 앉았다. 카즈의 입에서 부서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미안해, 형..... 미안해....." [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39 째깍째깍ㅡ. 손목시계 소리가 크게 들릴 만큼 병원 복도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문 앞을 서성거리다 카즈를 돌아보았다. 카즈는 여전히 벽에 기대 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마...." 난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카즈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카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슈야....." "분명 괜찮을테니까...." ".....그래....." 카즈는 고개를 떨구며 스쳐지나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카즈의 앞에 천천히 움켜 앉았다. "미안해, 도움이 못 되어 주어서...." 카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가만히 카즈의 뺨을 쓸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뭐냐, 꼬맹이." 카즈의 아버지가 빙글빙글 돌리던 담배를 탁 부러뜨리며 말했다. 나는, 카즈와 너무 닮은 그 의 눈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카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며느리, 아니.... 사위다." "뭐?" 툭ㅡ 하는 소리와 함께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카즈의 아버지는 부스스하게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나를 직시했다. "너, 몇 살이냐?" "....17살이요." 카즈의 아버지는 어이 없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으며, 카즈를 향해 말했다. "카즈, 너 원조 교제도 하냐?" "당신 재혼 상대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할 말 없군." 카즈의 아버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칼만 부스스하게 쓸었다. "꼬맹아." "....슈야입니다." "엉?" "하나마치 슈야 입니다." 카즈의 아버지는 벙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까딱 거리며 말했다. "좋아, 하나마치 양." ".....남자입니다." "그래, 하나마..... 뭐?" 카즈의 아버지가 멍한 얼굴로 되묻자, 카즈가 그를 노려보며 짜증이 배여나오는 말투로 말했다. "나이가 들더니 귀까지 먹었나?" "야, 너...." 카즈의 아버지는 당황한 얼굴로 "야, 너..."를 몇 번 반복하다가, 새로 담배를 꺼내 손 끝으로 핑글핑글 돌리며 말했다. "너, 그런 취향이었냐? 아니, 취향은 그렇다 쳐도.... 그 결벽증은 어쩌고?" 카즈는 내 팔을 끌어, 나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 녀석은 예외야." "허..... 대체 어떻게 된거야?" "몰라. 어쨌든 이 녀석은 예외야." 카즈의 아버지는 담배를 돌리던 것을 멈추며, 살짝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좋아, 카즈는 그렇다 치지. 하나마치 군, 자네 부모님은 뭘 하시는 분이신가? 이런 밤시간에 자네가 카즈와 함께 나가도록 허락해 주시던가?" "없어. 부모님 같은 건." 카즈는 세게 끌어안으며, 내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카즈가 숨을 내쉴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옷 속에 파고들었다. "이 녀석은 내꺼다." "......내가 언제 내꺼라고 했냐? 내가 물은 건, 그 녀석의 부모님이다. 네껀지 어쩐지가 아니라고." 카즈는 내 어깨를 두 팔로 두르며 말했다. "부모님은 없어. 내가 죽여버렸으니까." "아아, 그래? 그럼 하나마치 군, 자네는 잔인한 복수를 꿈꾸며 내 아들을 홀려 죽음에 이끄는 건가? 아하하~ .....가 아니잖아, 이 악마 같은 놈아. 제대로 설명해." 카즈는 입을 꾹 다문 채, 내 손만 쪼물락 거렸다. 나는 카즈의 팔을 가만히 끌어안으며 말했다. "부모님은 외국에 나가 계세요." "사업을 하시나보지?" "아뇨. 제가 스스로 죽어가도록 방치하시는 거에요." "그게.... 무슨 말이지?" "상관 없으신 거죠. 혈우병을 가진 비리비리한 첫째를 대신할 건강한 둘째가 있으니까." 툭ㅡ하는 소리와 함께 두번째 담배가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혈우병...이라고?" "예." 나는 짧게 대답했다. 카즈는 내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카즈, 너....." 싫어... 카즈를 비난하지마. "밤일은 어떻게 하고 있냐?" "..................." 카즈는 고개를 툭 떨구며 낮게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신문에 나게 해줄까? 병원 복도에서, 아들 손에 맞아 죽은 아버지." "아아, 사양하지. 이래뵈도 곧 결혼할 새신랑이니 말이야." ".....뻔뻔하군." 카즈의 아버지는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왠지 걱정되는데. 꼬마, 아니.... 하나마치 군, 하혈은 안하나?" "..............." "카오루가 하혈을 했을 때, 난 무지 당황했었는데." "..............." "하긴 뭐, 저 녀석은 꼴에 양호 선생이니. 혈액 응고 주사 정도는 놔줄 수 있겠지." 나는 카즈의 아버지의 말에 점점 더 고개를 깊이 수그렸다. 얼굴이 화끈화근 달아오르면서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만해. 당신 며느.... 아니, 사위가 곤란해 하잖아." "아아, 미안하네. 사위. 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호기심이 왕성해서 말이야." 나는 카즈의 팔을 풀며 조심스럽게 카즈의 아버지를 올려다 보았다. 카즈의 아버지는 카즈가 자주 짓는 표정ㅡ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뭐야?"라고 묻는 듯한ㅡ을 지으며 말했다. "뭔가, 하나마치 군. 설마 나에게 반해버린 건가?" "...................."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저씨는....." "아저씨? 지금 아저씨라고 했냐?" 카즈의 아버지는 눈쌀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난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 그럼 뭐라고...." "장인 어른이라고 불러봐." "예, 예엣?!" "장인 어른이라고 부르라고." 나는 잔뜩 당황해서 카즈를 돌아보았다. 카즈는 고개를 툭 떨구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그렇게 불러." "자... 장인 어른이라고 부르라고?" "너, 내 남편 맞잖아. 나보고 마누라라며." 나는 다시 카즈의 아버지에게로 눈을 돌렸다. 카즈의 아버지는 어린아이 같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불러보라니까, 사위." ".....어...른." "안 들려." "자, 장인 어른!!" "좋아. 그 기백이다, 사위." 카즈의 아버지는 담배를 손등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래, 할말 이라는 건?" "....제 병, 신경 쓰시지 않는 건가요. 전 그 병 때문에 부모님에게조차...." 나를 차갑게 바라보던 아버지.... 그리고 따스한 비.... "버림 받았....는데." 슬프게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던 어머니가 떠올라, 목소리가 조금 흔들려버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잘 들어라, 사위." 카즈의 아버지는 담배를 손으로 탁 잡으며 말했다. "카즈 놈처럼 무식하게 건강한 놈이 있으면, 너처럼 연약한 놈도 있는거다. 까짓 혈우병이 있으면 어떠냐? 밥 잘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됐지. 우리 카오루 봐라, 혈우병 때문에 더 청순가련해 보이고 예쁘지 않냐?" ".....아저....아니, 장인...어른...." "훗, 감동했냐? 하지만 반하지는 마라." ................... "장인 어른이라는 말, 딸이 없어서 평생 못 들어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들어보게군. 뭐.... 꽤 괜찮은데? 예쁜 사위가 [장인 어른]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카즈의 아버지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동전을 짤랑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래, 음료수라도 사줄까?" ".....당신이 왠일로?" 카즈의 아버지는 우리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옛 말에도 있잖냐. 사위 사랑은 장인 어른이라고." "......바보냐? 사위 사랑은 장모다." "지금 날 무시하냐? 내가 그깟 것도 모를 것 같아?" "......됐으니까 가서 음료수나 뽑아와." 카즈의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복도를 걸어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아참, 카즈." ".....왜." "내 손주 갖게 되면 꼭 연락.... 알았어, 가면 될꺼 아냐!!" 카즈의 아버지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중얼거리 듯 말했다. "망할 놈. 뼈 빠지게 키워났더니만, 다 컸다고 눈이나 부라리고....." "................" 카즈의 아버지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카즈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미안." "으응, 뭐가?" "저 놈, 별로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시덥지 않은 농담이나 하고." "아, 아냐. 상당히 멋진 분이신 걸." "멋지기는." 나는 카즈의 손등을 뺨에 가져갔다. 차가운 감촉, 기분 좋아ㅡ. "아버지, 아직도 카오루를 사랑하는 거지? 그러니까 새벽이 다 지나도록 카오루를 기다리고 있는거지?" 나는 카즈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혈우병 걸린 아이라고, 홱 버려버리는 부모도 있잖아. 그런데 그 아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지지 않아?" "....슈야, 넌 버려진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잖아?" 카즈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밝게 웃으며 카즈를 감싸안았다. "괜찮아, 카즈. 난 지금 행복해." "........그래." 그 때 갑자기 탁ㅡ 하는 소리와 함께 [중환자실]이라고 쓰여진 푸른 간판의 불이 꺼졌다. 나와 카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ㅡ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간이 침대에 누워있는 카오루가 보였다. "카오루.....!!' "조용히 해주십시오. 환자분, 쇼크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났으니까요." 작은 알 안경을 쓴 의사 선생이 복도로 옮겨져 나가는 카오루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카즈는 다 풀어진 넥타이를 벗어 손에 쥐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교통사고라고는 들었습니다만." "출혈 과다 때문에 쇼크 상태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환자분 손목에 상흔이 있던데요?" "그게 무슨....." 의사는 차트를 접어 한 팔에 끼며 말했다. "보호자 분은 사고라고 하셨지만, 저도 병원 경력차 10년입니다. 사고하고 자살기도를 구별하지 못할만큼 풋내기는 아니죠." 카즈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자살....기도라고 하셨습니까?" "처음 자살을 기도 하는 사람은 삶에 대한 미련과 두려움 때문에 손목에 가는 상흔을 많이 남기는 법이죠." ".................." 의사는 무신경한 얼굴로 옆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성인치 수면제 링겔을 맞췄으니, 오늘 하루는 꼬박 잘껍니다. 왔다갔다 하면서 환자분 거슬리게 하지 마시고, 환자분이 잠에서 깨어나셔도 되도록 안정을 취하게 해주십시오." 의사는 할 말만 줄줄이 한 후 "그럼."하고 짧은 인사를 하며 우리를 지나쳤다. "....자살.....이라니." 카즈는 벽에 등을 기대며 텅빈 얼굴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멍하니 뜨여진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나.... 때문....인가....?" "카즈." "내가..... 죽인....건가.....?" 나는 카즈의 허리를 와락 끌어 안았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작은 떨림 같은 게 느껴졌다. "카오루는 그렇게 죽어버릴 사람이 아니야.... 카즈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어버릴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꺼야. 아니, 분명 착오가 있었을꺼야. 그 의사, 나이도 얼마 안 많아 보였다고. 10년차라는 거, 분명 거짓말일꺼야." "카오루, 나온거냐?" 카즈의 아버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음료수 캔이 여러개 들려 있었다. "역시.... 아버지의 피를 타고나는 게 아니었어." 카즈는 날 밀어내며 복도의 반대편으로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카즈의 뒤를 따라가려고 하자, 카즈의 아버지가 내 어깨를 잡으며 카즈를 향해 말했다. "카즈, 그렇게 날 원망해서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원망해라." "..............." "하지만, 미인으로 태어난 게 죄는 아니잖냐." 나는 카즈의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카즈의 아버지는 쓰게 웃고는 있었지만, 그 말이 농담으로는 들리지는 않았다. "....슈야, 미안." "카즈....?" "잠시만 나갔다 올께." "돌아.... 올꺼야?" 카즈는 우뚝 걸음을 멈추며 나를 돌아보았다. 슬프게나마, 카즈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래. 정리가 되면." ".......응. 빨리 와." 내 어깨에 놓인 카즈의 아버지의 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카즈의 아버지는 복도에 놓여진 긴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나를 응시했다. "포도? 아니면 딸기?" "....딸기요." 나는 카즈의 아버지에게서 딸기 음료를 건네 받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카즈의 아버지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가볍게 탁탁 두들겼다. "안 잡아먹을테니까 옆에 앉아." 나는 주저주저하다 벤치의 끝에 조심스레 앉았다. 카즈의 아버지는 벽에 뒷머리를 대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나도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나는 카즈의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는 길게 뻗은 속눈썹을 들어올리며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쓰게 웃었다. "난 그걸 인정할 수가 없었지. 아버지는 상당한 미인이셨으니까." ".....장인 어른도 미인이세요." 카즈의 아버지는 픽 웃으며 다시 눈을 내리감았다. "미인이 아닌게 이상한거야. 자랑처럼 들리겠지만, 우리 집안은 대대로 미인 집안이거든." "헤에......" "일종의 저주 같은 거지." 카즈의 아버지는 부스스하게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한 아이만 낳거나 여자아이를 먼저 낳으면 괜찮은데, 둘째로 태어나는 미인 사내놈은 꼭 집안의 불화를 일으키거든." "그런......." "한 형제인 카오루가 카즈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그다지 충격적인게 아니었다. 그래서 카오루가 카즈 대용으로 나를 써먹으려 했던 것도 대충 눈 감아 준거지. 왜냐하면.... 나도 둘째거든." 카즈의 아버지는 담배를 꺼내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내 위에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그렇게 호시탐탐 내 몸을 노렸지.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카즈의 할아버지도 둘째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걸 금방 눈치채고 형을 집안에서 쫓아냈지." "................" "카즈가 내 사위라고 널 소개 했을땐 퍽 당황했다만.... 카즈 대에서, 이 빌어먹을 핏줄이 끊기는 것도 좋겠지." 카즈의 아버지는 담배를 탁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카즈 놈의 결벽증은 완전히 고쳐진거냐?" "아뇨, 아직....." "신기하군." 카즈의 아버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정말 하늘이 내려준 사위인가...." "................." "그런데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 말이다." 카즈의 아버지는 다시 담배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너네는 밤일 하다가 피가 나면 어떻게 처리하냐? 정말로 응급처치 하고, 응고 주사 맞고, 없었던 일로 하고 각자 자냐?" "....난 적 없는데요...." "엥?" "피... 피 같은거.... 한번도...." "처음에 했을때도?" 나는 민망해져서 고개만 끄떡거렸다. 카즈의 아버지는 가벼운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허.... 카즈, 고 놈.... 나보다 고수구만?" "..............." "그런데 사위야. 넌 위냐, 아래냐?" "위....? 아래....?" 카즈의 아버지는 천천히 날 훑어보며 말했다. "흐음, 아무래도 아래쪽이겠지?" 뒤, 뒤늦게 이해했다. "..............." "하하, 얼굴 빨개졌네. 귀여운 놈." 카즈의 아버지는 내 어깨를 한팔로 와락 끌어 안으며 말했다. "바람 피우지 말고, 우리 애 잘 데리고 살아라?" 왠지 잔뜩 부끄러워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떡거렸다. 카즈의 아버지는 픽 웃으며 내 머리를 부스스 하게 쓰다듬었다. "저어, 그런데... 장인 어른..."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 물론, 카즈 놈처럼 싸가지 없는 말투는 사양이지만." 나는 음료수 캔을 입술에 갖다댄 채 한참을 달싹거리다가, 그것을 떼어내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카오루.... 대체 어떻게 된건가요? 자살... 기도....는 아니겠죠, 설마...?" 카즈의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사위, 너는 죽고 싶을 만큼 절망적인 적이 있었냐?" [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40 "죽고 싶을 만큼...." 나는 천천히 그 말을 되뇌였다. 카즈의 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툭 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즈를 찾으러 나가보마." 나는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어디선가에서 들리는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눈 앞이 뿌얘지고 있었다. "절망적인....." 비가 오던 그 날이 떠올랐다. 내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은.... 나의 가족. 하지만 난 그 가족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슈야....- 엄마는 울고 있었다. -꾝.... 올꺼야.... 엄마.... 믿지?- 알고 있어. 이대로 내가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꺼라는 것....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정말 버림 받은 것 같으니까. -그래.... 착하네, 우리 슈야....- 엄마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꼭 돌아와야해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울고 싶었다. -말도 잘 듣고.... 아프지도 않을께요.-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다. -그러니까.... 얼른 다녀오세요- 비가 눈물을 씻어 준다. 상냥하도록 차가운 비ㅡ. -버리지... 말아주세요.... 절....- 사라져가는 나의 가족을 향한 나의 작은 바램.... 하지만 홀로 남는 나. -착한 아이가 될테니까....- 눈물은 오직 비만이 알고 있다. 날 끝까지 지켜주는 건 오직 그 뿐. -태...어나지 말고 죽어버리지...- 많이 아픈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으니까. 슈스란처럼, 엄마의 품에 안겨서 사랑받는 아이의 웃음을 짓고 싶었으니까. -어째서 말하지 않은거니...-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엄마는 또 울고 있었다. -정말....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거니....-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차라리 죽어버리지.... 이렇게 힘들게 할꺼면.... 태어나지 말고 죽어버리지....- 착한 아이가 될께요.... 그러니까 절 버리지 말아요, 엄마.... -형, 또 아파?-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나보다 커다란 동생. 건강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아이. -보지마, 슈란.... 네 형을 보지마....- 엄마가 슈스란을 끌어안으며 말한다. 하지만 엄마.... 내 병은 옮지 않아.... -슈란, 넌 아프면 안돼.... 알았지....?- 나도 사랑해줘.... 나도 안아줘.... 나도..... 나도..... 가족이라고 불러줘.... -슈란, 나가 있어라.... 착하지?- 울지 않았다.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으니까. -넌.... 정말.... 어린애가 독하기도 하구나. 어떻게....- 슈스란이 나가자마자,나를 보며 우는 엄마. 내 앞에서.... 엄마는 늘 울고 있었다. -엄만....너 때문에 너무 힘들어....- 버리지 마.... 날 포기 하지마.... -차라리.... 네가 없어으면 좋겠어....- 난..... 이렇게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어째서.... 한번도 날 보면서 웃어주지 않아....? 어째서.... 한번도 날 안아주지 않아....? 비가 내렸다. 툭툭 바닥을 건드리는 차가운 비는, 상냥하게 내 어깨를 만져주었다. -꾝.... 올꺼야.... 엄마.... 믿지?- 엄마가 나를 감싸안아주며 말했다. [마지막]이란 의미라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으로 느낀 엄마의 가슴은 너무나도 따뜻해서.... 행복함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 착하네, 우리 슈야....- 엄마.... 나 착해요....? 이렇게 하면.... 나,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는거야....? -.....ㅅ.....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빗 속에 주저 앉아 있는 나를 불렀다. 나는 이 질퍽한 절망속에서 헤메이며 나갈 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문은 보이지 않았다. -......슈야...- 벽을 두드리자, 저 편에서 들려오는 아늑한 목소리ㅡ. -....슈야....-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나를 부른다. 빗 속에 앉아 있는 나에게 내밀어 지는 손ㅡ. -네가 내 눈 앞에 살아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축복 받은 기분이랄까.- 모든 슬픔으로 부터 나를 지켜주는 단단한 팔ㅡ. 오직 내 앞에서만 보여주는 따뜻한 미소ㅡ.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니까.... 계속 그렇게 살아줘- 그리운 목소리.... 그리운 향기....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아.... 절망은 까맣지만은 않구나. 이렇게... 이렇게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걸. "슈야...." 바라보고 있어도 그리운 느낌이 나는 사람... "다녀왔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내 앞에 서 있는 카즈를 감싸안았다. 카즈의 손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응, 다녀왔어." "....보고 싶었어." 나는 내 앞에 움켜 앉는 카즈를 깊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카즈의 뺨을 쓸었다. "고마워.... 날 구해줘서." "....슈야...." 나는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잘 모르겠어.... 내게 카즈와 같은 힘이 있을지." 나는 카오루의 간이 침대가 사라진 병원 코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할수만 있다면.... 나도 카오루를 도와주고 싶어." 나는 천천히 카즈를 돌아보았다. "카즈가 그랬던 것처럼.... 절망이 슬프지만은 않다고 말해주고 싶어." 카즈는 나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카즈는 힘을 북돋아 주려는 듯이,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카즈의 향기를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카즈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녀올께." 나는 카즈를 살짝 밀어내고,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차가운 벽을 따라 병원 코너를 돌자, 굳게 닫혀진 병실 문에 쓰여진 [히데야키 카오루]라는 글자가 보였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병원 문을 열었다. "....카오루?" 카오루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침대 옆으로 다가가자, 카오루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나, 살아 있네." "......응......" 카오루는 팔을 내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나는 괜히 어색해져서, 링겔 줄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저어, 졸립지 않아? 의사 선생님이 수면제하고...." "생각했어." 카오루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카즈야는 죄책감으로라도 나를 기억해 주지 않을까, 하고 나쁜 생각을 했어." ".....카오루....." "하지만 그건 싫어. 그런 잔인한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아. .....살고 나서야 그런 생각을 했어. 바보같게도." 카오루는 이불을 끌어 머리끝까지 덮어버리며 말했다. "하지만 모르겠어. 나는 어째서 살고 있는 걸까...." "......카오루......" "너는.... 사는 게 행복해?" 카오루는 이불을 끌어내리고는, 천천히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카오루의 투명한 눈이 나를 직시했다. "언제 죽어버릴지 몰라. 우리의 생명줄은 다른 사람들보다 배는 가느니까." "................" "싫어, 그런 건. 아무리 발버둥쳐도.... 슬프게 밖에 살 수 없잖아...?" 나는 카오루의 작은 어깨를 감싸안았다. 카오루는 몸을 움찔했지만, 어깨를 빼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슬프지 않아.... 살아 있다는 건, 행복한 거야...." 카오루는 인형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카오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살아 있다는 건.... 언제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거잖아? 아주 괴로울 때도 있지만.... 나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정말 혼자인 적은 없었는걸. 이 땅을 밟고 있는 한, 땅하고 함께이고.... 이 하늘을 올려볼 수 있는 한, 하늘하고 함께 이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행복해질 수.... 없어." "행복해질 수 있어. 카오루도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걸." 나는 카오루의 눈에서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나, 카오루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카오루가 이렇게 살아 있어줬으면 좋겠어. 절망은 새까맣지만.... 그래서 행복이 보이는 걸." "........흑......." "같이 행복하게 살자...." 카오루는 입술을 꼭 문채 나를 올려다보다가, 나를 와락 끌어 안았다. 나는 카오루의 어깨를 조금더 힘주어 감싸안았다. "....듣고 싶었어. 그 말.... 난.... 쭉 혼자라고.... 모두에게서 버림 받았다고....." 카오루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카오루는 가물가물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고마워. 옆에 있어줘서." 나는 완전히 힘을 빼고 앞으로 쓰러져버리는 카오루를 침대에 눕혔다. 똑ㅡ 똑ㅡ 하고 링겔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좋은 아이네, 하나마치 군은."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카오루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카오루와 닮은 여성분이 서 있었다. "카오루의.... 어머니...?" 카오루의 어머니는 내 앞에 다가와 서며 빙그레 웃었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어떤 아이일까, 하고 생각했어. 네 얘기를 할때의 카즈는, 원래의 그 녀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헤실헤실하고 푼수 같았으니까." "카, 카즈가.... 제, 제 얘기를....?" 카오루, 아니 카즈의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즈의 말대로, 귀엽고 따뜻하고.... 타인을 행복하게 해줄줄 아는 아이구나." "그, 그렇지 않아요. 저, 저는...." "한 번 안아봐도 되겠니?" "예? 아, 예!" 카즈의 어머니는 두 팔을 벌려 나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향기가 난다. "하나마치 군, 우리 아이들을 잘 부탁해..." 카즈의 어머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은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즈, 좋은 가족을 가지고 있구나.... 조금이지만 카즈가 부러워졌다.     ㅣ 연재소설 ㅣ 단편소설 ㅣ 완결소설 ㅣ 퍼옴(추천)소설 ㅣ 패러디소설 ㅣ 테마소설 ㅣ 소설감상 ㅣ 1 3526 177 1 View Articles Name 黑香 Subject [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41 "어머...니?" 조심스레 열린 병실문 사이로 카즈가 얼굴을 내밀었다. 카즈의 어머니는 손가락을 입술 앞에 대며 "쉬잇..."하고 낮게 말한 후, 내 손을 잡고 병실문을 나섰다. "유나?" 병실 문 앞에 서 있던 카즈의 아버지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카즈의 어머니는 그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다카츠." "아아.... 카즈가 연락을 한건가?" "아뇨. 유키에라는 아이에게서 연락을 받았어요. 목소리가 참 좋은 아이던걸요?" "응, 목소리만큼 성격도 좋은 아이지." 카즈의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카즈의 아버지를 바라보다, 나를 돌아보며 내 손을 놓았다. "갑자기 잡아서 놀랬니?" "예? 아, 아뇨." "어라? 당신이 반말을 할때도 다 있군 그래? 어린애한테도 존댓말을 쓰는 게, 당신 철칙 아니던가?" "하지만 카즈는 제가 무척 사랑하는 아이인걸요." 카즈의 어머니의 말에, 카즈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헤에.... 카즈는 어머니를 무척 좋아하는 구나. "그러니까, 제게서 카즈를 빼앗아간 며늘아이한테는 무척 엄하게 대할꺼에요. 후훗..." 카즈의 어머니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카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당신이 잘못 찍었는걸. 저 아이, 남자아이라고." 카즈의 아버지의 말에, 난 괜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푸욱 숙였다. 카즈의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얘기는 카즈에게서 들었어요." "크으, 나만 모르고 있었군. 서운한데?" "후훗.... 카즈는 당신보다 절 좋아하니까요." "그래그래, 나만 이지메 했던거라 이거지? 하지만 당신도 이건 모를껄?" 카즈의 아버지가 눈을 빛내며 말하자, 카즈의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카즈의 아버지를 들여다보았다. "뭘 말인가요?" "저 녀석, 며느리가 아니라 사위라고." "예...에?" "그렇지, 사위~?"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자, 장인....어른." "들었지?" 카즈의 아버지가 우쭐해하며 말하자, 카즈의 어머니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나마치 군, 저도 장모님이라고 불러주실 수 있나요?" ".... 에..... 자, 장모님!" "어머, 귀여워라." 카즈의 어머니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살짝 끌어안았다. 이것이 내가 그리워하던 엄마의 가슴ㅡ. 따뜻해..... "잘 대해 주라고. 우리 아들 놈을 평생 데리고 살아줄 사위니까 말이야." "후훗, 그럼 존댓말도 복귀로군요." "아... 아니에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되요!" 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카즈의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아, 우리 사위는 정말이지...." "사랑스럽지?" "예에,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네요." "으음.... 게다가 말이지." 카즈의 아버지는 내 팔을 잡아끌어 카즈의 쪽으로 탁 밀었다. 카즈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카즈는 가볍게 힐책하며 가만히 내 얼굴을 살폈다. 걱정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이다. "괜찮아....?" "응." 내 말에, 카즈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카즈의 아버지는, 카즈의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봤지? 우리 사위가 보통 사람이였다면, 카즈 녀석은 분명 자기 몸을 사렸을꺼라고." "카즈, 결벽증이 완전히 고쳐진 건가요?" "그게 아니라니까. 우리 사위만 특별한거야, 우리 사위만." 카즈의 아버지는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카즈는 픽 웃으며 '당신이 어깨에 힘줄껀 없잖아'하는 얼굴을 했다. "그런데 지금 몇시지?' "음... 3시 거의 다되어 가네요. 아참, 카즈. 내일 출근해야 하지 않아요?" "토요일이라 일찍 끝나니까 괜찮습니다." "아, 그럼 다행이지만." 카즈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하나마치 군은? 내일 학교 가야 하지 않나요?" "이봐, 하나마치 군이 뭐야. [사위~]하고 불러야지." "후훗... 그렇네요." 카즈의 어머니는 작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한층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위, 내일 학교가야 하지 않아요?" "에... 가, 가야죠." "그럼 둘은 그만 집에 돌아가 보도록 해요. 이 곳은 한가한 우리가 지키고 있을테니까요." "한가하긴 누가 한가하다는 거야. 난 요새 결혼 준비 때문에 무지 바쁘단 말이야." "어머, 당신. 의리 없이 몸을 빼기에요?" 나는 정답게 다투시는 두 분의 사이에서 살짝 물러나며, 카즈의 손을 잡아당겼다. "카즈.... 나, 여기 남고 싶어. 왠지, 카오루의 옆에 있어줘야 할 것 같아서...." "피곤하지 않겠어? 마땅히 눈 붙일만한 곳도 없을텐데." "괜찮아. " 카즈는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래, 그럼. 학교에는 내가 잘 말해둘테니까." "응.... 아참! 오늘 다카오카 축구 시합있는데." "축구시합?" "응, 저번 경기때 못 가서 꼭 간다고 약속했는데...." 울상을 지을 다카오카가 떠올랐다. 켄지, 분명 곤란해 하면서도 다카오카를 달래주겠지만.... "아, 그렇지. 카즈가 사노한테 말 좀 해줄래?" "사노? 너네 반 반장 말이야?" "응, 사노는 알고 있거든..." "우리... 사이를 말이야? 어떻게?" "그, 그게.... 얘기하자면 복잡해. 나중에 해줄께." 카즈는 의뭉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카즈의 옷깃을 꼬옥 움켜쥔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다녀와. 에, 그리고...... 사랑해." 카즈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살짝 감싸안았다. "그래, 나도." 좋은 향기.... 기분 좋아ㅡ.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애정 행각이로군.' '한창때니이까요. 하지만 귀엽잖아요?' '쳇, 귀엽기는.' 두 부모님의 소근거림에, 우리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떨어졌다. 카즈의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카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즈, 많이 변했군요. 예전보다 좋아보여서 다행이에요." "......예." "어머, 부끄러워하네. 귀여워라." 카즈는 헛기침을 하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헤에.... 귀여워. "카즈, 하나마치 군을 많이 좋아하나봐요. 좋은 아이이기는 했지만, 한번도 이렇게 귀여운 행동을 한적은 없었는데." "으으으음, 그러게 말이야. 아주 꼴불견이 됐다니까." 카즈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카즈는 카즈의 아버지를 차갑게 노려본 후,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끝나고 데리러 올께." "응. 잘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요, 잘 다녀와요." 카즈는 몇 번이고 나를 돌아보다가, 엘레베이터 쪽으로 사라졌다. 카즈의 어머니는 병원 복도에 놓인 벤치에 살짝 걸터 앉으며 나를 향해 손짓했다. "여기 앉아요. 밤샘하느라 힘들었죠?" "아, 아니에요. 쌩쌩해요." "쌩쌩하긴. 눈이 다 풀렸구만." 카즈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내 반대쪽 옆에 앉았다. 카즈의 어머니는, 그런 카즈의 아버지를 살짝 내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재치있고 속깊은 아버지ㅡ.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상냥한 어머니ㅡ. 뭔가.... 따뜻한 공기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하나마치 군, 피곤하면 한숨 자도록 해요." "아,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카즈의 어머니를 억세지 않게 내 어깨를 잡아당겨, 내 머리를 그 분의 무릎 위에 누이셨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카즈의 아버지는, 어른 특유의 투박하고 뭉뚝한 손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셨다. "밥은 잘 챙겨 먹는 거냐? 왜 이렇게 쬐끄매." 카즈의 아버지는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그 투덜거림에도,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헤실헤실 웃지만 말고, 앞으로 카즈보고 맛있는 것 좀 많이 해달라고 그래. 이래서 언제 [아래]를 탈피하겠냐." 어, 얼굴에 피가 몰리.... "아래? 그게 뭐에요?" "당신은 몰라도 돼. 이건 사위와 장인 어른, 우리 남자들 만의 이야기니까." "어머, 벌써 그렇게 친해진거에요?" 카즈의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렇게 반문하고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다, 나를 와락 끌어안아 주셨다. "이렇게나 예쁜 아이인데.... 이렇게나 와락 껴안아주고 싶은 아이인데...." 카즈의 어머니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춰 주셨다. 왠지 모를 설레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나마치 군, 제 아들 할래요? 정말 많이 사랑해줄 자신 있는데...." "아......" "후훗, 안돼겠죠? 카즈와 형제가 되어버리면 곤란할테니까." 카즈의 아버지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사위로 만족해. 카즈 있겠다, 카오루 있겠다, 아들이 뭐 더 필요해?" "하지만.... 아들이 아니면 껴안아 줄수도 없고, 이마에 키스해 줄 수도 없고...." "뭐, 해주면 어떠냐? 사위를 껴안아주면 안되는 법이라고 있냐?" 카즈의 아버지는 그렇게 대꾸를 하고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말했다. "그렇지만 카즈 놈 몰래 해야 할껄? 그 놈, 날 닮아서 싸가지가 없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당신이라도 인상을 팍팍 쓰면서 대들꺼라고." "어머.... 정말 그럴까요?" "그래그래, 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조심해." 왠지 모를 행복한 기분.... 그 아늑함에, 잔뜩 웅크렸던 어깨의 힘이 풀렸다. "어라.... 자는건가?" "쉿, 쉬게 내버려 둬요. 많이 피곤할텐데...." "헤에, 보면 볼수록 귀여운 놈이란 말이야? 카즈 그 녀ㅅ... 날....ㄷㄹ..." 두 분의 도란거리는 대화소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보드라운 기분에 몸을 내맡기며, 조심스럽게 의식의 끊을 놓아버렸다. [창작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42] 뭔가 포근한 것에 둘러싸인 기분에 단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내 눈 앞에 미소를 짓고 있는 카즈의 어머니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는 내 어깨를 살며시 끌어내리며 말했다. "더 쉬도록 해요. 아직 1시간 밖에 자지 않았어요." "아, 아니에요. 덕분에 편안히 자서...."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따뜻한 다리를 베고 자서인지, 뒷머리에 축축하게 땀이 배여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돌아보다가, 원피스의 무릎에 땀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랬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나는 손수건을 찾기 위해, 허둥거리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손수건을 집에 두고 왔을게 뭐냔 말이다...!! "괜찮아요, 하나마치 군." "하,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슈야 군." 나는 무언가로 가슴을 얻어맞은 기분에, 고개를 번쩍 들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불러도 되나요?" "아....." "역시 안되는 걸까요?" "부... 불러 주세요! 슈야라고 불러 주세요!"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어머니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착한 아이네요, 슈야는." "제, 제가.... 차, 착한아이....인가요?" "착해요. 사랑스럽고." 착한 아이..... 내가 너무나도 되고 싶어했던..... "슈야군....?" "죄....송해요. 왠지.... 너무 기뻐서...." 어머니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다, 내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앞으로 그렇게 많이 불러줄께요. 우리 착한 슈야, 우리 예쁜 사위...." 어머니의 향기가 너무나도 좋아서.... 어머니의 품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나는 부끄러움도 부릅쓰고 어머니의 가슴에 파고들어 버렸다. 어머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내 등을 쓸어 주었다. 어머니.... 그 말만으로도 목이 메이는 말.... "여어, 찐한데? [금지된 사랑, 장모와 사위]라는 건가?" "어머, 당신도 참." 어머니는 쿡쿡 거리고 웃으며, 살며시 나를 떼어놓았다. 카즈의 아버지는 내 무릎 위에 생수와 빵, 그리고 과자와 사탕따위를 잔뜩 내려놓으며 말했다. "단 거, 잘 먹지?" 나는 고개만 끄떡거렸다. 아버지는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줄 알았어. 너 먹으라고 사온거니까, 아무도 주지 말고 혼자 먹어라?" "가... 감사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걸까? 나는 아버지가 주신 빵과 과자들을 품에 꼬옥 안고, 절대 아무에게도 주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 이 귀여운 놈. 이러고 있으면, 꼭 똥강아지 같단 말이야?" "어머, 당신도. 왜 하필이면 똥강아지에요." "당신이 몰라서 하는 말이야. 동물 새끼 중에서는 똥강아지게 제일 예쁘다고." 나는 빵을 베어 먹으면서, 조심스럽게 두 분을 살폈다. 두 분은 이혼하신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해 보였다. "카오루, 일어났나 보고 올께요." 어머니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아버지가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내가, 빵과 과자를 떨어뜨릴까 싶어 두 손으로 꽉 움켜쥐자, 아버지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안 챙겨도 되. 또 사줄테니까." "아, 예...." "좋아, 사위. 귀여운 짓을 했으니, 좋은 걸 가르쳐 주지." 아버지는 내 어깨를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즈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뭔줄 알아?" "강....아지?" 아버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고양이야." "고양이요?" 아버지는.... 왠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위, [미양~] 한번 해봐." "미, 미양?" "고양이가 하듯 해보라고. [미양~]하고." 이, 이상한 걸 시키시네;; "미.. 미양~?;;" "그게 아니라니까. 음... 상상해봐. 집에 가는 길에 조그만 박스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 손바닥만한 조그만 고양이가 들어 있는거야. [어이구, 귀엽다]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더니, 고양이가 조그만 입을 와앙 벌리면서 [미야앙~]한다고. 그럼 난 네 친구야, 하는 의미로 같이 소리를 내줄꺼 아냐." 손바닥만한 고양이가 조그만 입을 와앙 벌리면서 "미야앙~".... "미야앙~" "그래, 그거라니까!" .......뭐, 뭔가 배워서는 안될 것을 배우는 것 같은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써먹어 봐. 카즈 놈, 반응이 죽여줄껄?" "어, 어떤데요?" "에이, 그걸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지." ........묘하신 분;; "슈야, 카오루 일어났는데...." "아, 일어났어요?" 나는 과자 봉지들을 옆에 내려놓으며, 복도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병실 문을 열고 나를 맞이해 주셨다. "카오루, 슈야 왔어요." 카오루는 그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두 팔을 벌렸다. 나는 천천히 카오루의 침대 앞에 나아가, 카오루를 와락 끌어안아 주었다. ".....계속 여기에 있었던거야?" 카오루가 나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초췌해진 카오루의 얼굴은 평상시 보다 더 하얘보였다. "응." "......이 못난이. 바보같아." 카오루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안아줘." "에...에에?" "못난이지만.... 싫지는 않으니까." 나는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곁에 가까이 다가가자, 카오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 예쁘지?" "응? 아, 으응...."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아니, 카즈가 제일 예쁘고, 그 다음으로 예뻐." 나는 카오루를 내려다보았다. 카오루는 큰 눈망울에 나를 가득 머금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쳇.... 그런데 넌 왜 그렇게 꼬질꼬질한거야?" "우움, 잠을 제대로 못자서 그런가봐." "바보." 카오루는 그렇게 대꾸하고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나는 조금 멍해져서, 카오루가 하는 냥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뭐해, 이리와 누워." "에에엑?" "둘이 누울 수 있어. 난 날씬하니까." "하, 하지만 환자가 눕는 침대에....." "난 환자 아냐." 카오루가 눈을 흡뜨며 말했다. 난 그런 카오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카오루 말대로 해요. 아까도 편하게 못 잤잖아요." "하, 하지만...." "빨리 시키는 대로 해, 바보야. 엄마도 그러래잖아." 나는 멋쩍게 카오루를 바라보다가, 신발을 벗고 딱딱한 침대위에 올라 누웠다. 카오루는 등을 돌리고 누우며 말했다. "코골거나 하면 죽어." "응." "이도 갈지마." "으응;;" 카오루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내가 잔다고 헛짓 하지마. 죽일꺼야." "으, 으응;; 알았어, 안해;;" 카오루는 눈을 가늘게 뜨며 "흐응."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홱 돌리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푹신푹신한 베개에 머리가 닿자, 스르르 잠이 오기 시작했다. "슈야, 자?" "....으응...." "치잇, 못난이." 카오루의 투덜거림과 함께 무언가 가느다란 것이 내 어깨에 닿아왔다. 우유향? 뭔가 가볍고 사랑스러운 향이.... "못생겼지만, 특별히 안아줄께." "에....에에?!" "조용히 해. 카즈도 내가 안아주면 무지 좋아했어. ..... 물론 어렸을 때였지만." 나는 번쩍 들었던 머리를 천천히 내리고, 내 앞에 눈을 감고 있는 카오루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닮았구나, 카오루는.... "쳐다보지마, 얼굴 닳아." "으응;;" 나는 나를 힘주어 끌어안는 따뜻한 팔에 안겨, 카즈와은 상당히 다른 의미로 편안함을 느끼며 잠에 들었다. 카즈의 가족ㅡ. 너무 좋아.... [창작연재] 아이카 고교 양호실에는 악마가 산다 - [43] 머리칼을 쓸어주는 손길이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나는 잠이 깬 뒤에도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카오루가 아닌 카즈가 내 앞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떠나 그 손길만으로도 카즈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카즈의 차가운 손가락을 느끼며 나른한 기분으로 누워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카즈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손 끝이 이마로 내려와, 내 뺨에 도달해서는.... 폭 찔러버렸다. "자는 척." ".........." 민망해진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슬금슬금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나서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차원의 문아, 열려라."했는데, 귀 밝은 카즈가 이불 밖으로 내 어깨를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감히 악마 앞에서 도망이냐." "....카오루는?" 난 이불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카즈는 긴 속눈썹을 내리며 살짝 눈을 내리감았다. "카오루가 아니라서 서운한 거냐?" "에?" "어찌나 꼭 껴안고 자던지, 손가락을 다 떼어내도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더군." "히이이익?" 나는 벌떡 일어나 카즈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오해하면 안돼, 카즈! 나... 나는 정말 카즈 밖에 없단 말이야!" "아아, 그래. 그리고는 카오루의 앞에서 [난 카오루 밖에 없어]라고 속삭였겠지." "아니라니까아아!" 카즈는 "변명은 귀찮아."하고 중얼거리며 몸을 돌려 누웠다. 나는 카즈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카즈의 어머니가 잠깐 눈 붙이라고해서... 그래서 누워있었던 거야. 카오루가 누구를 좋아하는 지는, 카즈가 더 잘 알잖아." "모르는데." "...싫어, 짓궂은 장난은... 난... 난 정말 아니란 말이야..." "슈야?" 등을 돌리고 누워있던 카즈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며 내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오해하는 거 싫어... 난... 정말로... 카즈만 좋아한단 말이야..." "우, 우는 거야?" 나는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아하하하~ 그럴리가 있나!" ".........." "어라, 카즈? 썩은 밤 씹은 얼굴인데?" 카즈는 인상을 쓰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허허, 인상 쓰는 얼굴도 예쁘네. "가지고 놀았단 말이지?" "에? 아니, 그게 아니라... 에헤헤~" 내 신조는 [웃는 얼굴에 발길질하랴]이지만... 카즈라면 발길질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지;; 나는 눈에 힘을 팍팍 주고 있는 카즈를 와락 끌어안고 부비적 거렸다. 웃는 얼굴에 발길질하면, 발에라도 매달려야지! (....왠지 갈수록 비굴해지네;;) "화내지마~ 카즈가 내 말을 안 들어주니까 그랬지~" ".........." "흑, 마누라아~ 날 버리지마아~ 젖도 못뗀 우리 아가는 어찌하라고~" 내 말에 카즈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너, 다카츠랑 친하게 지내냐?" "다카츠? 그게 누군데?" "우리 아버지." 이, 이봐. 아버지 이름을 그렇게 막 불러도 되는거야?;; "그 놈이랑 친하게 지내지마라. 난 능글맞은 건 싫다." "싫으면 어쩔껀데, 마누라~?" "............" 카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왠지 정말 "발길질 하는 분위기"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난 재빨리 얼굴을 바꾸며 말했다. "아참, 카즈. 사노한테 말은 전했어?" "어." 카즈는 가볍게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네 친구들 중에 오오키라는 녀석 있지." "다카오카?" "어. 그 자식." 카즈는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빙긋 웃었다. 누구 마누라인지 몰라도 정말 예쁘다아!! "없애버리겠어." "헤에~" "....슈야, 없애버리겠다고." "응? 아, 그래?" "....내 말 안 듣고 있지?" "아니야, 듣고 있..." 웃는 얼굴에 멍해져 있다가, 뒤늦게 말뜻을 이해했다. "뭐!! 다카오카는 없애버리겠다고!!"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카즈는 살짝 귀를 막으며 말했다. "그래. 없애버리겠다고." "어.. 어째서?" 카즈는 대답 대신 겉옷을 벗어보였다. 카즈의 옷에는 붉은 피가 몇 방울 묻어 있었다. "그 자식, 코피 튀기고 도망갔어." ".............." 다카오카, 청춘이구나...;; 나는 짧은 한숨을 쉬며 카즈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카즈, 그건.... 카즈가 이해를 해야해." "나보고 이해를 하라고? 너, 내가 결벽증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거냐?" "그건 아니지만..." 원인 제공자가 카즈인걸;; "에에, 말하자면... 다카오카는 유혹에 약한 가여운 희생양이랄까." "피 튀긴 놈이 희생양이면, 난 뭐냐?" .....악마지. 그 당시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카즈는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그 원숭이 자식, 소마 자식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허허;;" "....그렇게 웃지 마." "에?" 카즈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내 볼을 잡아당겼다. "방금 [허허~]하고 웃었잖아." "에에, 으에어? 오아어~ [에에, 그랬어? 몰랐어~]" "그 놈이랑 친하게 지내지마. 이상해진다." 우우움.. 정말로 아버님의 능글맞음이 옮아 버렸나;; 에, 그러고 보니까.. 아까 아버님이 카즈 앞에서 뭘 하라고 했는데... 고양이에 관련된 거였는데... 뭐였지? 고양이 짓거리였나? "카즈." "응." "나 좀 봐봐." 나는 카즈가 나에게 눈을 고정시키는 것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손등으로 뺨을 부볐다. 카즈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하는 거지..."하는 얼굴을 했다. "에엣... 이게 아니었나?;;" "뭐하는 건데." 아, 고양이 소리! 나는 코홈코홈ㅡ 하고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은 후, 아버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박스에서 쪼꼬만 고양이가 얼굴을 빼꼼 내밀면서 "미야앙~" 그러면 나도 미야앙~ "미야앙~" "............" 어, 얼굴이 굳었어;; (이것도 아니었나?;;) "에헤헤;; 그, 그냥 못 본걸... 우아아악! 뭐, 뭐하는 거야, 카즈!" 카즈는... 말그대로... 눕혀버렸다(!) "네가 먼저 유혹했잖아?" ....싱긋 웃는다. 그럼 아까 아버님이 말한 "좋은 거"의 의미는!;; "우앗, 아냐! 유혹 하려고 한 게 아냐! 난 그냥 아버님이..." "쉿..." "[쉿]이 아니잖아, [쉿]이! 이러다 아버님이라도 들어오시면..." 달칵ㅡ. 아버님이었다. "............" "............" 나는 카즈의 밑에 깔린(!) 채로ㅡ, 아버님은 문고리를 움켜쥔 채로ㅡ. 우리는 한참동안 그렇게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이 미묘한 긴장 상태를 깨부신 아버님은.... 손바닥을 쫙 펴서 눈 앞에 갖다대며 말했다. "사위~ 난 아무것도 못 봤어~" ............. ............. ............. ............. ............. ............. ....그럼 그 손바닥 사이에서 빛나는 두 눈은 누구꺼에요!!;;;